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접점(4)
* * *
겨울이 가까운 계절.
해가 부쩍 짧아져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온세상이 주홍빛을 띄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홀가분했으나 동시에 조금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미련이 남은 내 등을 밀어주듯이, 한 폭의 석양과 닮은 레베카가 말했다.
"먼저 가서 아이들에게 안부를 전해주렴."
별 것도 아닌 그녀의 말에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주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좀 그랬다.
"네."
나는 감정을 추스리고 단답했다.
그래야만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만 안녕.'
나는 레베카를 데리고 돌아간다는 조기의 목적은 이룰 수 없었다.
딱히 그녀와 다투거나 의견이 엇갈린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지랖 넓은 드래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다.
레베카는 자신이 벌인 일을 끝까지 책임을 지기를 원했다.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저야말로…."
대화를 나눈 끝에, 우리는 잠시간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레베카가 구출한 수인을 추스리고, 나중에 내가 애들을 데리고 그녀와 합류할 때까지만.
'걱정이 태산같네….'
든든하면서도, 가끔씩 푼수 같은 레베카랑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여러모로 불안하긴 했다.
'이 눈나가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했다.
"레베카. 집 정리는 확실히 해주세요. 그러니까, 나중에 애들이 놀라지 않게…."
"어허, 적당히 좀 하려무나. 이래봬도 살림살이는 이골이 났다고 하지 않았니? 나만 믿으렴."
레베카는 미드를 탕탕 두드리며 호언장담 했다.
자신만만한 모습에 더욱 불안해졌으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땅거미가 짙어지고.
헤어져야할 때를 직감한 나는 배웅을 나온 레베카에게 말했다.
"추우니까 어서 들어가요."
막상 혼자서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 때, 레베카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단다. 안 그래도 바람을 쐬고 싶었으니."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 한동안 못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만 들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그녀가 말갛게 웃었다.
나는 그 맑은 웃음소리에 어쩐지 민망해졌다. 석양이 붉어서 다행이다.
실컷 웃고 나서야 레베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마침 토끼 같은 그대에게 어울리는 게 있단다."
"…누가 토끼래요."
…뭔가 자존심이 상해서 괜히 그녀에게 툴툴거렸다.
내가 아무리 약해빠졌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나는 구시렁거리면서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런 내 손 위에 나보다 조금 작은 온기가 포개진다.
이윽고, 온기가 사라지자 손 안에는 작고 둥근 물체만 남았다.
동전만한 크기.
거기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만한 구멍이 뚫려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어서 밋밋해 보였으나,
이건 분명ㅡ
"반지네요?"
"크흠."
"레베카?"
"크흠, 크흠."
레베카는 자꾸만 헛기침을 했다.
노을 때문인지, 그녀가 평소보다 더 붉어보였다.
**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오후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귀가하는 게 늦어버렸다.
분명 사레가 들린 드래곤을 달래느라 시간을 지체한 탓이었다.
'어휴, 드래곤이 웬 사레?'
나는 그 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따금 왼손 검지에 자리잡은 붉은빛이 도는 반지를 본다.
역시나 드래곤이 준 선물치고는 평범해 보였다.
"뭐, 괜찮네."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여차하면 그녀에게ㅡ….
"야아! 족제비!"
전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내게로 오는 도도도 뛰어오는 작은 형상이 보였다.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짧은 다리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쩐지 시기감이 들었다.
'나참. 넘어지면 어쩌려고.'
평소에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애가 반가줘서 그런가….
뭔가 곤란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그건 그리움과 비슷했다.
언젠가 어린 여동생이 퇴근 후의 나를 마중 나와준 듯한, 그런 뭉클한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면 그 시절 혜은이는 참 착했는데.
'뭐… 이젠 아니지만.'
다시 오지 않는 추억을 그리워할 때ㅡ
"늦어! 늦어자나!"
어느새 지근거리에 도착한 바람꽃이 나를 올려다보며 아르릉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앙칼진 녀석… 뭔가 성깔 더러운 포메라니안 같다.
수틀리면 사람을 물 것 같은 기세다.
약간 쫄렸던 나는 궁상맞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어떤 할머니가 길을 잃으셔서…."
"됐어! 빨리 오기나 해. 나 배고프단 말이야."
