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51화 (51/117)

〈 51화 〉 조우(7)

* * *

어느덧 겨울에 접어들고 있는 황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형형색색의 장미꽃으로 치창한 여인들이 광장에 모여 맨발로 춤을 추었고.

가을 수확을 무사히 마친 다부진 사내들은 보리와 밀로 만든 맥주를 높이 들어올리며 기쁨의 함성을 내뱉는다.

거리를 떠도는 시인들은 이름 없는 용감한 기사와 위대한 사자의 후예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며.

소음 속에 묻혀버린 연인들의 달콤한 귓속말은 그 어느 밤보다 은밀하고 적나라했다.

부모의 잔소리를 피해 달아난 소년과 소녀들은 상기된 얼굴을 삼삼오오 모여다녔고.

아낙의 품에 안긴 갓난쟁이는 그 광경을 동그란 눈에 새기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늘은 축제의 날이다.

제국의 신민들은 그들의 공주님이 맞이하는 성년식을 축복하고자 했다.

"어어!?"

"웬 마차가…."

그러나, 그런 제국민들의 축제는 마차에 짓밟히고 만다.

­다그닥. 다그닥.

활짝 열린 성문 너머로.

각양각색의 국기와 문장이 새겨진 마차의 행렬이 끝도 없이 밀려든다.

그건 마치 강에서 바다로 돌아가는 물고기 떼처럼 무수했고, 또 요란한 소음을 동반했다.

곧이어 축제의 황도는 온갖 소리에 잠긴다.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마부의 신경질과 경비병의 묵직한 고함소리, 호위 기사들의 예민한 숨소리와 먼 여정으로 지친 귀족의 한숨,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는 젊은 청년들의 수다….

폭력적이기까지한 압도적인 질량이 향하는 곳은, 사시사철 빛이 내려앉는다는 제국의 황궁이었다.

**

전 대륙의 이목은 이제 갓 성인이 되는 여자를 향하고 있다.

9살의 어린 나이에 잠적해버린 가장 위대한 나라의 공주.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

그런 제국의 황녀가 9년만에 칩거를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에 감춰진 황녀의 존재는 세인(世人)들에겐 흥미로운 수수께끼와도 같았고.

임페리얼이라는 이름값은 전 대륙의 유력 인사들의 관심을 불러오는 데 충분했다.

더군다나.

어느 순간부터 전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묘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제국의 황녀가 배필을 찾는다.

­황녀가 보내온 초대장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오라.

그 소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대륙 제일 국가의 유일한 공주,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이 지상 최고의 신붓감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므로.

전 대륙이 황녀의 성년식을 빌미로 두 번 다시 없을 결혼 매물을 확인하러 오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 결과ㅡ

"언제까지 기다리게할 것이오! 가온의 하이만을 몰라보는게요?"

"쯧쯧, 제국도 옛날같지 않아. 나 때는 말이야. 이런 절차 없이…."

"황녀님! 당신의 루이가 찾아왔아…."

"들여보내주시오. 본인에게 황녀님의 초대장이 있소!"

"여기도 있습니다!"

"아악! 여기도……."

­웅성웅성.

제국의 수용 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인원이 찾아왔다.

"맙소사…."

설상가상으로 그들 대부분은 제 1황녀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을 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초대하지 않았으나 초대된 손님이었다.

그러나.

"…들이도록 하라."

가장 위대한 제국이기에… 실수에서든, 사고에서든 초대한 손님을 돌려보낸다는 불명예를 선택할 수 없었다.

결국 제국은 기념일의 주인공인 로자리아 황녀가 벌어들인 돌발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로인해 하인이며, 시녀며, 궁중백이며. 심지어 기사건, 마법사건… 그 지위고하, 직업을 막론하고 총동원되어 연회를 다시 준비해야했다.

"로자리아, 이 미친 년이…!"

거기에는 황제와 황태자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

제 아무리 제국이 위대하다고 하나, 대륙 전역에서 모여든 인원을 수용할만한 장소는 마땅치 않았다.

촉박하게 시간에 쫓긴 황제는 부득이하게 '태초의 궁'을 개방하기로 했다.

천년 전의 드래곤이 초대 황제에게 선물했다는 기념비적인 건축물.

