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조우(3)
* * *
사기꾼의 무릎이 저릿해지기 직전,
"…무얼하고 있는 거니?"
타이밍 좋게 레베카가 등장했다.
그녀는 볼품없는 자세의 나와 성난 표정의 두 꼬마를 번갈아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살았다. 오늘따라 레베카가 유달리 반가웠다. 속으로 그녀를 여신님이라고 찬양해보자.
평소에 레베카를 어려워하던 꼬맹이들도 이틀만에 보는 레베카를 반겼다.
"앗, 아줌마아!"
"레베카 님! 오랜만이야."
녀석들은 뽀로로 달려가더니 레베카의 발밑에서 재잘거렸다.
어쩐지 연재 한달만에 재회한 듯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헤실헤실.
레베카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무기도 아니고, 드래곤이 승천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킁."
행복에 겨운 드래곤 덕분에 애들 관심 밖으로 밀려난 피터….
그런 나는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무릎에 흙 묻었네….
"바람이 차구나. 어서 들어 가자꾸나. 깔끔하게 청소해놨단다."
"그치만…."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꼬맹이들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을 돌아본 레베카가 더 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양손을 내밀었다.
"정 걱정되면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렴."
저, 저… 아줌마가 은근슬쩍 사심 채우는 거 보소….
"응."
"네에."
스윗한 레베카의 대사를 들은 데이지와 바람꽃이 순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레베카는 가득찬 양손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웃다가….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나를 돌아봤다.
"훗."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것도 양손을 살짝 들어보이며.
'…뭐지, 이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은.'
나는 허전한 손을 쥐었다펴며 그들을 뒤따라갔다.
**
바깥은 꽤 으스스하더니, 저택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대신 주변이 너무 휑해서 그런 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세월이 느껴지는 건물은 수리해야할 곳이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레베카가 나무 바닥이 썩은 곳이 있다며 조심하라고 경고해주었다.
"정말 조용하네요."
겁을 집어먹었던 애들도 고즈넉하기만 한 저택에 조금씩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넓고 고풍스러운 저택이 신기한 지 이리저리 바쁘게 고갯짓하고 있었다.
"둘러봐도 된단다."
적극적인 바람꽃은 금세 적응했는지 혼자서도 곧잘 돌아다녔다.
그래도 애를 혼자 두면 위험하기도 하고, 얘한테 할 말이 있기도 해서 따라다녔다.
킁. 킁.
…얘가 진짜 댕댕이처럼 냄새 맡고 다니네.
바쁘게 돌아다니는 바람꽃을 보고 있으려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한창 저택 안을 탐험하던 중.
갑자기 바람꽃이 막혀있는 방문 앞에 멈춰서서 중얼거렸다.
"…이상해."
뭔가 눈치챈 기색이다.
"뭐가?"
"…냄새가 나."
"먼지 냄새? 땀냄새?"
"아아니. 킁, 아는 냄새… 킁킁."
나는 새삼스럽게 코를 훌쩍거리고 있는 바람꽃을 봤다.
그녀는 잠겨있는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긴장한 듯이 꼬리를 바짝 세운 채로.
'진짜 개코네.'
이 저택에는 레베카가 두드리 스펜서에게서 구출한 수인들이 숨어있다.
나는 그 장소가 어딘 지 모르겠지만. 바람꽃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방 너머에 무언가 있는 모양이다.
그 탓에 조금 곤란했다.
'낭패네.'
나는 아직 바람꽃에게는 그들의 소식을 알려주지 못했다.
이틀 동안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지.'
솔직히 말하자면, 진실을 알리는 것을 미뤄두고 있었다.
내 알량한 자기만족을 위해서.
"똑똑? 킁, 아무도 없나?"
나는 그동안 봐온 바람꽃이라는 소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녀는 가끔 틱틱거리고 짓궂은 면이 있으나. 사실은 누군가를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아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끔찍한 상처를 입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희생자였다.
그러나ㅡ
"키이잉… 으, 안 열려어…!"
언젠가 상처는 아물고, 새살이 돋아난다.
괴로운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족제비. 나 이거 열어줘! "
"어허, 맡겨놨나? '열어주세요' 해봐."
"응, 열어줘."
"아니, 열어주세요."
"열어줘열어줘열어줘……."
"무지성 떼쓰기 멈춰…! 알았어, 해볼게."
그렇기에ㅡ
나는.
이 아이가 그저 웃고 떠들며, 때때로 장난을 치다가 혼나고, 이따금 또래 친구와 티격태격하며 지내기를 바랐다.
그렇게 싫은 기억은 어느새 은근슬쩍 잊어버리고….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있기를 기원했다.
덜컥.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
지난 날.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내 입으로 내뱉었던 지리멸렬한 약속과…
[수인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시커먼 활자로 이루어진 글귀.
나는, 그 거지같은 것들이… 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웠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바람꽃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걱정과 친애가 담긴 앳된 얼굴로.