갑자기 퇴근하고 돌아온 가장보다 그의 손에 들린 치킨을 반기는 자식새끼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눈물이 난다.
'아버지,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뼈저린 공감과 씁쓸한 배신감을 느끼며.
속으로, 두 번 다시는 파란머리가 난 짐승은 거두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시 빨강이랑 검은머리만….'
…음?
잠시만….
'뭔가, 뭔가 이상한데?'
나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리 찾아봐도 결정적인 마스터 피스가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돼."
그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고서 침음성을 흘렸다.
'검은머리가 난 우리 꼬꼬마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반겨줬을, 세상 아기자기한 데이지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
아니면.
세상이 멸망하려는 징조인가…?
"……."
일단, 침착하자.
그래도 큰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있지, 맛있는 거 먹자! 고기, 꼬기!"
일단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댕댕이.
그녀는 틱틱거리면서 평소보다 신이 나 보였다.
일단 데이지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태도다.
덕분에 한결 안심하고서, 무던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데이지는?"
"아. 맞다."
내 물음에, 바람꽃은 풍성한 꼬리를 느낌표처럼 세웠다.
개신기하다.
"으음."
바람꽃은 특유의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갑자기 내 옷자락을 쭉쭉 당기며 내게 자세를 낮출 것을 종용했다.
"왜?"
"쉿, 그냥 내려와 봐아."
어째 쪼그만 애들끼리 하는 짓이 비슷한 거 같아서 웃겼다.
햄버거 만들어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자."
일단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식으로 순순히 무릎을 구부려주었다.
그러자, 바람꽃은 작은손으로 내 귀를 감싸쥐고 속닥거렸다.
"땅콩이…."
과연, 얼마나 거창한 이야기일지 기대가ㅡ….
"걔, 이상한 사람한테 잡혀 있어."
……응?
"땅딸보한테! 글고 그 사람, 울 아빠보다 텁텁하고 퀘퀘한 냄새가 나!"
……??
뭐야….
이게 어디 나는 댕댕이 소리야?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모으며, 재잘거리는 바람꽃을 보았다.
여전히 입매가 툭 튀어 나와 심술꾸러기 같다.
'…장난치는 건가?'
그러나ㅡ
"그 사람이~ 절대로~ 주위에 알리지 말라고 했어."
"뭐…?"
속삭이는 아이의 태도는 나름대로 진지해 보였다.
적어도,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경비대에 신고하면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준대애~"
"……."
착각이라고 하기엔, 바람꽃의 전언은 점점 심각해지고 구체화되었다.
데이지가 누군가에게 잡혀 있다.
그 끔찍한 결론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백지가 된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뭐야,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너무 방심했다. 그 작은 애를 혼자 두어선 안됐다.
대체 어떻게 노출된 거지?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야? 누가, 어떤 새끼가….
두드리 스펜서의 저택에서 꼬리를 밟힌 건가. 내가 모르는 흔적을 남기기라도 한 건가. 설마 처음부터….
'씨발, 병신 같은 새끼.'
사무치는 자기혐오와 분노, 그리고 회환으로 이성이 마비된다.
허나, 짐승처럼 감정에 매몰될 수 없었다.
이대로 감정에 몸을 맡기는 건 포기나 진배없다.
내가 데리고 왔다. 아직 여리고 작은, 요즘은 자주 웃는, 언제나 나만 기다리는 아이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억지로. 억지로 이성을 붙들고, 사고를 쥐어짜낸다.
그리고, 깨닫는다.
'…잠깐만.'
데이지를 데리고 있다는 범인의 협박이 지리멸렬하다는 것을.
만약 놈의 목적이 데이지였다면….
목격자나 다름없는 바람꽃을 메신저로 사용하면서, 한낱 범골인 나를 협박할 이유가 있을까?
만일 내가 표적이라면 치더라도, 몰래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게 더 현명해보였다.
그리고.
땅콩이, 이상한 사람한테 잡혀 있어.
…처음부터 데이지가 잡혀 갔다고 말하지 않았다.
'설마….'
어질어질한 눈으로, 자뭇 심각한 얼굴로 재잘거리는 댕댕이를 본다.