'태초의 궁'이 외부에 공개된 것은 200여년만의 일이었다.

"……와."

그 역사적인 장소에 발을 들인 이들은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현신이 머물렀다는 터무니 없는 거대함, 그리고 위용은 가히 인세(人世)의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천년 전의 궁전은 현재와 비교해서도 낡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모두가 궁전에 감탄하기 바쁜 어수선한 가운데ㅡ

­……가온 왕국의 보스턴 드 하이먼 재무대신 입장하십니다.

시작부터 삐걱거렸던 연회가 드디어 개시되었다.

.

.

­콜록, 프로이덴 연합국의 일로이스 폰 아르페지오 2왕자 입장하십니다.

나는 목소리가 다 쉬어버린 중년 사내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대체 저게 뭐하는 짓거리인지….

저 쓸데없는 입장 멘트가 사람을 괴롭힌다는 걸 모르는 걸까?

"레베카. 저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호명해야 돼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와인색 드레스를 입고 와인을 물처럼 마시고 있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응? 아아, 딱히 그런 건 아니지. 저 하찮은 것들은 제 영향력을 과시하고 하려는 기를 쓰는 거란다."

"아하, 가오충이란 거군요."

가오, 그러니까 허세.

세상 어디를 가도 자존심을 부리는 사람은 꼭 있나보다.

하긴, 나와 레베카도 제국의 드높은 자존심 덕분에 무사히 연회장에 입장할 수 있었으니까.

"…가오?"

한편, 가오를 모르는 레베카는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나는 2층 난간에 기대서 연회장 아래를 쭉 둘러보았다.

'으, 스톰 뿌리면 대박인데.'

사람들이 벌레마냥 바글바글하다.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으려니 뭔가 우스워졌다.

아마 저들 중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어디 나라의 왕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작위 또는 명성을 가진 사람일텐데...그런 귀하신 분들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이 연회장에는 살면서 한 번 볼까말까한 유명인사들이 넘쳐났다.

'…여기서 사고라도 나면 볼만하겠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이게 중2병인가…?

한편, 나는 연회장에 감도는 어수선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눈치였다. 기싸움이라도 벌이는 모양새였다.

"이런 걸 보면 높은 사람도 그다지 편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글쎄…? 높은 쪽이 낮은 사람보다야 훨씬 편하지 않겠니? 그렇지?"

오…설득력이 있어.

역시 현명한 드래곤 마망이라고 해야하나?

그런데, 어째서일까…레베카의 말이 나중에 높은 자리에 앉으라는 완곡한 설득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게, 나 뭐해 먹고 살지…?'

문득, 고민이 들었으나….

지금은 장래나 설정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상아로 만들어진 입장문을 바라보았다.

여기 유명 인사로 가득 찬 연회장에서ㅡ 유독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성, 성광교국에서 오신, 크리스틴 벨 교황대리이십니다!

그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자애로운 미소가 인상적인 수녀복을 입은 여자였다.

"교황대리라면…?"

"성, 성녀 님?!"

뭐랄까… 마치 연예인들의 연예인이 나타난 것 같다.

점잖은 척하던 놈들이 정신을 못차리는 걸 보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분 탓인가?'

나는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하얀머리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저 위선적인 여자는 썩 유쾌한 인물이 아닌데도... 어째서인지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

이름 모를 사냥꾼이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오두막.

그곳은 오래된 가죽 냄새와 눅눅한 나무냄새가 났다.

사냥꾼이 오랫동안 비운 듯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화덕에 자리잡은 모닥불만은 은은하게 타올랐다.

주홍빛 온기가 오두막을 비춘다.

그 덕분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도 그나마 생기가 돌았다.

회색 모포에 감싸인 체구가 작은 여자는 메마른 입술을 떼었다.

"미안해요. 기사님… 콜록."

[…….]

가면을 쓴 남자는 대꾸 없이 모닥불에 장작을 채워넣었다.

여자는 무심한 사내를 바라보며 우울해 보이는 미소를 띄웠다.

"저 민폐죠? 콜록. 다들 저보고 그렇대요. 엄마랑 오빠한테도 그랬을까요? 하하... 콜록."