지난 기억이 그 위에 덧씌워진다.
뭐든, 뭐든 좋아… 그 새끼들… 반드시 죽여버릴거야….
상처입은 어린 짐승의 푸른 원한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나는 속으로 땅에 묻힌 채로 남겨진 역겨운 남자와 스스로 독약을 삼킨 비겁한 남자를 욕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구제할 도리 없는 버러지 새끼라고.
덜컥.
이 문 너머에ㅡ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흔적이 있다.
내 과오. 그리고, 이 아이의 트라우마를 당길 지도 모를 방아쇠가 저기에 있다.
이번에는… 저 때처럼 도망칠 수도, 미룰 수도 없다.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가.'
당연히 마주해야한다.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뱉고.
무거운 입을 달싹인다.
부디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라며.
**
"바람꽃."
그녀는 항상 실실 웃는 얼굴의 얄미운 남자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감상을 가진다.
뭔가 새롭게 보여서 빤히 들여다 봤다.
"네게 고백해야 할 게 있어."
웃음기가 없는 목소리에, 그녀는 꼬리를 조금 말며 움찔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긴장해버렸다.
왜 또? 화난 걸까? 아닌데… 왠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나한테 고백할 게 있다고?'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고. 일단은 그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속으로 이번에도 별 거 아닌 장난이겠지, 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흥. 근데 장난치는 거면 죽었어…!'
그의 고백은, 항상 잠들기 전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그 담백한 목소리에 담긴 내용은 평소처럼 흥미롭지도, 달갑지도 않았다.
.
.
"…그곳에서 데려온 고향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가 끝났을 때ㅡ
"미안하다."
바람꽃은 그에게 무어라고 말해야할 지 몰라서 잠깐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문득 항상 엄숙하던 아빠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떠올렸다.
[북부의 늑대는 원한도, 은혜도 잊지 않는다.]
알고 있어.
그의 말처럼, 잊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날의 끔찍한 일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새하얀 눈밭을 물들이는 핏자국과 서슬에 베인 동족의 비명을,
덜컹이는 철창 밖에서 들려온 이름 모를 인간들의 모멸과 멸시를,
하나 둘씩 눈사람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친구들의 체온을,
배 곯고 야위어가는 몸 위에 새겨졌던 지독한 고통을….
…오랜만에 끄집어 불러낸다.
"…끅."
내장이 썩어서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들을, 그런 끔찍한 인간들을
증오할 수 밖에 없다.
'…반드시 죽여버릴거야.'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녀는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분노해야만 했다.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것도, 그걸 숨기려고 한 것도 괘씸했으니까.
믿었는데…. 당신이 약속했잖아! 내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알려준다고… 그런데…!
울분과 미움을 가시처럼 내뱉어야만 했다.
그러나ㅡ
"…흐응."
바람꽃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엄마와 닮았다는 푸른눈으로 똑바로 뜬다.
거기에 우울하고 낯선 인상의 남자가 비쳤다.
'짜증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나 마음에 안 드냐면… 술주정 부리는 아빠가 엄마 얘기 들려줄 때처럼 울적한 얼굴이라서 속이 답답했다.
'땅콩이보다도 못한 미련한 멍청이.'
이제보니 그는 족제비가 아니라 덩치만 큰 뱁새였다.
…조금만 쓴소리해도 픽 죽어버릴 것 같잖아.
'킁, 착한 내가 봐준다.'
기민한 소녀는 당신을 미워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찾는다.
자신과 동족이 겪은 고통을 불러온 원인, 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어디에 있는 지를 생각한다.
"아…."
이윽고, 해야할 말이 '원망'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순서가 한참 잘못됐잖아….'
바람꽃은 이를 앙다물고 중얼거렸다.
넌, 진짜 멍청해…!
"바람꽃."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얼굴의 그가 살펴보고 있었다.
"미."
"하지마."
바람꽃. 그녀는 어렸다.
모르는 것도 배워야하는 것도 설원에 쌓인 눈처럼 많다.
하지만 어렸어도, 이럴 때 해야할 말은 따로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피, 피… 터."
오랜만?
아니,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본 것 같다. 뭔가 조금 어색했다.
"??"
피터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치, 그게 놀랄 일이야?
바람꽃은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말한다.
"고마워."
저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고마워요."
친구들을 구해줘서 고마워요.
"매일, 항상……."
같이 있어주고 돌봐줘서 고마워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워요.
아픈 거 고쳐줘서 고마워요.
떼를 써도 받아줘서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예쁜 꽃을 주셔서 고마워요.
또.
또….
뚝뚝, 그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낸다.
그것을 되뇌인다.
눈 앞의 우둔한 그대가ㅡ
그 의미를 똑똑히 깨닫게 될 때까지.
'당신을 만나서….'
내 말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될 때까지.
'…고마워.'
바람꽃은 되뇌었다.
