〈 40화 〉 접점(2)
* * *
점심 무렵, 바깥에 보슬보슬한 비가 내렸다.
다만 햇빛은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내리는 비.
그야말로 여우가 요술을 부린 듯한 날씨였다.
"…아!"
그런 요지경의 풍경에 홀리기라도 한 듯.
데이지가 멀뚱히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란 눈으로, 하얀 목을 쭉 빼고서.
어젯밤에 본인이 박살낸 문 앞에서 그러고 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멍 때리고 있는 뉘집 고양이 같았다.
"??"
이따금 맑은 하늘을 보며 갸우뚱거리는 조그만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여우비라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나는 당장 해야할 일이 있었으나...
'곤란하네.'
장판파의 장비마냥 입구 한복판을 막고 있는 데이지 때문에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우리 짤막한 문지기는 누굴 길막할 깜냥이 아니어서 민폐를 끼칠 걱정이 없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여관 집 딸내미가 현관을 오갈 때.
"아줌마, 저리가."
"아, 아줌마?"
데이지가 에이미에게 '넌 모찌나간다'를 시전하자,
에이미가 못볼 표정으로 땅꼬마의 머리 위로 쉬이 넘어갔다.
아무것도 막지 못하는 문지기… 사실 데이지는 마스코트였던 게 아닐까?
"……."
결국 절호의 블로킹이 뚫리자, 땅꼬마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별 일이네.
얌전한 데이지가 어쩐 일로 남에게 시비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얘가 사람을 잘못 건드린 건 분명했다.
"얘, 너어무 귀엽다!"
17살.
한참 표독스러울 나이의 에이미.
그녀는 일부러 입구 쪽을 오고 가며 10살 짜리를 약올리기 시작했다.
길막한 것에 대한 보복이 틀림 없었다.
"저리가…!"
땅꼬마는 발끈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블로킹을 쳐봤으나….
7살이라는 세월의 간극은 무척 컸다.
결국 피지컬이 딸리는 데이지는 변변히 굴욕을 당했다.
"하지마!"
"흐즈마~ 우쭈쭈! 아이고, 귀엽다, 귀여워."
"…따라하지마. 아줌마, 짜증나…!"
"뜨르흐지마~ 쯔증나~ 시룬데? 해주세요 언니~ 하면 갈게."
"으으."
부르르 떨리는 왜소한 어깨가 몹시 분해 보였다.
어른의 치졸함이 많이 매운 모양이다.
"얘, 우니? 진짜 울어? 아, 어떡해~ 우는 것도 귀여어…."
'악마냐.'
사탄 마귀도 울고 갈 정도로 악독하다.
즈그집 문짝을 작살낸 게 누군지 알면 까불 수 있을 지 궁금해진다
그렇게 팝콘을 씹고 있던 중.
"…으."
데이지의 미라클 조막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관 집 딸내미가 여관 문짝 꼴이 나기 전에 황급히 경고를 보냈다.
"얌마, 적당히 괴롭혀. 너네 대장님이 아시면 참 좋아하시겠다? 마, 각오는 됐냐?"
"호… 누, 누가 괴롭혔다고~ 피터 씨도 참 섭섭하네. 호호."
에이미는 부모라는 말이 무섭게 슬그머니 발을 뺐다.
그나마 부모 소환이 잘 먹히는 나이대라 다행이다.
"……."
한편, 타깃을 잃어버린 데이지 펀치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딜교에서 패배한 땅꼬마의 억울함이 절절히 느껴졌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깨달아버린 추정 10세….
귀한 모습이니 뇌리에 저장해놔야지.
"히히, 이상해!"
때마침 바깥을 싸돌아다니던 바람꽃이 돌아왔다.
푸른 머리카락이 투명한 빗방울과 햇살을 머금어 반짝거렸다.
비를 맞고 왔음에도 바람꽃은 어째서인지 통통 뛰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분이 업된 모습이었다.
아침에 무진장 저기압이었는데. 혼자서 산책 다녀오더니 기분이 풀려서 왔다.
누가 댕댕이과 아니랄까봐.
"저거 도깨비 짓이야? 왜 비가 와? 해 떴는데?"
바람꽃은 온 몸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파닥파닥거렸다.
상기된 뺨과 깜빡거리는 동그란 코발트 눈동자, 그리고 발랄한 목소리.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북부의 어린 늑대는 여우비를 난생 처음으로 본 모양이었다.
나는 파닥거리는 바람꽃을 보며 잠깐 고민했다.
그녀에게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주춤하는 사이.
의외의 인물이 먼저 나섰다.
"히, 그것도 몰라?"
눈물을 딛고 일어난 데이지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껏 턱을 치켜들고 있었으나, 여전히 바람꽃보다 키가 한뼘 작았다.
바람꽃은 그런 데이지를 내려다보며 연신 갈고리를 띄었다.
"…뭐야? 왜 이래?"
데이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검지로 코를 쓱 쓸으며 말했다.
"헹, 여우가 시집 가는 날이자나!"
그녀답지 않은 자신만만한 태도.