사내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머릿속으로 한번 회상해보았다.

그는 이 여자와 거의 한달간 오두막에서 지냈다.한달 전에 내리부은 차가운 비가 그들을 적셨기 때문이다.

허나, 진짜 문제는 자연이 아니었다.

남자는 태생적으로 튼튼하고, 특수한 가호로 병마에 걸릴 수 없을 몸이었으나…

다리가 불편한 여자는 여타의 몸마저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결국 여자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홀로 사경을 헤매야했다.

그것도 한달이란 제법 긴 시간 동안.

[…….]

남자는 여전히 침묵한 채로.

기나긴 병마를 이겨내고 병상에서 일어난 여자를 본다.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 창백한 피부, 홀쭉한 뺨과 갈라진 입술. 그리고 흔하디 흔한 갈색눈동자….

특별한 것이 하나 없는 평범한 마을 소녀다.

아니, 오히려 몸은 병들어 있고 다리마저도 불편하다. 심지어 그녀의 출신은 화전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데려왔고, 마침내 살려낸 첫 생명이었다.

[…….]

가면을 쓴 수도사는 언제나처럼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선을 실천하고 있는가.'

그는 병마로 죽어가는 여자를 살렸다. 그건 여신께서 말씀하신 선한 행위였다.

허나, 동시에… 그는 교단에서 부여한 임무를 저버렸다. 그건 아버지께서 말씀한 선에 반하는 행위였다.

(여신께 가치 있는 것을 살려라. 여신께 가치 있는 행위를 해라. 오로지 그것이 선이다)

문득 남자는 생각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울리던 근엄한 목소리가 옅어졌다고….

'여신의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인가….'

여신을 향한 신앙이 삶의 전부였던 그에게는 충격적인 말이다.

허나, 기이하게도. 남자는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한 휴식을 얻은 몸은 활력이 있었고, 묘하게 여유로워진 마음은 마치 안식을 얻은 것만 같았다.

"큼, 저 이제 다 나은 거 같아요… 기사님, 떠나셔도 괜찮아요."

가면을 쓴 수도사는 자신이 살려낸 작은 생명을 보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옅은 목소리는, 그녀가 병들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남자는 또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야했다.

두통이 사라진 맑은 머리로 고뇌한다.

'나는 잘못된 것인가.'

갈구하다보면 언젠가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애로운 여신께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려주시므로.

[……아니.]

허나, 남자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금만 더 고뇌할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 더 머물도록 하지.]

차가운 미성은 희미하게 모닥불의 온기가 배어 있었다.

**

나는 한적해진 때를 노려서 벽의 꽃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연회장에 입장하고 나서,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은 절규의 꽃이었다.

"실례합니다. 크리스틴 벨 수녀님.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

성녀라 불리우는 새하얀 머리의 여자는 그저 자애롭게 웃을 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못 들었나? 조금의 미동도 없는 미소가 좀 꺼림칙했지만 재차 말을 걸었다.

"저, 수녀님?"

"자네. 성녀님께선 묵언수행 중이라네. 감히 무례를 범하지 말도록."

갑자기 나타난 카이저 콧수염 남자가 내게 어깨를 콱 잡았다.

"악!"

아오, 이 씹새끼가… 그냥 말로 하지.

남의 어깨를 부수려고 작정했나.

남자가 해대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크리스틴 벨의 추종자처럼 보였다.

나는 무력하게 끌려가기 전에 준비해온 대사를 쳤다.

"복음 26장 35­36절에서, 어둠의 신이 '어리석은 자들이여! 너희들은 예언을 믿지 못하고, 결국 종말의 짐승을 맞이할 것이다. 내 누이가 언제까지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리라. 밝은 밤을 두려워하며 경계하라.' 말씀 하셨지요."

"……?"

크리스틴 벨의 눈빛이 바뀌었다. '필요없어요 안 사요'에서 '이 새끼 뭐지?'로….

나를 억압하는 남자도 미간을 찌푸리며, 어디 한 번 씨부려보라는 듯이 코웃음쳤다.

멍석이 깔렸으니 지껄여야할 때다.

"요즘 세간에 나도는 그와 비슷한 예언이 담긴 벽보에 대해서 아시나요? 붉은 보름이 뜨는 날, 죄악으로 이루어진 자리에 여신의 개가 나타나 죄인을 심판하리라."