**
나는 애들을 레베카에게 맡기고 저택을 나섰다.
거점을 옮기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흔적을 지워야했다.
슬슬 거사를 치룰 시간이 닥쳐오니, 일반인들과는 거리를 둬야한다. 자칫하면 서로에게 위험이 될 수 있으니까.
"에엑! 피터 씨가 떠난다니…! 갑자기?!"
이제 여관을 비운다고 전하니, 에이미가 많이 섭섭해 했다.
나도 그녀와 제법 친해져서 헤어지려니까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왜에! 우리 좋았잖아, 행복했잖아! …설, 설마!! 내가 질린 거야…? 피터 씨, 나 버려? 그 여자한테 가버린 거야? ……우리 끝인 거야? 너무해, 흑흑."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곤란한 대사를 지껄이긴 했어도 말이다.
"미친… 시작도 한 적 없잖아!! 저기요, 주인장? 그런거 아니니까 그거 내려놔요. 말로 하자고."
그동안 신세져온 그녀의 아버지. 여관 주인 아저씨가 '칫, 아깝다'하고 중얼거렸다.
…뭐가 아까운지 모르겠지만, 왠지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짐을 챙기고, 한달 가까이 머문 여관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동안 무탈하게 지낸 에이미 네 여관에 꾸벅 감사했다.
'남은 건 하인인가.'
마지막으로 심부름을 시키던 하인리히에게 전할 쪽지를 남겼다. 녹색 코인도 모을 만큼 모았고, 이 쯤에서 녀석과의 관계도 끝맺어야했다.
'이제 어느정도 살아갈 돈을 벌었겠지.'
하인리히는 영리한 녀석이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뭐라도 잘해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 충고를 잊지 않는다면… 3년 뒤에도 무사할 거고, 어쩌면 대성할지도 모른다.
'…그 전에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르니 나중에 에이미랑 하인리히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줘야겠다.
바람꽃이 부탁한 화분을 들고 일어나려고 할 때ㅡ
"쒸, 깜짝이야!"
찍찍.
웬 생쥐 한마리가 나타났다.
순간, 에이미 네 여관의 위생 상태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으나….
쥐선생의 목에 달린 예쁜 리본을 보며 안심했다.
'난쟁이 쪽인가.'
나는 예쁘게 단장한 제리에게 혐오감과 귀여움을 동시에 느끼며 중얼거렸다.
"일처리 뭐야… 준내 빠르네… 과연, 경상도 난쟁이…."
그 난쟁이의 고향이 경상도는 아닐 거 같긴 한데….
일단 사투리가 그러니까 그런걸로 치자.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고작 하루 만에 답변을 가져올 지 상상도 못했다.
도플이 내 예상보다도 능력이 더 뛰어났나?
배송지에서 문제가 있던 걸까?
아니면 함정…?
'모르겠군.'
풀리지 않는 고민은 그만두고.
생쥐의 목에 달린 매듭을 풀었다.
고급스러운 천이다.
짧고 간단명료한 메시지가 눈에 밟혔다.
"오호."
장소와 날짜, 그리고 시간만 적혀 있었다.
그것도 이틀 뒤?
'…무슨 번갯불에 콩 굽는 것도 아니고.'
유려하지만 휘갈겨 쓴 글씨체가 그 인물의 심리를 알려준다.
아무래도 내 편지를 받으신 분이 몸이 엄청 달아오른 듯했다.
'하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니까.'
물론 함정일 수 있다는 가정을 지울 수 없다.
"나 혼자는 못 가겠네."
나는 천을 고이 접어 넣었다.
새로운 퍼즐 조각을 주울 준비를 해야겠다.
*
볼일을 마치고 저택에 돌아왔다.
나는 다 제쳐두고 레베카부터 만났다.
그녀에게 전해야할 말이 있었다.
"레베카, 이틀 뒤에 외출해요."
"좋지. 오랜만에 다같이……."
그녀는 거절하는 일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단 둘이서."
"아… 어어?"
레베카가 잠깐 멍한 표정으로 눈을 여러번 깜빡였다.
이윽고,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혹, 혹시?"
나는 레베카의 기대어린 홍옥을 보며,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과연, 현명한 용이다.
고작 몇 마디만으로 내 말에 담긴 무게를 읽어낸 듯했다.
"데, 데데뎃…."
…레후?
나는 감격한 듯… 말문이 막혀있는 레베카를 위해서 뜸들이지 않기로 했다.
드디어 그녀의 딸을 구할 마지막 조각을 찾았다고.
그 기쁜 소식을 공유한다.
"같이 보러가요."
"으응…. 근데, 무엇을…?"
봄의 궁전에 유폐된 황족.
이야기 속에서 친오빠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는,
로제, 짐은 후환은 남기지 않는다.
네, 오라버니. 영겁토록 저주하겠습니다.
……비운의 공주.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
"…??"
제국 황위 계승권 서열 2위.
"제 1 황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