쬐끔 거만함.
그런데 조금 어설펐다.
'…그거 내가 알려준 거 같은데?'
그것도 아까 전에.
내가 황당해 하거나 말거나.
데이지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서 배시시 웃었다.
"어때? 몰랐지? 신기하지?"
문득 나는 데이지가 에이미에게 수모를 겪으면서도,
굳이 문 옆에서 존버를 탄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언제나 바람꽃에게 바보라고 구박 받던 것이 데이지였다.
그런 꼬꼬마는... 한 번쯤은 또래 친구에게 자신의 얕은 지식을 어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 똑똑해!"
세상에.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게 되는 앙큼한 꿍꿍이였다.
그러나, 그런 잔망스러운 시도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못했다.
"후우, 땅콩아."
바람꽃이라는 소녀는 겉보기와 달리 영특하고, 동시에 삐뚤어진 아이였다.
"땅콩이 아니라 데이지…."
"됐고, 이 밥팅아."
"나…데이진데."
입술을 삐죽 내민 데이지.
그런 꼬꼬마를 보며 염세주의에 찌든 댕댕이가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시끄러워. 자꾸 허튼소리야? 여우가 시집을 왜 가. 그렇다고 치더라도 비는 어떻게 오는건데? 걔네가 요술이라도 부려?"
논리정연하고도 신랄한 반박!
갑작스럽게 낭만 없는 팩트가 꽂히자, 데이지가 물총 받은 다람쥐처럼 벙쪄버렸다.
"어… 어어?"
이게 아닌데?
입만 뻐끔거리는 땅꼬마의 모습은 가히 안쓰러웠다.
여전히 말주변이 눈물나게 약하다.
바람꽃은 쭈뼛거리는 데이지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너 진짜 바보였어? 얘를 어떡한담…."
"허."
고작 10살짜리가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한숨 쉬고 앉았다.
그 모습이 얼척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으윽."
한편, 우리 동네 꼬꼬마는 잔뜩 약이 오른 모양인지, 절찬 진동벨 모드였다.
하루에 두 번 패배하는 꼬마, 최약체 데이지 벨.
그래도 이번만큼은 질 수 없는 모양인지.
나름대로 반박하려는 듯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으, 나… 바보 아닌데…."
완전 설득력이 넘치는 명문이다.
그 대사 한마디로 웬만한 동네 바보 자리는 쉽게 꿰찰 수 있을 것 같다.
숨 죽여서 끅끅거리는 나를 뒤로 하고.
바람꽃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말했다.
"바보 아니면 모야? 그럼 너 어린애야? 10살이나 먹고도?"
"어, 어린애 아닌데…."
…아니, 10살이면 어린애 맞지.
곰돌이 인형에게 이름을 붙이고, 산타클로스가 엄빠인 걸 모를 나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팝콘 씹는 것도 까먹어버릴 지경이다.
그렇게 저세상 키즈 토크가 시작되었다.
"흥, 아니긴. 그러면 증명해봐. 오늘 밤에 혼자서 화장실 가보던가~"
"…가, 갈 수 있어!"
"내기하자. 못하면 내일 점심은 한 그릇만 먹기야!"
"히익! 그건."
"풉, 쫄리면 포기하던가."
"…!!"
어쩌다가 평균 나이 10살 짜리의 불법 내기 도박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말았다.
그것도 불쌍한 꼬꼬마만 손해보는 사기성 짙은 내기였다!
이걸 말려야하나 말아야하나….
"코, 콜! 나 안 쫄리거든."
그러나, 고민하기가 무섭게.
데이지가 알아서 본인만 손해보는 사기 내기를 승낙해버렸다.
스스로 함정에 뛰어드는 대범함이라니….
이게 용사의 자질인가?
다른 건 모르겠고, 우리 꼬꼬마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대로 건강하게만 자라면…
근시일내에 보이스 피싱의 희생자로 선정될 게 뻔하다.
마이너스가 찍힌 통장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데이지를 상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아무리 인생이 실전이라지만… 너무 지독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얘가 사기 당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알려줘야겠다.
그나저나.
'콜이니, 쫄리다니….'
얘들아... 그런 쌈박한 말의 원산지는 어디니?
누가 너네들한테 그런 입에 착착 감기는 말을 알려준거야?
"……흠."
유감.
답은 금방 나왔다.
'…나 밖에 더 있냐.'
옛말에 애들 앞에서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내가 무심코 뱉은 말들이 순진한 꼬맹이들의 입을 배려놓았다.
레베카가 알면 잔소리할테니 앞으로 주의해야겠다.
"좋아. 족제비가 증인이야. 넌 죽었어."
사기 내기를 성사시킨 댕댕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떡잎이 아주 샛노랗다.
"그리고, 땅콩아. 좀 비켜봐. 어휴, 왜 길 막고 있대."
바람꽃은 입구를 막고 있는 데이지를 향해 젖은 꼬리를 털었다.
빗방울이 튀자, 우리 동네 꼬꼬마는 화들짝 비명을 질렀다.
