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43화 (43/117)

〈 43화 〉 접점(5)

* * *

"크크, 와 이리 죽상이고?"

늙은 난쟁이가 빵쪼가리를 씹으며 이죽거린다.

뭐랄까… 도발인 걸 알고 있는데도 겁나 빡친다.

"후우."

사나이가 값비싼 도발을 받아버렸다.

나도 뭔가 보답을 해주어야 인지상정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난쟁이에게 선사할 죽빵을 점검한다.

주먹의 모양, 크기, 단단함. 80년산 강냉이를 수확하기에 아주 적당해 보였다.

주먹을 꾹 말아쥐며, 어딘가의 천사 소녀처럼 기도한다.

'주님, 정의로운 치아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부디 이 세계에도 임플란트가 있기를 바란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평생 죽만 먹고 사는 건 서러울 테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 정의 구현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아무래도 어린이의 정서교육에 적합하지 못했으니까.

도플과 대치 중이던 때ㅡ

"아, 피터다!"

근처에서 삐약 소리가 났다.

쪼그만한 게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서 쪼르르 뛰어온다.

아장아장 잘도 뛰어와 내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한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폭.

효과는 굉장했다…!

여리고 뜨뜻미지근한 체온에 움켜쥔 주먹이 사르르 풀린다.

나는 홀린 것처럼 조그만 등을 토닥인다.

"히히."

그러자, 데이지가 나를 안은 채로 배시시 웃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맞닿은 복근이 조금 간지러웠다.

나를 반겨주는 작은 몸짓.

쌓여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거짓말처럼 씻겨내려간다.

"기다렸어…."

"나도…."

쑥스러운 듯한 속삭임에, 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어느샌가 헤픈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작은 머리통을 쓸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데이지는 무적이야.'

이렇게 착한 아이가 나를 골탕 먹이는데 협조했을 것 같지 않았다.

뉘집 되바라진 댕댕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특함에 울컥한다.

"헹, 꼴불견이야!"

흥, 은혜도 모르는 괘씸한 댕댕이는 빠져있어!

.

.

.

나와 데이지의 감동적인 재회는 불청객의 항의로 깨졌다.

"쯧, 눈꼴 시리구로."

늙은 난쟁이가 심히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손녀딸에게 외면받아서 심통 부리는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는 데이지를 토닥토닥하며, 씩씩거리는 도플에게 피식 웃어주었다.

'얼씨구?'

나와 눈이 마주친 난쟁이의 벗겨진 마빡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속이 뻥!

뚫렸으나, 동시에 뭔가 찜찜했다.

'저 영감탱이가 노망 났나?

마치 제 손녀딸을 금태양에게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도플 로그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입장이 바뀐 것 같다.

"풉."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나왔다.

나 참,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순진한 소녀를 유괴한 악당인 줄 알겠…….

'……어?'

…아무튼 간에….

저 음흉한 난쟁이에게서 데이지를 떼어놓아야할 것 우선일 것 같다.

저 늙은이와 어울려서 좋을 것도 없거니와, 아무래도 어린애를 상대로 몹쓸 짓을 한 놈이니까.

애당초 난쟁이 자식이 데이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수상쩍다. 노회한 난쟁이가 데이지에 대해서 뭔가 알아차린 걸까?

'…나중에 털어봐야겠어.'

레베카가 놈이 배신할 여지는 없다고 했지만, 세상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데이지는 몹쓸 놈이 꼬이는 체질이니까.

나는 매미처럼 달라붙은 데이지를 두고.

아까 일로 삐쳐있는 바람꽃에게 눈짓했다.

'얌마, 데이지랑 2층으로 올라가.'

'응?'

내 시선을 깨달은 바람꽃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삐쭉 튀어나온 머리털이 물음표처럼 휘어졌다.

겉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눈치 빠른 녀석은 곧 반짝거리는 파란눈을 치켜떴다.

'뭐 해줄 건데? 딜 해봐.'

되바라진 댕댕이 같으니.

영악하게 자기 거 알아서 챙기는 모습이 좀 대견하다만….

그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덤벼야지.

"쓰읍."

­흠칫!

내가 한껏 눈을 부라리자, 복슬복슬한 귀가 움찔거렸다.

어디서 깨갱거리는 효과음이 들린 것 같은데?

"……치."

바람꽃은 자존심이 팍 상한 표정으로, 내게 들러붙은 데이지를 떼어냈다.

"야, 땅콩.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

"왜에."

"아 몰라. 그냥 좀 따라와!.

"꺄하하. 피, 피터어~ 털뭉치가…!"