크리스틴 벨은 '어… 미친 새끼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 예상한 것보다 심성이 착한 것 같다.

"무례하오! 감히 뒷골목에서 나도는 헛소문으로 성녀의 아름답고 고귀한 귀를 더럽히려고 하다니?!"

…니 말이 훨씬 더러운 거 같은데?

순간 남자의 인중에 죽빵을 갈기고 싶었지만 대충 참았다.

어그로나 끌려고 온 건 아니니까.

나는 같잖은 기사도에 취한 남자를 무시하고.

품 속에서 새하얀 가면을 꺼내서 크리스틴 벨에게 보여주었다.

"…!!"

그러자, 수녀의 무기질적인 푸른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가면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끈 깨물었다.

나는 '당신 뭐야?'하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보고 대꾸해주었다.

"가장 낮은 검께서 제게 수녀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꼭 예언을 기억하라 하시더군요."

"……."

"그는 무사하십니다. 다만, 아직 임무를 수행하는데 문제가 생겨서 제게 부탁하신 겁니다."

"…음."

크리스틴 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옅은 침음성을 흘렸다.

어쩐지 '이 새끼… 진짜인가? 아니 구라인가?' 하고 고민하는 듯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크리스틴 벨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으로 목적은 달성했다.

기억을 새겨놨으니 때가 되면 알아서 행동해 주리라.

"이제 좀 놓읍시다. 아저씨."

"…난 22살이오."

어쩌라고. 나는 콧수염 사내를 팍 떨쳐내며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그러자, 카이저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

.

드디어 연회식에 울리던 노래가 바뀌었다.

조금 무겁고 웅장한 느낌으로.

제 1 황녀의 성년식을 축하하는 자리에 올만한 사람은 전부 들어온 듯했다.

곧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는 마음을 풀고자, 떠날 준비를 하는 레베카에게 농담을 던졌다.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시겠습니다, 루비?"

"그렇겠구나. 그럼… 부디 기대하고 있어주시겠어요?"

레베카가 양손으로 치마자락을 잡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에 맞춰주고 싶었기에, 나도 한달 간 속성으로 배운 예를 취했다.

"후후, 나중에 보자꾸나."

레베카는 살포시 웃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커다란 함성에 정신을 차렸다.

­위대한 사자의 후예,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 황녀께서 입장하십니다! …동행은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 태자 전하이십니다!

과연, 주인공은 화려하게 등장하는 법인가.

나는 2층으로 이어지는 대계단에서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한 로자리아 황녀를 볼 수 있었다.

눈부신 조명 마법과 반짝이는 꽃잎이 화려하게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와아!"

성격은 몰라도 옷걸이만큼은 그럴싸한 사람이라서 그런 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맨날 볼품없는 안경이나 쓰던 사람이 화장하고 꾸미니 영 딴판이었다.

허나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뭔가 어색하고 뻣뻣해 보였다.

불편한 오라버니 때문인가? 아니, 어쩌면… 아빠에게 뺨이라도 맞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속으로는 내 욕하고 있으려나?'

미안하다만 어쩔 수 없지. 원래 도장은 남에게 빌려주는 게 아니다. 고로 그녀의 잘못이다.

"너무 아름다운 딸을 사랑해서 가둬두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황녀님을 위해서라면 내 영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소…!"

"오늘 비로소 깨달았소. 본인은 인생의 절반을 손해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아악! 태자 전하! 절 가지세요!"

주변에서 두 황족에 대해서 떠드는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은 요주인물인 황태자에게조차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어디냐.'

나는 알고 있다. 진짜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는 사실을.

­쿵!

북소리가 함께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진다.

사람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리둥절하며 웅성웅성거렸다.

'연출이 구리네.'

어둠 속에서 웬 한줄기 빛이 내려온다.

그 빛 아래에 누군가 서 있었다.

이윽고,

­위대한! 요한네스 황제 폐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얼씨구? 강림이라니….'

황제는 성광교랑 맞짱이라도 뜰 생각인가?

