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41화 (41/117)

〈 41화 〉 접점(3)

* * *

남의 집에 두고 온 용을 찾으러 가는 길은 멀고 험하지는 않았다.

그저 영혼이 이끄는 대로 걸으면 되었다. 마치 내가 그녀의 전용 GPS라도 된 것처럼. 나는 레베카가 어디있는 지를 알고 있었다.

그 기묘한 감각은 아무래도 드래곤과 맺은 맹약의 부가 기능인 듯했다.

'덕분에 길 잃을 걱정은 덜었다만….'

어쩐지, 고대의 맹약이란 놈이 위치 공유 커플앱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미묘했다.

그도 그럴게.

위치 추적이라니?

…그런 건 집착 쩌는 커플들이나 할 법한 짓거리잖아.

천년 전에 의처증 걸린 얀데레 드래곤이라도 있던 건가?

문득 맹약을 만든 개발자의 의도가 의심스러워졌다.

뭐, 조금 기분 나쁜 기능은 둘째 치면.

길 안내 하나 만큼은 현대 문물이 부럽지 않았다.

"성능은 확실하구만."

한번도 헤매는 일 없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후우."

한편, 나는 고즈넉한 저택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어젯밤 내가 도망치다시하며 떠난 곳.

달갑지 않은 현실을 맞닥뜨린 장소.

두드리 스펜서의 저택.

님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지난 밤의 기억을 지우고자 노력했다.

"하아."

그러나,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는 상념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야기에서 드러나지 않은 희생자의 비극과,

스스로 독약을 삼킨 남자의 최후와,

정의로운 여인이 홀로 지새운 밤….

감히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실망했을까?'

자꾸만 나도 모를 의미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한숨이 근심인지, 후회인지 모호하나ㅡ

­짝!

결코 체념만은 하지 않겠다고 되새겼다.

"정신 차리자."

비록 지금은 도망이나 치는 겁쟁이가 되었으나,

그런 내게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다.

[다녀와.]

거짓말쟁이는 되고 싶지 않다.

더이상 추락하고 싶지 않기에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때마침.

그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덜컥.

내가 다가가자마자 저택의 문이 열렸다.

"음?"

문을 열고 나온 백발이 성성한 남자가 나를 들여다봤다.

그는 족히 일흔에 가까워 보였고,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집사복을 입고 있었다.

왠지 노인의 이름은 세바스찬일 것 같았다.

'뭐지?'

나를 빤히 보는 영감님이 점점 불편해질 때 쯤.

저쪽에서 먼저 내게 정중한 태도로 목례했다.

"어서 오십시오, 피터 님."

"…?"

분명 초면인 영감님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네?"

세바스찬은 자신을 경계하는 내게 해답을 알리주려는 듯이 덧붙였다.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

.

.

"이쪽입니다."

나는 사탕도 주지 않는 노인을 쫄래쫄래 따라와버렸다.

꼬꼬마들도 하지 않을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뭐,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를 응접실까지 안내한 집사가 방을 나서며 말했다.

"피터 님, 주인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르신의 정중한 태도가 좀 민망했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최선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달칵.

약간 굽은 노인의 등이 방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는 방 안에 덩그러니 남은 채로, 그 너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주인님이라…."

노인의 신분을 알려주는 존칭, 그리고 수직 관계 임을 암시하는 언행.

집사에게 나를 데려오라는 묘한 명령을 내린 고용주가 있음은 자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게 누구냐는 추론은 할 것도 없이, 이 저택에서 주인이라고 부를 만한 자는 한 사람 뿐이었다.

원작에서는 그저 노예상이었으나,

그 실체는 황가의 끄나풀으로 드러난 남자.

'두드리 스펜서.'

어젯밤 독약을 마신 망자가 나를 찾고 있다.

"흐음."

물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이 세계의 장르가 판타지라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 죽은 자를 되살리는 부활 마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반드시 퇴장해야 한다.

그게 드래곤이든, 설령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명령한다는 행위는 오롯이 산 자의 영역이다.

고로 심장이 뛰지 않는 주검은 산 자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ㅡ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럼에도 죽은 자가 산 자를 찾는다면.

그건 필시ㅡ

'살아있는 사람의 장난질이지.'

나는 쓴웃음과 함께 지난밤 저택에 남았던 드래곤을 떠올렸다.

천년을 산 용은 폴리모프 마법과 시대를 풍미했다는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안정을 취해야할 다수의 환자들이 있다.

'능력이랑 동기는 충분.'

애시당초… '피터'를 찾는다는 시점에서 답이 나온다.

...이 세계에 나를 찾을 사람이 꼬마 아니면 레베카 밖에 더 있을까.

"…조금 겁나네."

뭐, 만에 하나 그녀가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만….

­똑똑.

그렇다고 하기엔.

방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너무나도 애틋했다.

**

잔잔한 호수는 마치 거울처럼 새하얀 건축물을 비춘다.

