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48화 (48/117)

〈 48화 〉 조우(5)

* * *

"…그게 무슨 망발이죠?"

황녀 로자리아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뜬 것 외에는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다소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으나, 불경죄를 운운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로 소란 피울 순 없어.'

본디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은 자존심이 드높을만한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다.

다른 것도 아닌 무려 제국의 1황녀이니까.

그러나, 황족에 대한 세간의 인상과 달리…

'그깟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니까.'

1황녀 로자리아는 권위적이지도 폭급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스스로가 굉장히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천지에 드레스나 파는 황녀가 어딨어?'

하지만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던 것이었고, 유일하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로자리아는 새삼스레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곱게 자란 온실 속의 화초.]

그녀는 그 말이 지독하게 싫었다.

그런 말을 지껄인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의 인생은 곱게 자란 온실의 화초와는 거리가 멀었다.

온실.

황실이라는 이름의 마굴.

차라리 온실에 갇힌 채로 지독한 태양열에 시들어가는 장미에 가까웠다.

­제국에 떠오르는 태양은 한 개다.

그곳에서 태어난 마물들은 스스로가 태양이 되고자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형제들 가운데 오직 로자리아만은 그 빛을 감히 올려다 보지 않았다.

'괴물….'

가장 찬란한 빛이 모든 것을 불태우리란 걸 직감했기에.

그 대신 어린 소녀는 태양에게 자비를 구걸했다.

­폐하, 황후께서 약조하신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자신의 형제들은 모조리 불타 죽었음에도… 그녀만은 살아남았다.

그러나ㅡ

­허나, 성년이 되기 전까지다.

그 약속은 유한하다.

겨울이 시작되는 날.

그녀가 18번 째로 맞이하는 생일날….

그 때가 오면 약속의 시간이 끝이 난다.

하지만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 전,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제발. 그러니까, 시골에서 드레스나 만들면서 살아갈게요.

욕심만 내지 않으면,

저항하지 않으면…

­친애하는 누이. 지혜로운 로자리아. 작은 로제. 부디 기억해두거라.

이대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ㅡ

­현명한 왕은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

…그 찬란하고도 끔찍한 괴물은 예외를 두려하지 않았다.

저항의 포기는 최후를 유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많은 것들이 그녀의 곁을 떠나간 뒤였다.

'죽고 싶지 않아.'

로자리아는 주위에 남은 찌꺼기라도 모조리 받아들여야 했다.

그게 평민이든, 천민이든 간에…. 적어도 자신의 끔찍한 혈육만 아니면 뭐든 되었다.

그렇게 짧은 생을 연장하고자 발버둥쳤다.

그 결과,

"…이봐요! 그 개새끼가 좆될 혁명적인 비밀이 뭔데요? 그 새끼 동성애자라도 돼요?"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은 더이상 고상한 황족으로 남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딴 개소리라도 물고 늘어질 수 밖에….

그녀는 19번째의 봄, 그리고 그 이후의 봄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것을 소망했다.

.

.

"뭐냐고요. 그 새끼 고자예요? 아니면 사탄이랑 교접해서 튀어나온……."

…좋게 말하자면,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이라는 황녀님은 무척이나 소탈하다.

명색이 황녀나 되는 사람의 은밀하고도 유일한 취미가 드레스 샵을 운영하는 것이니 말 다했다.

'말투가 좀 거칠긴 하지만.'

그러나.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면,

소탈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영세(??)하다는 의미다.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세력이 약하다.

내일 당장 황궁에서 시체로 발견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황족.'

그리고, 로자리아 황녀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까지 봐온 로자리아 황녀의 행동은 대범하다 못해서 무모했다.

그녀는 우리를 황태자가 보낸 첩자 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황가에 악의를 가진 제 3의 집단이라는 전제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찾아왔다.

사실상 배째라는 식으로… 불리한 가정을 배제하고 있다.

그건 맨정신으로 할 게 못된다.

'어째서일까?'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 자가 번거롭게 굴지 않을 거라고 믿어서? 대수롭지 않다고 여거서? 어차피 죽을 목숨이기에 ,무엇이라도 해보기를 택했으니까?

그러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오직 로자리아 황녀, 그녀만이 알 것이다.

