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조우(1)
* * *
"시벌… 보수도 없이 이딴 걸,,, 상도덕도 없는 새…."
늙은 난쟁이는 불에 타고 남은 재처럼 하얗게 보였다.
아무래도 장작, 아니 적절한 위로가 필요할 것 같다.
"자자, 영감님 포기하면 편해요.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이 개…."
인생의 진리를 알려주자, 감동받은 모양인지 부들부들 떨어댔다.
이윽고, 도플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단호한 태도로 팔짱을 꼈다.
"…후우, 치아라. 내 빙다리 핫바지 아이다. 무상으론 절대로 안된다. 차라리 쥑이라, 걍 곱게 뒈지련다."
"오호."
나는 단호박 그 자체인 도플을 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못한다고는 안하네?'
작중에서 난쟁이는 자존심이 강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작은 키로 무시 당하는 것을 질색한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지닌 재주를 낮추지 않고 인정받고자 했다.
난쟁이는 겸손하지 않다.
[무상으론 절대로 안 한다.]
결국, 그 말은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신 일을 시킬거면 그에 준하는 가치의 돈을 내놓으라고 거다.
아무래도 세상에서 가치를 정하는 척도가 되는 것은 돈이니까.
그러나ㅡ
'...돈이 없어.'
전직 화전민, 현직 무직(無?).
거지도 울고 갈 피터가 되어버린, 나는 끝내주는 가난뱅이였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3골드는 3년 뒤에 떡상하는 풀떼기에 올인했다.
그것도 레베카에게 빚까지 져가며….
그런 찐 빈털털이가 당장에 돈을 마련할 수단은 하나 뿐이다.
'…용돈(?money).'
이른바 드래곤 (어)머니…!
그것 뿐이다.
허나, 나는 안 그래도 레베카에게 빌붙어 사는 입장이다.그것도 애 하나 데리고.
그런데, 여기서 레베카의 등골을 더 빨아제낀다…?
'시바, 무슨 한량도 아니고.'
아무리 레베카가 돈이 썩어 넘쳐난다쳐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는 썩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나와 레베카의 태생적 스펙 차이가 궤를 달리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존나게 미련해보이지만,
'그래도 나는 남자니까…!'
사지 멀쩡한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언제까지 여인?에게 의지할 수 없는 노릇.
병신 같아도… 남자의 자존심이란 녀석이다.
다행스럽게도개털인 내게도 욕심 많은 난쟁이를 만족시킬 만한 게 있었다.
'빙의자로써의 지식.'
이것도 나름대로 치트키다.충분히 비벼볼 만하다.
"좋습니다! 값은 치뤄드리죠."
"금화 3ㅊ."
미친.
노인네의 그득그득한 욕심에 경악한 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어허. 그깟 돈보다 훨씬 귀한 정보를 드리죠."
"……정보?"
그 분야의 장인은 '감히 너 따위가?'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언젠가, 레베카가 '도플 로그'과 도플이 속한 '뒷세계 길드 [해와 달]'에 대해서 알려준 적이 있다.
우선 해와 달에 대해서.
부랑자, 주정뱅이, 작부, 약쟁이, 도박중독자 같은 사회의 찌그러기들이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만든 곳이란다.
말문이 막히는 어메이징한 구성원….
한마디로, [해와 달]은 제국에서 소외 또는 핍박 받아온 이들로 이루어진 길드였다.
걔네들의 목표는 갱생이 아니라 제국을 좀 먹는 거이니.
갈데까지 간 사람들의 길드답게 목적마저 환상적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 자신들을 버린 제국에 원망이라도 품은 게 아닐까 싶다.
'나한텐 잘된 일이지.'
그리고,
하수구에서 생쥐들과 숨어살던 네 놈을 거둔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수도에 숨어 살았다는 도플 로그.
그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는게 분명했다.
제국에서 차별 받는 수인과 달리 난쟁이가 하수도에 숨어 살아야할 이유가 없으니까.