그 주변에는 계절을 잊은 듯이 가지각색의 꽃들이 즐비하게 피어있다.

봄을 그대로 옮겨담은 정원.

그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두 남녀가 찻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 중 태양을 닮았다고 칭송받는 청년이 소리도 없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과연, 이게 봄의 궁전인가."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는 감탄하는 듯했다.

그는 반대편에 앉은 소녀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무척 호화롭구나. 로자리아."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어쩐지 북풍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금색의 청년과 똑닮은 금빛을 띄는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초대한 기억은 없는데."

가시가 돋힌 말에, 청년을 눈을 지그시 감고서 대꾸했다.

"본인이 누이와 차를 마시는데 초대가 필요할까."

"호, 한가하게 차를 마실 시간이 있나봐요? 요즘 뒷골목을 전전하느라 바쁘신 줄 알았는데."

소녀는 입가를 가리며 이죽거렸다.

청년은 나른한 하품을 내쉬었다.

"내 아무리 다망해도, 누이에게 할애할 시간은 마련할 수 있지."

그의 말에, 소녀는 비릿한 미소를 띄운다.

"어쩜, 살갑기도 해라. 누가보면 오라버니께서 다정하신 줄 알겠어요."

다정하다라….

청년은 여인이 되어가는 누이를 물끄러미 본다.

마치 상품을 평가하듯무기질적인 황금색이었다.

이내 황금색은 초승달처럼 지었다.

"본인만큼 누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

소녀는 자신와 닮은 황금색을 노려보며, 곱씹듯이 찻잔을 물었다.

그럼에도, 작고 새하얀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편, 청년은 묵상하듯 눈을 감고서 차를 흠미한다.

그렇게 두 남녀는 한참동안 침묵하고서 미소를 가장했다.

둘의 태도는 사뭇 달랐으나, 멀리서 보기에는 일련 비슷해보였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찻잔이 싸늘하게 식어버릴 때 쯤.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단에 피어난 꽃을 보며 읊조렸다.

"이제 곧 겨울이구나."

그가 여상스럽게 찻잔을 거꾸로 기울인다.

그러자, 새하얀 꽃잎이 점점 붉게 물든다.

"꽃이 시들어 버리겠구나. 로자리아."

"……."

소녀는 표정 없이 청년을 지켜본다.

청년도 마찬가지로 표정 없이, 자신과 빼닮은 소녀에게 얼룩 진 손수건을 건넸다.

"그럼 꽃에 홀린 벌부터 죽어 나갈테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받아든 옅은 금색 눈동자가 부릅 뜨여졌다.

"너...."

"요즘 들어 날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놈들이니,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지 않느냐."

"너…!"

마침내, 작은 짐승이 으르렁거리자ㅡ

­바스락.

청년은 장미처럼 물게 물든 꽃을 즈려밟으며 웃었다.

"보아라. 거치적거리니 이리되지 않느냐."

청년의 발치를 바라보는 소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물들어 있었다.

"…당장 꺼져버려!"

"가끔 찾아오마."

로자리아는 떠나가는, 언젠가 태양이라 불리게 될 청년의 등을 노려본다.

그러다가 손수건을 쥐고,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폭군이 지나간 길 위에는 문드러진 꽃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

"좋은 시간 되십시오."

노년의 집사가 자리를 비키고.

넓은 방 안에는 후줄근한 청년과 피로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만이 남았다.

두 남자는 마주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의문과 격정이 담긴 눈빛으로 오래도록….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될만한 광경이었다.

"이제 괜찮은 거니?"

침묵을 깬 것은 중년의 사내였다.

그러나,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성스러운 말투가 청년에게 당황을 불러 일으켰다.

"…아! 네, 네."

그런 청년의 모습이 마냥 우스운 듯, 중년의 사내가 히죽거렸다.

"흐응."

'맙소사.'

그건 썩 보기좋은 미소가 아니었기에, 피터의 눈이 감겨버렸다.

어째 보아선 안될 것을 보게 된 기분이었다.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걸까….'

하긴… 우리 눈나가 마약쟁이처럼 생긴 아저씨일 리 없지.

이번에 눈을 뜨면, 언젠가의 어여쁜 장미 같은 여인이 있으리라.

나는 각오를 다지고, 다시 눈을 떠본다.

"잠을 못 잔 거니?"

"……아뇨."

제길.

여전히 히죽히죽 웃는, 인상 나쁜 아저씨가 눈 앞에 있다.

'뭐야… 우리 눈나 돌려줘요.'

순간,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그 탓에 준비해왔던 말들을 모두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역시 털이 북슬북슬하고, 다크서클이 짙은 아저씨가 조신하게 다리를 모은 모습은 안구에 해롭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보게 되니, 무척 충격적이었다.

이러다가 중년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에 생길 것 같다….

"흠, 열은 없는데."

두드리 스펜서. 아니, 그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레베카가 내게 이마를 댔다.

"…쿨럭, 쿨럭!"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고, 사래가 들릴 정도였다.