'자포자기인가, 아니면 최후의 발악인가.'

어쨌거나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이 그 누구보다도 생존에 절박한 사람이다.

원작에서 그랬듯이.

하물며 전개대로라면 그녀의 발버둥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결국 혈육에 손에 죽고 말았지만….

'진짜 노빠꾸 상남자….'

솔직히 말해서, 나는 로자리아 황녀의 거침없는 무지성 플레이가 감탄스러웠다.

그녀야말로 '뒤가 없는 사람은 용감하다'는 말의 화신이었으니까.

더군다나ㅡ

'적의 적은 아군이지.'

그녀 자체가 제국에 대해서 짙은 염증을 느끼고 있는 반골이기도 했다.

제 모국을 풍비박산낸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인재가 아니었다.

"개봉박두. 황태자의 은밀한 비밀…! 그런데 이 다음은 유료입니다만."

"혹시 불경죄라고 들어봤어요? 뭐, 결제할테니까 목 위에 달린 거 필요 없으면 어디 계속 지껄여봐요."

나는 지갑을 통째로 던지는, 가녀린 인상의 로자리아 황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미친년일세.'

평상시라면 상종도 하기 싫은 타입이지만….

미친 짓을 하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마치 든든한 국밥 같군.'

전방에서 버텨주는 든든한 어그로꾼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마침 로자리아 황녀는 거기에 딱 들어맞았다.

18살.

아름다운 외모, 위대한 제국의 유일한 공주.

더군다나 그녀는 미혼이다.

'이보다 군침이 싹 도는 신붓감은 없지.'

나는 지랄발광하는 로자리아 황녀에게 운을 띄웠다.

"염병할 개소리면 전부 알몸으로…."

"당신 오라버니가 왜 친족들을 다 죽이는 건지 궁금해본 적 없어요?"

"그건 그 새끼가 미친…."

"단순히 그렇게 생각해요? '후환을 두지 않는다'라는 개소리를 진짜로 믿어요? 영양가도 없는 황녀님을 죽여봤자 평판만 나빠질텐데."

"…말 좀 끊지 마시죠? 그리고, 영양가가 없다니…. 야, 너 지금 제 어딜 보고…."

'…맞잖아.'

일단 황태자는 미친놈이 맞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칠 수 밖에 없는 동기가 있다.

나는 투덜거리는 로자리아 황녀의 말을 끊고 말을 이었다.

"이미 황위는 넘어간거나 마찬가지인데… 왜 늙은 황제는 아직까지도 계승을 미뤄둘까요? 압도적인 1황자를 두고서. 황녀님의 결혼을 반대까지 하면서."

"…무얼 알고 있는거죠?"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 그녀는 결코 영리하다고 할 수 없다. 재능이 뛰어나지도, 야망이 있지도 않다.

다만, 직감 하나만은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녀 또한 비범한 존재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방증이다.

가장 황족답지 않은 황족, 황족이기를 포기한 소녀.

그러나 아니러니하게도… 그녀야말로 가장 온전한 황족이다.

"줄리의 일은 유감입니다. 그녀는 운이 너무 좋았어요. 알면 안되는 것까지 알아버렸거든요."

"……닥치고 말하라고. 전부 엎어버리기 전에."

나는 로자리아의 분홍색 지갑을 열어본다. 크고 영롱한 보석이 가득했다.

이게 얼마쯤 되려나? 내 예상이지만, 금화 백 닢은 거뜬할 것 같다.

쩝. 나는 로자리아에게 지갑을 돌려주며 말한다.

"액수가 많이 부족하네요. 모자란 건 노동으로 채웁시다."

­쾅!

작은 짐승은 제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치고서ㅡ

"내가… 내가 누군 줄 알고도, 빌어먹을 여급 취급을…!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표독스러운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광기 어린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 또한 비범한 핏줄의 후손 임을 알려주었다.

"네놈, 보자보자 하니……."

"남부 총사령관 헬크스트 공작, 귀족파 소속 백작위 이상, 가토 왕국 외 7개 국, 프로이덴 연합국, 성광교국, 하만의 대부족……."

"……?"

부디 대사를 치는 동안에 딕션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거 외우느라 제법 고생했거든.

나는 사실상 대륙에서 이름을 알린 것들을 전부 불러제끼고.

