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한적한 날
* * *
주사위는 건넸다.
다음을 기약하고 드레스 샵 '로즈베리'를 나섰다.
나는 레베카와 함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의 문을 닫기 직전에,
여기까지 배웅을 나온 금발머리의 여자를 보았다.
"……."
고민이 많아보인다.로자리아 황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다소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아마도 달갑지만은 않은 진실이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고뇌에 잠긴 앳된 얼굴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꼈다.
'이제 18살인가.'
현대로 치면 고등학생이다. 거기에 여동생보다 1살 어렸다.
…새삼스럽지만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어야하는 세상임을 실감한다.
'뭔가 병주고 약을 준 느낌이지만….'
앞으로 로자리아 황녀와는 같은 배를 타게 될 사이다.
거창하게 동료라고 할 것까진 아니어도 협력 관계로써 격려나 인사 정도는 해야할 것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멋진 드레스 기대할게요."
혹시 몰라서 간접적으로 말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알아 들었겠지.
"……."
그런 나를 올려다보던 황금색 눈동자.
이윽고, 로자리아 황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저기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럴 수 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ㅡ
"제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자꾸 밉상처럼 굴어요? 제가 만만해서 시비터는 거예요?"
로자리아가 굉장히 빠른 어투로 말했다.
"…예?"
"제가 만만하냐고요."
이게 뭔 시정잡배도 아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서 당황스러웠다.
기껏해봐야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내 태도를 물고 늘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하나?'
그건 질문이 아니라 투정 부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좋게 좋게 말로 할 수 있었잖아요. 왜 사람 신경줄 건드리고 그래요? 그쪽 그런 거 좋아해요?"
뭐랄까… 그동안 쌓인 게 펑하고 터져버린 느낌이었다.
일단 황녀의 히스테리를 애써 무시하며 한번 생각해본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로자리아를 둥가둥가하며 좋은 말로 구슬릴 수 있었다.
말이 통하는 상대이니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로자리아의 자존심과 역린을 건드려가며 대화를 주도했다.
솔직히 나다운 행동이라고 볼 수 없었고, 협상 상대에게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왜 그랬지?'
물론 믿는 구석이야 있었다. 로자리아 황녀가 제안을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하기에 모자란 감이 있었다.
"어쩌면…."
나는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점점 익숙해지고, 내가 알고 있는 원형에서 벗어나고 있는ㅡ
이 세계의 정체성을 되새기고자. 아직 변하지 않았을 그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기대한대로 로자리아 황녀는 내가 알던 그대로였다.
우매(??)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활자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
묘한 감상이 들었다.
괜히 겸연쩍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둘러댔다.
"…제가 황녀님 팬이라서?"
"팬……?"
로자리아 황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 모습은 종종 내 말을 되새김질하는 꼬꼬마가 생각나서 우스웠다.
**
……생각해볼게요.
로자리아 황녀는 내 말을 전적으로 수긍한 눈치는 아니었다.
허나, 역모에 가까운 모의를 거절하지 않은 것 자체가 수락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시간 문제로군.'
주변에 의지할 데가 없는 그녀이니만큼, 곧 넘어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흐흐흐…. 웹소설 속의 흑막들이 소리내어 웃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음모를 획책한다는 것은… 의외로 흥분되고 기분이 째지는 일이다.
"…팬…."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하던 레베카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다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네?"
"……그 황실의 계집이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할 것 같으냐?"
간격을 두고. 레베카가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황가의 일원인 로자리아가 그리 달갑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아아, 네. 그건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아요. 황족이긴 해도 믿을만한 사람이예요. 생각한 대로 사람이 괜찮더라고요. 크게 재지도 않고."
로자리아 황녀는 유폐된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 그럭저럭 순진하고 소탈했다.
누구를 뒷통수를 칠 성향도 아니었고, 또 그럴만한 깜냥도 없었다.
'완전 무늬만 황족….'
생각하면 할수록 로자리아 황녀의 포지션이 짠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잘 대해줘야겠다.