심기 사나운 바람꽃에게 겨드랑이를 제압당한 데이지가 꺄르륵거리며 끌려갔다.

큽, 나중에 싸우지 않도록 잘 달래줘야겠다.

한바탕의 촌극이 끝나고.

고요해진 식당에서, 도플이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마, 쟈들 터럭 하나 안 건드맀으니까 고마 좀 쳐다봐라. 내 얼굴에 빵구날라."

"……."

마음 같아선, 질 나쁜 장난을 친 대가를 치루게 해주고 싶었다.

…이 망할 난쟁이에게 용건만 없었으면 그랬을 거다. 그 정도로 기분이 더러운 경험이었다.

'참자, 참아. 어차피 없었던 일이야.'

뜨겁게 달아오른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심호흡하며 충동과 감정을 갈무리한다.

한편으로, 그 떄의 무력했던 기억을 뇌리에 새겨둔다.

이번 일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니까.

'어쩌면… 교훈인가.'

돈을 주고도 받을 수 없는 수업을 받아버렸다.

그러니… 그에 대한 수업료 정도는 치뤄야지.

나는 일부러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도플에게 말한다.

"영감님, 그간 한가하셨나 보네요. 일거리가 모자랐나봐요?"

­뚜둑.

툭 두드러진 핏대와 짙은 다크서클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해준다.

늙은 난쟁이가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라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

문득, 이 노인네를 업무과다로 혹사 시키는 게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도 보고, 정보까지. 그야말로 일석이조.'

영감탱이가 열 받아 승천하길 바라며 싱글벙글 웃는데ㅡ

울그락불그락해진 도플이 제법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쾅!

꾸깃꾸깃한 종이를 테이블 위에다가 새기듯이 놓았다.

그건 내가 낮에 하인리히에게 전해줬던 편지였다.

"이건?"

"흐흐흐."

과로 시달리더니, 정신이 나가버리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영감탱이가 실성한 것처럼 실실 쪼갰다. 업무 과다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가엾다.

근데, 지난 행실이 괘씸해서 봐주고 싶은 생각은 쥐뿔도 안 들었다.

노인네를 짠한 눈으로 굽어보는데ㅡ

갑자기 도플 로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 니랑 그 할망구랑 사단 났담서! 그런디, 니 뭘 믿고 까부노? 엉!"

"어?"

그의 대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와 레베카가 떨어진 걸 아는 듯했다.

'이 영감탱이가 그걸 어디서 주워 들은거지?'

괜히 드래곤이 기용한 정보 수집꾼이 아니었나 보다.

그의 기이한 정보력에 감탄과 경멸이 동시에 들었다. 뭔가 파파라치에게 찍힌 기분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지?'

좀 전의 낯간지러운 기억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걸 어떻게…."

"크크, 빌보드 배긴스… 아니, 본명은 피터라 캤나?"

…그 설정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노인네가 기억력도 좋다.

나는 도플 로그가 치매에 걸릴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아쉬워하며 대꾸했다.

"그래서 뭐요."

"크크, 말뽄새하곤. 니, 니는 나 도플 로그를 너무 무시했데이! 닌 이제 좆된기라. 탈탈 털릴 준비하그라."

뭐지? 무슨 자신감이야?

진짜 영감님이 과로로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한껏 의문을 담은 눈으로 늙은 난쟁이를 쳐다보는데.

­찍찍!

도플의 머리 위에 있는 제리들이 단체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존나게 징그럽다. 근데, 보다보니 나름대로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쥐들에게 시선을 강탈 당한 때ㅡ

도플 로그가 중간보스처럼 한껏 폼을 재며 말했다.

"크크크, 니는 그 할망구가 얼마나 독한 년인지 모를기다. 한 번 헌신짝맹키로 버려졌음 끝인기다! 끈 떨어진 메꾸라지 시끼야."

이 영감님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뭔가 어수선한 정보의 출처가 궁금 했으나ㅡ

"대체 어디서…."

"마! 자신 있나! 꼬우면 할망구한테 일러봐라! 크크."

…요 난쟁이가 자살을 희망해서 좀 난감했다.

요즘 자살물이 유행한다고 해서, 노인네까지 따라 하는 건 씹뇌절인데.

"누가…."

"마, 불알 떨리냐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쫄리나!"

"……."

나는 자신감 넘치는 쭈글쭈글한 얼굴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련한 중생을 보는 석가모니의 마음이 이러할까 싶다.

'에라이.'

그녀와의 첫 통화를 이렇게 써야하는게 아깝다만….

도플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왼손의 반지에다가 한숨을 불어넣으며 말한다.

"레베카 씨. 내려와서 이것 좀 조져봐유."