"힉, 차갓…!"
울상을 짓는 게 진또배기 모지리 같았다.
…이제 어디가서 얘가 용사라는 말은 엄두도 못 낼 것 같다.
나는 그게 썩 마음에 들어서 작게 웃었다.
"꺄, 하지마, 차가워. 털뭉치이! 떽! 저리가!"
"야! 털뭉치라고 부르지 말랬지!"
나는 삐약 꺄악거리는 두 꼬마를 보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근심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다.
티격태격 사이좋게 잘 논다.
마치 그 나이대의 아이처럼.
홀로 밤을 보내지 못하는 아이.
낯선 이를 마주하면 아닌 척 벌벌 떨어대는 아이.
데이지와 바람꽃.
우연찮게도 꽃의 이름을 따온 두 소녀는, 똑 닮았다.
둘 다 쉽사리 지워지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그 어린 심장에 깊이 새겨져 버렸다.
그런 두 아이가.
데이지와 바람꽃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느낀다.
그들이 생생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한 일이 헛된 일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이들이 티 없이 웃을 때마다.
나를 부르며 달려 올 때마다.
한참 작은 존재가 나를 보며 재잘거릴 때마다.
나는 내가 내린 선택을,
앞으로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는다.
그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한다.
이들에게 조금 더 나은 사람이고 싶다는 못난 이유.
내가 나아가는 데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던 중.
여우비는 짧게 내리고 그쳤다.
"흥, 여우네 결혼식이 끝났나보네."
그리 말하는 바람꽃은 여전히 샐쭉한 표정이지만, 복슬복슬한 꼬리는 살랑거리고 있었다.
의외로 '여우가 시집간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잠깐만, 그러고보니 여우도 개과 동물이다.
그러면 뭔가 통하는 게 있을 지도 모르겠군.
여우의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초청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여우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받는 아기 늑대를 상상해본다.
그런 개소리를 머릿속에서 해댈 때였다.
"피터. 이제 갈 거야?"
어느새 데이지는 제 자리를 떠나서 내 곁에 있었다.
비가 그치자마자 거짓말처럼 현관에서 물러난 모습이었다.
어쩌면 이제서야 제자리로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보라색 눈과 마주했다.
드물다 못해 난생 처음보는 신비로운 색감의 눈동자.
그러나, 이제 익숙해져서. 그저 눈이 참 땡그랗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겐 평범한 아이가 내 바지자락을 꼬나쥐며 웅얼거렸다.
"…오늘은 늦지마."
뭔가 근질근질하다.
어째 매번 늦는 집안의 몹쓸 가장이 출근하기 전의 한 장면 같다.
맨날 야근하느라 늦는 아빠가 미안해….
뭐, 실상은 남의 집에 가있는 식구를 데리러 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죄책감과 흐뭇함이 공존된 오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찍 올게."
"가서 아줌마랑 화해하고 와."
"아니… 안 싸웠다니까."
"아휴, 아라써. 힘내."
데이지가 그녀 답지도, 어린애 답지도 않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저... 애늙은이 같은 태도… 그거 누구한테 배운 거니?
게다가, 철 없는 어른을 보는 듯한 그 가느다란 눈은 대체 뭘까?
…이거 뭔가 그림이 더 요상해지네.
어째 내 꼴이 친정으로 가버린 와이프를 찾으러 가는 거 같잖아.
그것도 애한테 떠밀려서 가는, 한심한 남편 역할.
"크흠."
…켕기는 게 없는게 아니라서 더 열 받는다.
[남의 집 딸≥댕댕이>땅꼬마>천년 마망≥나]
시나브로, 먹이 피라미드의 최하위권이 되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의 권위는 땅에 추락했다.
여기 더 있다가는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
나는 서둘러 출근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참 다행이라고.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데이지가 그어놓은 원 안에 레베카라는 존재가 분명하게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안도했다.
요 맹랑한 꼬꼬마 녀석.
요리 못하는 골동품 마망은 질색하는 줄 알았거늘.
사실은 그게 코스프레였다는 게 밝혀졌다.
이 사실을 푼수 같은 용에게 알려준다면…
어쩌면 행복사로 승천하지 않을까?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어느새 내 출근길에 댕댕이까지 합세해서 배웅해 주고 앉았다.
뭔가 단란한 가정의 3종 세트 중 2가 모인 느낌이다.
어린 아이, 반려ㄱ... 아, 그건 아니고.
그냥 사이 좋은 이란성 쌍둥이로 생각하자.
한 아이는 어깨 위로 손을 휘휘 흔들고,
한 아이는 가슴 언저리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다녀와~"
"가던가 말던가. …마차 조심."
비를 맞으며 돌아왔을 때와 다르다.
떠나는 발걸음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이제 뭐가 뭔지 모를 기분은, 아마도 유쾌함이라고 생각된다.
선명한 무지개와 비가 개인 화창한 하늘 아래서.
"다녀올게."
나는 두 꼬마의 배웅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외면한 사람들과,
두 소녀를 닮은 소년을 향해서.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다정한 용을 데리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