그제서야 대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서쪽의 마왕까지 불러봅시다."

"뭣?"

당혹스러워 보이는 황금색이 제법 유쾌했다.

부디 그 자식의 눈도 이래야할텐데.

"밥상은 제가 차려드릴게요. 쟤네들 상대해주세요. 때마침 황녀님 성인식이잖아요? 거창하게 가봅시다. 만찬의 이름은… '미친 부자(?子)'의 은밀한 비밀로 갑시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임금은 선불로 알려드리죠. 그러니까 오픈 당일날은 웨이팅 없이 바쁘게 갑시다."

"대체…."

나는 헤지고 낡은 장부를 꺼내밀며 웃음을 띄웠다.

"그 개새끼들이 황녀님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요."

**

­쓱쓱.

바람이 불었다. 열어둔 창문을 타고서.

흑단으로 만들어진 책상에다가, 그리고 겹겹이 쌓아 올린 서류 위에 내려앉는다.

­뚝.

"……."

금안의 청년은 꺼림칙한 느낌에 쉬지 않을 것 같던 펜을 잠깐 멈춘다.

그러고는 빤히 흔들리는 종이로 이루어진 산을 노려본다.

다행히도 공든탑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종이로 이루어진 산은 건재했다.

청년은 안심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슬슬 정리할 때가 되었나? 얼마나 앉아있었지?

족히 14시간은 넘은 것 같다.

"지긋지긋하군."

아버지라는 작자가 떠맡긴 업무를 결재하느라 반나절이 지나갔다.

그건 익숙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반복되는 상황에 염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길을 막는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배제했다.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기에 순항만이 남았다.

이제부터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기나긴 인내를 끝내고 비로소 우화할 때다.

청년은 기분 전환 삼아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화분에 물을 준다. 새빨간 장미가 싱그럽게 젖어들어간다.

"옷을 만들고 싶다인가."

시답잖지만, 참으로 누이다운 소원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다. 겉모습만큼이나 앙큼한 속내가 사랑스러웠다.

허나, 그렇기에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옥, 똑….

어느덧 화분은 물에 잠기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뿌리부터 서서히 썩어들어 가리라.

그리고 짓밟아둔 화단의 가엾은 꽃처럼 거름이 될 것이다.

곧 시들어버릴 장미는 치워버린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기에.

청년은 집무실을 치우는 시종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남은 변수는 무엇인가.'

단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수족의 보고.

며칠이 지났으나, 아직까지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변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자체가 무척 드문 일이었으므로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재료를 공급해달라고 징징거리는 연금술사의 독촉도 성가셨고.

'사람을 보내야겠군.'

만일, 통제를 벗어났다면… 처분하는 수밖에.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은 조용히 군림을 준비한다.

**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두고.

의자에다가 방석을 2개나 쌓아둔 데이지가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피터가, 피터가…! 마녀한테 잡혀갔어…! 또 나만 빼고… 인사도 없이…."

"땅콩 너 시끄러워. 그만 좀 하지?"

꼬마의 분노를 맞이하는 것은 새침한 얼굴의 수인족 소녀 바람꽃이었다.

"어제 피… 족제비가 말했잖아. 아침 일찍 어른들끼리 볼 일이 있다고. 그러니까 잡혀간 게 아니라 '데이트'야. 알겠어?"

"……몰라, 치사해."

데이지가 포크를 꼬나쥐고 수프를 휘적거렸다.

좀처럼 공감해주지 않는 또래 친구에게 섭섭한 듯 보였다.

"어른은 원래 치사해. 그러게 누가 늦게 태어나래? 아가야 하래?"

"…털뭉치 미워. 진짜 싫어. 글구… 나, 아가야 아니야."

불을 부풀린 애기 같은 얼굴을 보며 바람꽃은 코웃음 쳤다.

"흥. 뭐래. 나도 너 짜증나거든? 그러니까 입 좀 다물고 밥이나 먹었으면 좋겠어."

"너, 너무해!"

바람꽃은 띵~! 하고 상처받은 듯한 데이지를 무시하고 수프를 떠먹었다.

식었지만 맛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평소보다 맛이 없는 것 같았다. 식어서 그런걸까?