'도플과 해와 달.'
나는 그들이 어느정도 제국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봤다.
'…만약에, 그렇다면.'
내가 그들에게 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정보를 준다면…?
…제법 쓸만한 그림이 그려진다.
설사, 그들이 제국에 대해서 별 원한이 없다고 해도 딱히 문제될 것도 없다.
내가 지닌 정보의 가치가 조금 떨어져서 아쉬울 뿐, 여전히 거래 재로로 쓰기엔 충분할테니까.
'일석이조, 일거양득.'
나는 속내를 숨긴 채로 말했다.
"전에 조사한 거 기억하세요?"
"뭐, 그 노예상?"
"걔 말고."
"제국 일등 신랑감?"
그건 또 뭐야?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도플이 말했다.
"형씨가 알아봐달라는 그 잘난 무스마 놈들… 황타자, 공작가 아덜내미, 마텁주, 썽기사인가? 암튼, 갸들 보고 제국 일등 신랑감이라 카더라."
"역시 재수 없는 놈들…."
"그쟈?"
처음으로 도플 로그과 마음이 맞는 것 같다. 기분은 썩 좋지 않다.
"근디, 그 무스마들이 와?"
F4인지, 일등 신랑감인지, 뭔지하는 재수 없는 4인방.
잘 생기고, 능력 좋고, 심지어 배경까지 빵빵한 엄친아 자식들.
그런 그들은 어떠한 공통 분모에 속한다.
바로.
이 세계의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라는 것…!
그 말은 즉슨ㅡ
'…씹어먹을 예비 성범죄자…!'
아니… 그들의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원작에서 남주라고 정해진 인물은 딱히 없다.
그저 등장인물의 인기와 비중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남주일 거라고 예상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4인방은 그 누구보다도 치명적인 남주였다.
출생의 비밀, 시한부, 혁명, 배신 등….
각자가 세계를 뒤흔들만한 어마어마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독자였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남주라 쓰고 핵폭탄이라고 읽어야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그 핵폭탄이 하나라도 터진다면...?
제국이 뒤집어지는 게 불 보듯 뻔하다.
하물며, 지금은 그 불씨를 키울만한 바람까지 불고 있다.
현재 제국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다.
마왕이 등장하고, 여신의 신탁이 있었으며, 북부 정벌로 인해 주변 국가로부터 견제가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ㅡ
'황위 교체가 한참이니까.'
황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그 의미는 가볍지 않다.
이는 '그 황제'가 살아있다는 의미다.
제 형의 황위를 찬탈하고, 전 황제 부부를 교수형 시킨….
그 '미친 황제'가 아직 팔팔하게 살아있다.
나라가 개판이 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란 거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ㅡ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 그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가장 위험한 비밀을 지닌 남자에 대해서 털어놓으려 한다.
그러니까.
'대충 알아들었지?'
잘난 남주들아.
**
그곳은 흡사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수백 수천의 뼈와 주검들이 정렬하게 놓여있다.
허나, 그들이 지닌 의미는 무덤 속 시체가 아니었다.
장대한 뼈로 이루어진 와이번.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를 듯한 녹색 피부의 거인.
아가리를 쩍 벌린 거무스레한 터럭의 네발 짐승….
종족도, 형체도, 크기도 모두 달랐으나.
하나같이 시간을 도려낸 것처럼 굳어있었다.
그들은 매미의 허물처럼 영혼이 비어버린 껍데기였다. 표본과 박제라는 이름의.
죽음을 장식한 박물관.
그곳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말했다.
"있는가, 히텐슈타인."
심장이 뛰고 있는 금발금안의 청년이었다.
황금을 닮았다고 칭송받는 자였다.
"부르셨습니까?"
이윽고, 시체들 사이에서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백발인 남자는 이곳의 장식품 중 하나 같았다.