황급히 물러난 나는 번뜩이는 아재의 붉은 눈을 볼 수 있었다.

뭔가 기괴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서릿발 같은 여인의 한을 감지했다.

'살… 살려줘!'

천년 묵은 드래곤의 복수란… 가히 음습하고 공포스러웠다.

.

.

.

나는 만화 속 신룡… 아니, 그저 지렁이처럼 맨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두 구슬의 요정이 어떤 소원이든 이뤄드리겠습니다."

"음, 그걸로 콜 하마."

악룡이나 다름없었던 레베카는 소원권을 제물로 받치고 나서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짜란~

비로소 역한 아저씨가, 마법소녀 마냥 절세의 여신님으로 탈바꿈하는 기적을 목도할 수 있었다.

나는 성은이 망극해서 여신 님께 두어번 절을 올렸다.

"눈나 최고…!"

'못된 할망구….'

그 속내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다시 맞이한 레베카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그런데.

­두근, 두근.

고작 하룻밤 사이에 말도 안 되는 미모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 모양인지… 나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거렸다.

'에이씨, 어느쪽이든 해롭잖아.'

못난 남자가 놀란 심장을 수습할 때ㅡ

"…그래도 일찍 와주었으니, 용서해주마."

레베카가 내 어깨에 기대어 속삭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무척 간지러웠다.

이윽고, 길고 가느다란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대가 마음 고생 했구나."

"……."

다정한 손길과 목소리에, 마치 어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와 레베카는 서로의 체온과 감정을 느끼며, 하룻밤 짜리 안부를 물었다.

"크크, 글쎄, 데이지가 레베카랑 화해하고 오라고 성화였어요."

"세상에!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싶다고 서럽게 울었다고!? 가엾지만… 이제야 나의 시대가 오는건가."

"…그건 아닌데."

"흐응! 질투하는 모습이 추하구나. 잠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니?! 일어나거라! 당장 달래러…."

"아니, 진정하라고…."

비록 잠깐의 불행과 마주했으나,

우리는 아무 일도 겪지 못한 것처럼. 때론 웃고, 다투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나처럼.

.

.

.

꼬맹이들을 두고 온 덕분인지.

오랜만에 주위의 방해를 받지 않고, 레베카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기세라면 밤새도록 수다를 떨 자신도 있었지만ㅡ

­오늘은 늦지마!

오늘마저 늦게 들어간다면…

쌍심지를 켠 꼬마에게 잔뜩 혼이 날 게 불 보듯 뻔했다.

만일 데이지의 입에서 '피터, 미워.'라는 말이라도 나오는 날엔….

'부서질 거야….'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음."

그러나, 막상 본론을 꺼내려니 입안이 깔끄러웠다.

"제법 안정되었단다. 한 번 만나보겠니?"

그런 나를 대신해서 레베카가 먼저 말문을 터주었다.

용 마망의 배려심이 기꺼웠으나….

어째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애기가 된 기분이었다.

'응애….'

한편, 머릿속으로 레베카가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주어에 대해서 생각한다.

베일 뒤에 가려져 있던 피해자들.

빛을 잃은 눈동자.

지독한 고름과 쇠보다 역한 피 냄새.

...그건 하루만에 나아질 종류의 상처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과 내게.

적어도, 내가 그들을 마주보고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역시 내가 존나게 나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입안의 씁쓸한 맛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응… 애니요."

"??"

"아, 아직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래."

레베카가 이해한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이 조금 괴로웠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레베카,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없어요."

더이상 마법으로 두드리 스펜서를 연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놈이 단순한 노예상이 아닌, 황태자의 끄나풀로 밝혀진 이상…. 들키는 건 시간 문제나 다름없다.

지금도 성가신 황태자의 그림자가 접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놈은 여러모로 끈질기고 악랄한 새끼였다. 웬만하면 놈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다른 곳으로 데려가야해요."

묵직한 내 말에, 레베카는 그늘이 진 얼굴을 되물었다.

"대체 어디로…."

무려 20명 남짓한 수인들. 그것도 대부분 치료가 필요한 환자.

그만한 사람들을 둘만한 장소가 필요하다.

조건은 인적이 드물다 못해 올 리 없고, 규모가 넓으며, 숨어 살기 좋은 곳.

그것도 번화한 수도 내에서.

얼핏보면, 까다롭다 못해 불가능한 조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쩝."

나는 딱 한 군데 그럴만한 장소를 알고 있다.

다소 꺼림칙한 곳이지만, 그래도 이만한 곳은 없을 것 같다만….

'정녕 이게 최선인가.'

역시 조금 꺼림칙하단 말이지.

"그대여…."

갑자기 내가 입을 다물자, 레베카가 끙끙 앓는 강아지처럼 나를 쳐다봤다.

…어쩔 수 없지.

"레베카."

약간 포기한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오호."

그것만으로, 레베카가 '그것 참 묘수구나.' 하며 살포시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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