데이지는 포크를 깨작거리면서 은글슬쩍 바람꽃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속으로 심한 말한 게 아닐까, 후회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조용해진 식탁 위에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세군데서 들렸다.

두 여자아이와,

검은 머리카락의 한 소년에 의해서.

'무, 무거워.'

소년은 정숙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하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는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로 두 소녀를 흘깃 보았다.

'으으….'

하나는 되게 조그맣고, 하나는 되게 당차다.

서로 상반되는 느낌이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귀, 귀엽다?'

…아니.

바로 여자아이는 어렵다는 것!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귀여운 여자애들과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해보았다.

그건 난감하고도 뭔가 조바심이 나는 체험이었다. 동시에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자리에 있어도 될까 두려우면서도… 솔직히 떠나기는 싫은, 무척 간지러운 느낌.

소년은 그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계기는 이틀 전의 일이다.

자꾸만 눈에 밟혔던 동족의 소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나 알지?"

"어, 어…."

처음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소년은 곤란함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반가움과 감동을 느꼈다. 마을을 떠돌 때. 유일하다시피 그에게 잘 대해준 소녀였기에.

이런 나에게도 안부를 물으려고 하는 걸까?

정말 좋은 애다. 역시 사랑받을 만하다.

'…그런데도 잡혀왔구나.'

문득, 소년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이 착한 여자아이만큼은 그런 괴로움을 겪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안녕하세요…."

"심심한데 우리랑 놀자."

아.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권유가 아니었네.

"네?"

"따라와."

그 때부터다.

바람꽃은 소년을 억지로 데리고 다녔다.

'땅콩'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인간 여자아이를 소개시켜 주고.

'족제비'라고 부르는 남자에게 맛있는 음식을 받아오며.

'은인'에게 같이 시달려가면서 과자를 얻어냈다.

소년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또래 아이랑 어울리는 법 몰라서.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잊어버려서.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는 게 처음이라서.

'…모르겠어.'

철창의 안이든, 밖이든

어디든 좋으니 그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울아빠가 깨작깨작 먹는 거 아니랬어, 이 멍충아!

"멍충이 아니야…! 피터가 나 똑똑하댔어."

"땅콩아, 그걸 믿니? 너가 그러니까 아직 애기지, 아휴."

"……그럼 어른은 어떻게 해?"

잔뜩 움츠린 데이지가 슬그머니 물어봤다.

바람꽃은 코웃음치며 대화에 끼지 못한 소년을 쳐다본다.

"쪼그만게 뭘 어떻게 해? 밥이나 먹으라니까. 얘, 그치?"

"네, 네?"

소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랐다.

이윽고, 자신을 비추는 맑은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에 잠깐 홀려버린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살짝 겁 먹은 듯한,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담긴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를 인지한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두 시선에는 어떠한 응어리도, 멸시도 담겨있지 않았다.

소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그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왜, 왜 어른이 되고 싶은데요?"

"…피터가, 나만 빼고 놀러가. 나 애 안할래…."

그렇구나. 아직 애구나.

소년은 말을 삼켰다. 그리고 무척 난감해졌다.

터무니 없이 어려운 숙제를 받아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텐데….'

그러나, 이 작은 여자아이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여자애가 몇 번이나 그렇게 타일렀으니까.

그러므로, 소년은 정공법을 포기해야했다.

대자연의 설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임기응변을 발휘할 때다.

그는 자신의 왼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마음이 큰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요? 예전에 진짜 어른은 그렇다고 들었어요."

예전에 숨어들었던 푸줏간의 주인 아저씨가 그런 말을 했다. 그가 호의를 베푼 덕분에 굶주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진짜 어른은 그런 게 아닐까?

""마음이?""

데이지와 바람꽃은, 소년을 따라서 자신들의 평평한 가슴에다가 톡 손을 얹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번뜩이는 생각을 말했다.

"은인처럼 마음이 넓은 사람요."

소년에게 있어서 가장 마음이 넓은 사람은, 바로 레베카였다.

""아!""

데이지와 바람꽃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꼬마는 레베카의 크고 푹신한 부분을 떠올리고 있었다.

만일 피터가 있었다면, '그거 아니야'하고 기겁했을 것이나….

유가슴럽게도, 그 식탁에는 피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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