"으흠,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레베카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으나….
나는 그녀가 짙은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차.'
그제서야 깨달았다.
원흉의 핏줄을 눈앞에 두고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답답함,
그리고 매일같이 평온한 일상을 가장(??)하고, 잃어버린 자식을 향한 애정을 가슴 속에 가장(??)해온 심정을….
그렇게 레베카가 억눌러온 감정은 범람하기 직전이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하지.'
지나친 감정은 사람을 망가뜨리곤 한다.
내가 맡은 역할을 해야할 때였다.
나는 친애하는 그녀에게 위로가 될만한 말을 고르고 골라본다.
…그러나, 우둔한 머리에선 그다지 쓸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오빠, 나 요즘 스트레스 받으니까 단 거 사줘. 뭐? 왜긴, 여자는 먹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오랜만에 생각난 여동생의 말은 주옥같았다.
"……."
하지만 어이없게도… 지금 당장에 생각나는 게 그것뿐이었다.
뭐라도 해봐야지.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나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레베카에게 넌지시 말했다.
"레베카. 뭐라도 먹으러 갈까요?"
그러자, 그녀가 나를 살짝 흘겨보더니 뚱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구나. 다른 사람이랑 다녀오지 그러니?"
"아앗…."
레베카의 단호한 거절에 뭔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뭐랄까… 재차 권유하기에는 미움받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까지 든다.
싫다는 데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하나? 아니면, 최소한 삼고초려라도….
"후우우우…."
"쿨럭."
고민 중에 들려온 레베카의 기나긴 한숨소리에 숨통이 턱 막혔다.
만일, 이 상태로 저택에 돌아갔다가는…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그동안 여동생으로 단련된 촉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울한 드래곤을 달래보기로 했다.
"정말로 먹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부디 같이 드셔주십사하는 은혜를…."
"나중에 아이들이랑 가는 게 어떠니. 아니면… 여관집 딸이나 황족 계집도 있구나…?"
"…제, 제가 레베카가 아니면 누구랑 다녀요!"
"흐응~ 그러니? 아쉽겠지만, 오늘은 혼자서라도 가려무나."
소중한 건 뒤늦게 깨닫는다더니….
내 부탁을 다 들어주던 상냥한 마망이 그리워졌다. 제발 돌아와….
"저 혼자서 밥 못 먹는데… 그리고 레베카랑 먹고 싶은데…."
나는 데이지의 말투를 파쿠리까지 해가며 질척거려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노력은 빛을 발했다.
"나참~ 꼭 내가 있어야 한다니~ 그것 참 어쩔 수 없구나."
결국 레베카는 못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살짝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는 우울감이 다소 옅어져 있었다.
"후후, 그대는 아직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구나."
응애….
…떼쓰기로 한번으로 슬퍼하는 그녀가 웃는다면 저렴한 거라고 합리화하기로 했다.
**
점심 무렵.
저택으로 돌아왔다.
"피터어어…!"
데이지가 소독차를 쫓는 동네 아이처럼 마차를 졸졸 따라왔다.
나참. 넘어지면 위험하니까 뛰지말라고 했는데.
보고 있으려니 조마조마해서 마차를 정차하고 내리자,
볼이 보기좋게 발그레한 데이지가 보였다.
"다녀왔어? 어디갔었어?"
"푸흐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주는 아이의 재잘거림에 큭큭 웃고 말았다.
데이지도 나를 따라서 덩달아 헤실헤실 웃더니….
갑자기 앗, 하고 소리를 내고는 어울리지 않게 미간을 모았다. 그건 뭐랄까… 굉장히 화가 난 뱁새만큼이나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이럴수가, 오목눈이 뺨치게 위협적이군….'
어째서 우리 꼬꼬마가 심통이 난 걸까?
얄미운 댕댕이한테 놀림이라도 받았나?
나는 살 떨리는 긴장감을 느끼며, 힘들어 보이는 미간을 살짝 펴주었다.
"키킥, 주름 생겨."