얼굴이 보이진 않아도 크리스틴 벨의 표정은 '저 새끼가 돌았나.' 쯤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ㅡ

"!!!!!!!!!"

성년식의 주인공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화려한 음악과 함성이 쏟아졌다.

그 압도적인 질량은 강제로 기를 꺾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딸의 생일보다는 자신의 권위인가.'

나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 속에서… 오히려 정적을 느끼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저기 화려한 남자와 단 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신하가 아니지만 마땅한 예를 보내기로 했다.

'만남을 고대했나이다.'

늙고 추한 괴물이여.

**

­……이로써 짐의 여식이 무사히 성년을 맞이한 것에 빛의 여신께 감사한다.

어느덧 황제에 의해서 개막식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여타의 훈화 말씀이 그렇듯 황제의 연설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지루하고 고리타분했다.

'…잠도 못자고.'

졸기라도 하면, 잦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교감 선생님의 훈화 말씀보다 악질적이다.

덧붙이자면 황족을 축복하는 연회는 3일 이상 열린다.

…즉, 지루해서 죽을 것 같은 훈화 말씀이 무려 2번이나 남았다는 소리였다.

'정신 나갈 거 같아.'

나 뿐만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들도 혼미한 얼굴이었다.

'나한테 고마워해라 자식들아.'

그래도 내일은 이 지루한 연설을 듣지 않아도 될 거다.

이번 연회는 첫날만 열리는 한정판이니까.

물론 축제를 개최하는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안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될 것이다.

­또각. 또각.

때마침 누군가가 황제가 서있는 단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림으로 그려낸 것처럼 반짝이는 금발머리를 가진 여인이었다.

"저기요."

언제 도착했는지 붉은 머리의 여자를 내 어깨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아, 왔어요? 일찍 왔네요."

"…뭘,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요! 빨리 나가기나 해요."

아무래도 슬슬 떠나야할 시간인가보다.

­폐하, 아니 아바마마… 소녀가 성년을 맞이하여 아바마마께 청하고 싶은 소원을 있사옵니다.

역시 끝까지 보고 가지 못하는 게 좀 아쉬웠다.

그러나, 떠나야할 때는 떠날 줄 알아야 오래 사는 법이다.

나는 미련이 남는 눈을 애써 떼어내고 연회장을 뒤로 했다.

**

돌아가는 마차 안.

"아… 뒤지겠어요…."

붉은 머리의 여자가 탈진한 듯 축 늘어져 있다.

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나름 재밌어보이던데."

"지랄하지마요."

너무하군.

그리고… 신선해!

내가 낄낄 웃자, 여자가 히스테리하게 말을 쏟아냈다.

"당신 때메 하마터면 오늘 죽는 줄 알았잖아요! 으으, 그 노인네가 그렇게 빡친 거 처음 봤어요. 개 무서웠어…."

"그래도 후련하지 않아요? 제대로 엿 먹여준 거잖아요."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당신들 대체 정체가 뭐예요? 이 모습도 그렇고….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너무 많이 알면 다칠텐데. 그래도 알려드려요?"

"…기껏 도망쳤는데 그럴 순 없죠."

"현명하신 말씀, 크크."

긴장이 풀린 탓인지 별 것도 아닌데도 웃음이 나왔다.

곧 마차 안에서 키킥거리는 웃음소리만 들렸다.

"이제 뭐라고 불리며 살고 싶어요? 그대로?"

"…이제 꽃은 지긋지긋해요."

나는 조용해진 분위기를 틈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생각해둔 거 있어요?"

"……."

레베카를 빼닮은 여자는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리아. ...엄마가 나를 그렇게 불렀거든요."

.

.

"…그나저나, 그 여자는 어떻게 해요? 잡히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리아가 환하게 빛나는 황궁을 가리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잡힌다라…?'

나는 천년 전에 지어졌다는 낡아빠진 궁전과,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엄청 귀하신 분들을 떠올렸다.

무력은 별 볼일 없고 몸값만 유별나게 높은신 손님들.

혹여 긴급사태라도 벌어진다면... 건물주는 극성 맞은 손님이라도 무조건 지켜야할 것이다.

나는 똥줄 빠질 부자(?者)인 부자(?子)를 상상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무적이거든요."

"?"

그리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용은 신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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