금안의 청년은 백발의 사내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래, 불렀지. 몇번이고 호출했다. 헌데 '경'이 몹시 바쁘신 몸인 것 같아 이 몸이 몸소 '경'을 찾아왔지. 아, 혹시 '경'은 이번 일이 몇 번째인지 기억하지 못하는가?"
냉기가 흐르고, 명백히 가시 돋친 말이었으나 백발의 사내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한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포함해서 4번째이옵니다. 그나저나 저는 기사가 아니라 연구직입니다만?"
"…본인이 네 놈을 비꼰 것이라는 생각은 안해보았나?"
그러자, 태연자약한 얼굴이 허수아비처럼 끄덕거렸다.
"네, 안해봤습니다."
순간, 금안의 청년은 이 음습한 박물관에 목이 없는 연금술사를 장식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우. 앓으니 죽는 게 났겠군."
그는 간신히 살인 충동을 억누르고 움켜쥔 주먹을 풀었다.
"강녕하셔야죠. 제가 새로 발명한 기력 보충제라도."
히텐슈타인은 하얀 가운에서 거무튀튀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청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옥에 쳐박기 전에 집어 치워라. 황족을 독살하려는 게냐?"
"…오늘따라 공격적이십니다. 우유와 치즈를 자주 섭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년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눈두덩이를 누른다.
"이딴 게 대제국의 3대 귀족이라니…. 제국의 망조로다."
제국의 검, 히텐슈타인 공작가.
그곳에서 튀어나온 별종.
현자의 재림이라고 알려진 연금술사.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은 처음으로 웃는다.
"하하, 그건 조금 억울합니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망조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까?"
망조.
그 불길한 신탁.
"……."
번뜩이는 황금색 눈이 검가의 이단아를 노려봤다.
더이상의 입맞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
긴 침묵 끝에 청년이 입을 뗀다.
"결과나 보고하라."
히텐슈타인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곧장 말한다.
"예. 12개체 모두 고작 피 한방울로 마나를 깨우쳤습니다. 그야말로…."
마족보다 더한 괴물.
"…참 역겨운 재능입니다."
연금술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웠다.
한편, 청년은 히텐슈타인의 말을 곱씹는다.
'선대(??)가 그토록 두려워한 정체였는가.'
한 줌의 재로 남은 과거에서 꺼내온 미신과도 같은 일화들.
…그게 한없이 진실에 가깝다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고뇌하기 시작한다.
'만약, 정말 지탄받는 그들이 '그 일족'이라면….'
'허나,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상황은 시급. 고려해야하는 것은 영토, 군사력, 귀족, 명분, 신탁, 경제, 백성……. '
이윽고, 무미건조한 한숨과 함께 한 가지를 정립한다.
'언제나 최우선은 제국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히텐슈타인, 계획에 박차를 가하라. 수단은…."
그렇게 청년은 마지막 남은 믿음과 양심을 내쉬며 말한다.
"…가리지 않아도 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히텐슈타인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읊조린다.
"예, 적법한 임페리얼의 후예…."
존엄한 사자의 핏줄.
가장 위대한 국가의
황태자.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ㅡ
"전하의 뜻대로 이행하겠나이다."
신하 되는 자의 경건한 목소리에,
태양과 황금을 닮은 눈동자에는 짙은 그늘이 서린다.
"……."
백발의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고요한 미소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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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래된 난쟁이가 말한다.
요사스럽게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나쁘지 않다. 아니, 좋타. 아아아주 재밌을 끼다. 크크, 크크, 크…."
그는 쇳소리나는 목소리로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가만히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묘한 광기가 노출된 몸이 떨렸다.
세월에 마모된 난쟁이가 품어온 원한을 그정도로 지독했다.
"크크…."
한참을 웃어서,
쉬어버린 볼품 없는 목소리가 되었을 때ㅡ
노인은 붉게 충혈된 눈을 뜨며 말한다.
"제국에 피바람이 불겠구먼."
부랑자 도플 로그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