"…두고 갔어."
미간을 문지르니, 눈꺼풀이 감겨버린 데이지가 입술을 댓발 내밀며 웅얼거렸다.
"응? 언제요?"
"아침에 두고 갔어. 나 몰래 나갔어…."
뭐가 그리도 서러운 지… 꼬옥 말아쥔 치마자락이 꾸깃꾸깃해졌다.
뭔가 갑자기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 나름대로 변명해본다.
"어제 말했으니까 몰래는 아니지 않나?"
"……."
데이지는 벌써부터 말이 궁한 지 입을 앙다물었다.
요 꼬맹이…. 침묵하면 편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깨우쳐버렸다. 정정당당하지 못하다.
"이제 다 끝났니?"
한편, 우리를 관전하고 있던 레베카가 마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데이지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새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를 향했다.
"와아……."
그러자, 조개처럼 앙다문 입이 쩍 벌어졌다.
데이지는 반짝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넋이 나간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홀린 것처럼 레베카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정확히는 레베카가 입고 있는 순백의 드레스를 향해서.
'의외네?'
나는 데이지의 반응이 조금 신기했다.
평소 먹을 거 아니면 소드마스터에나 관심을 가지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여자애 아니랄까봐 예쁜 드레스가 마음이 드는 눈치였다.
"흐흥."
레베카가 그런 데이지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아이의 동경이 담긴 시선이 퍽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데이지의 적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음에 입어보겠니?"
"……응."
멍한 표정의 데이지는 한참만에 작게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쑥스러운 듯이 내 허벅지에 빨개진 얼굴을 묻었다.
나와 레베카는 그 모습을 훔쳐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다음에는 나도 가면 안돼?"
앙증맞은 꼬꼬마는 은근슬쩍 꼽사리를 끼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자기주장하는 게 무척 드문 녀석인데… 아무래도 이번에 두고 간 게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용기를 낸 데이지에게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었으나ㅡ 한동안 비밀스럽게 외출해야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10살배기 애들을 데리고 갈만한 곳이 아닐 것이다.
'일단 로자리아 황녀도 황족이니까.'
적어도 데이지만큼은 수도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외출을 삼가야 한다.
뭐, 꼬꼬마만 외출금지하면 불공평하니 댕댕이는 덤으로….
"응, 안돼."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ㅡ
"……!!"
내 거절은 예상치 못했는지, 데이지는 도토리 뺏긴 다람쥐처럼 시무룩해졌다.
그러더니 명치에 두 손을 모으며 구슬프게 말했다.
"…나는 마음이 작아서 그래?"
"??"
얘가 뭐라고 하는 걸까?
...어쩐지 대답하면 안될 것 같아서 침묵하기로 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왔어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람꽃이 말했다.
허겁지겁 달려오던 또래 친구와 달리 점잖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살랑거리는 복슬복슬한 꼬리가 눈에 밟혔다.
문득 주워온 새끼고양이가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받은 감동이 생각났다.
뭐든지 사주고 싶은, 그런 벅찬 감정…!
나는 그걸 내색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크흠. 오다가 주었어."
"에엑? 지지 아니야?"
과연, 시크한 도시남자는 수요가 없는 세상이었다.
…게다가 나를 쓰레기처럼 보는 듯한 파란 눈동자가 좀 그랬다.
진짜 어른을 상대로도 가차없다.
조금 쫄려서 솔직하게 말했다. 레베카와 같이 간 케이크 가게의 포장이라고.
"농, 농담이야. 제대로 사온 거니까. 밥 먹고 나서 너희들끼리 먹어."
"응응~ 알았어!"
바람꽃은 환한 얼굴로 케이크를 번쩍 들고 쪼르르 뛰어간다.
다다다!
데이지도 어느샌가 바람꽃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우울한 꼬꼬마는 온데간데 없었다. 역시 단 게 진리인가보다.
"흠흠, 간식이 중요…."
뭘 메모하시는 겁니까?
레베카가 진지한 얼굴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