**

봄의 궁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꽃이 사라진 정원.

차가운 호수에 홀로 찾아와 발을 담근 소녀는.

잔잔한 거울 호수에 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온 목소리에, 가라앉은 마음이 잔물결치는 것을 느낀다.

­글쎄, 줄리가 태형 당했대!

­엑? 공주마마 쪽 사람 아니야? 걔 어쩌다가?

­절도. 그것도 황태자 저하의 물건을 몰래….

­아, 미쳤다! 미쳤어! 진짜야? 위험한 걸 뻔히 아는 애가 왜.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들리는 소문으론 저하를 독살하려다가…….

­설마! 그런 공주….

­쉿.

새장에 갇혀서 듣게 되는 끔찍한 대화.

귀를 막아도 들리는 목소리는, 축복이 아닌 저주와도 같았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을 느꼈다.

'저주 받은 피.'

자신이 가진 특별한 피가 저주스러웠다.

가능하다면 모두 흘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입술 위의 피가 메말라갈 때쯤 중얼거렸다.

"줄리."

그녀가 가장 아끼던 아이의 이름.

…괴물에게 짓밟힌, 그녀의 친구.

소녀는 검붉은 장미처럼 튄 자국 남은 손수건을 본다.

그 아이에게 처음으로 준 선물. 자신이 서툰 솜씨로 수를 놓았던….

"미안해."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은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

나는 거무죽죽한 늙은 난쟁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신수가 화나 보이시네."

도플은 희번뜩 눈을 뜨면서, 목소리만은 낮춘다.

"……뒤질라꼬."

한결 얌전해진 태도.

그리고 10년은 넘게 늙어버린 얼굴.

그는 곧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노쇠해보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게 깝치지 말지.'

도플의 소원대로 용 마망을 소환해줬더니… 그는 레베카 앞에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치 드래곤 앞에 놓인 생쥐처럼. 늙어서 서럽게 실컷 갈굼만 받았다.

­우둔했을지언정 얼간이는 아니었거늘. 이제 정녕 퇴물이 다 되었구나.

레베카의 말대로, 그는 왕년에 있었을지 모를 총기를 잃어버렸다.

자만에 빠져서 제 목숨을 알아서 깎아먹는 걸 보면 그랬다.

­쯧, 어쩔 수 없지. 이 몸이 몸소 네 놈이 세상에서 은퇴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저 나이에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게 용한 일인가?

새삼 도플이 다시 보이는구만. 하긴, 뒷세계의 골목대장 자리는 노름으로 딴 게 아니겠지.

나는 아까 반려당했던 편지를 도로 내밀며 말했다.

"이거, 아시죠? 부탁합니당."

"그딴 게 진짜 의뢰라고?!"

도플이 벌떡 일어나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키는 겁나 작은데 목청 하나는 더럽게 크다.

"안한다 이 십탱아! 적당히 까불어래이 뒈지기 싫으면."

"그래도 돼? 주인님한테 이른다."

­빠드득.

뭔가 발작 버튼이었나보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다.

조금 걱정된다. 살날이 그리 많지 않은 거 같은데… 혈압 올려서야 쓰나.

나는 이를 벅벅 가는 난쟁이에게 진정제 대신에 왼손의 반지를 보여준다.

그러자, 도플이 움찔하며 시든 콩나물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이 노인네한테 왜 이러는 거요. 이건 학대요, 노인 학대…!"

절박한 지 표준어를 제법 능숙하게 구사한다.

"에이 누가 보면 괴롭히는 줄 알겠네."

"……."

"나 참. 꼴랑 편지 하나 전해주면 되는 일인데, 뭐 그리 힘들다고 생색인지……. 알았어요. 수당 100퍼센트 올려줄게요. 이제 됐죠?"

무려 0에서 100퍼센트나 추가되었다고?

고용주의 배려심에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난쟁이의 왜소한 어꺠가 부르르 떨렸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아니었나보다.

"꼴, 꼴랑 편지 배송이라고오오!? 이 개새… 형씨,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어어!?"

형내미꼴...

와, 시바… 소름 돋네. 그 대사는 제발.

"아 몰라. 걍 내 배때기 갈라라 이 씹새야…."

도플 로그는 제리들과 함께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노인네의 근본 없는 떼쓰기에 지건이 마려웠지만… 한편으로, 그의 철없는 태도가 이해는 갔다.

'배송지가 좀 기피지역이니까.'

제국의 심장.

혹은 제국의 마경(??)이라고도 불리는 곳.

쿠팡맨이 가야할 장소는 다름 아닌 황궁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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