"음,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족제비를 데려오라고, 그럼, 풀어 준다고 했었지이~"
…이제보니 뭔가 작위적인 톤과 과장되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 새… 끼, 지금 어딨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자, 바람꽃이 뜨끔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 저기… 요."
"……."
'너무 황당하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그게 내 꼴이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축 늘어져 있다가, 다시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어떤 씹새끼가 장난질이야.'
바람꽃이 가리킨 곳은 우리가 지내는 여관이었다.
**
쿵쾅거리며 들어간 여관.
꺄하하하.
크하하하.
웬 웃음소리가 현관 너머까지 들린다.
그 중 하나가 낯익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하아."
그 맑은 웃음소리에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은근히 열불이 올라왔다.
'…이게 업보인가.'
어쨌든 화를 주체할 수 없어서, 괜히 옆에 있던 댕댕이에게 돌려줬다.
깡!
"아야! 왜, 왜 때렷!"
난데없이 꿀밤을 얻어맞은 녀석이 정수리에 두손을 포개고서 항의했다.
제 딴에는 맞은 게 억울한 지 촉촉한 눈을 치켜뜨고 있다.
"너도 얄미워."
따지고 보면 니가 제일 악질이야.
나는 모른 체하며 고개를 홱 저었다.
감정이 잔뜩 실린 발걸음으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씨. 왜 저래."
바람꽃은 혼자서 씩씩거리다가, 쫄래쫄래 내 뒤를 따라온다.
심심해서 한대 더 쥐어박으려다가… 축 늘어진 북슬북슬한 귀를 보고 참았다.
.
.
.
"어른인데, 나보다 작아!"
어디선가 혀 짧은 어린애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출처는 식당이다.
더불어 그곳에는 고소한 빵냄새와 풍겨왔다. 어쩐지 더 괘씸해진다.
뒤이어 카랑카랑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 얼라가 누가 존만하다노! 내 맘만 무으면 이따시만하다! 야들아 함 해봐라."
시방, 어디서 들어본 경박한 사투리였다.
'아오.'
덕분에 이마를 탁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저 망할 난쟁이 새끼의 반쯤 벗겨진 마빡에.
식당 안에는, 스쿠르지 뺨치는 심술궂은 얼굴의 땅딸보 노인네가 어린 아이 앞에서 재롱을 떨고 있었다.
정확히는 노인의 대머리 위에 웬 놈의 생쥐들이 단체로 서커스를 한다.
특히나… 쥐 10마리가 피라미드를 만드는 모습이 지리게 신기하다.
짝짝!
공연이 끝나자, 턱시도 제리마냥 생쥐들이 허리숙이는 모습이 가히 초현실적이다.
"쥐돌이! 쥐돌이!"
"하모하모."
땅딸보가 흐뭇하게 웃고, 데이지가 찹찹 소리내어 박수치니까 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정신 나갈 거 같네. 저 노인네가 왜 여기있어?'
왐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근디 메꾸라지 같은 무스마 데리러 간 아는 와이리 늦노. 무글거 다 식구로. 허튼, 젊은 놈이 으른을 불렀으면…."
아.
'편지를 받은건가?'
아무래도 점심 때 심부름을 시킨 하인리히가 예상보다 빠릿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저 경상도 사투리 난쟁이가 성격이 존나게 급하거나.
일단 하나 확실한 것은,
"뭐, 뭐, 왜 그렇게 보는데…. 아아니, 저 사람이 시키는대로 하면 그리핀 고기를 준다고 해서… 그냥 맛이 궁금해서…."
순진한 댕댕이가 난쟁이 새끼에게 사주 받았음은 분명해 보였다.
'음흉한 놈이라고 하더니만….'
아무래도 저 노인네가 내게 억하심정이 품은 모양이었다.
이 사사로운 협잘질은 그 보복이고….
'죽일까?'
그러나, 노인공격하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했다.
결국 아쉬운 건 내 쪽이었으니.
"여어, 히사시부리."
나는 일단 여유로운 척하며 등장했다.
협상의 기본은 포커페이스니까.
그러자,
"오."
성격 나쁜 늙은 난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뒷세계 길드,
[해와 달]의 부랑자ㅡ
"메꾸라지~ 이쟈 왔나. 그랴, 선물은 어떠트노."
도플 로그.
그가 썩어 들어가는 내 얼굴을 보며 히죽히죽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