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52화 (52/117)

〈 52화 〉 보우하사

* * *

고대인들은 달을 여신의 눈이라고 여겼다.

밤에도 가엾은 인간들을 굽어살피려는 여신의 안배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의 모양과 색깔에 따라 의미를 부여했다.

초승달, 그믐달, 상현과 하현. 그리고 보름.

그 중에서 보름달은 여신께서 눈을 똑바로 뜨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능숙한 도둑들조차 여신의 시선이 두려워 보름달이 뜬 밤에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감히 여신의 눈을 더럽히지 않도록.

보름달이 뜬 밤에는 여신께서 즐거이 감상할 수 있는 것만을 행해야한다.

이를테면, 축제와도 같은 것을.

그리고 오늘은 보름달이 뜬다.

때마침 고귀한 공주가 성인이 되는 것을 축복하는 축제의 날이었다. 이보다 좋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오늘은 피처럼 붉은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

천년 전의 고대인들은 달의 모양과 색깔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 붉은 보름달에도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허나, 천년이 지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은 그들의 말을 미신이라 여기어 그 뜻을 잊어버렸다.

.

.

밤이 내려앉은 축제의 도시는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웠다.

특히나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이는 황궁의 찬란한 자태가 소녀들을 잠 못 이루게 만들었다.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여관집의 딸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효, 부럽다아."

에이미는 우울한 표정으로 저 너머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빠가 운영하는 여관을 돕느라 바빠서 축제를 즐길 틈이 없었다.

평소에 파리만 날리는 여관이 바쁘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오늘은 괴상하게도, 다른 곳에 빈방이 없다면서 들이닥친 손님들 때문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덕분에 아빠는 여관을 개업한 지 최초의 만실이라며 감격했으나…. 반면에, 놀고 싶었던 그녀는 이걸 기뻐해야할 지 슬퍼해야할 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아~ 내 왕자님은 어디에 있으려나… 아!"

문득 에이미는 한달 전에 놓쳐버린 젊은 남자가 생각났다.

미소가 헤퍼서 그런지 붙임성이 좋고, 어린 애들이 수상할 정도로 잘 따르던 남자.

그는 남자치고도 음식 솜씨가 있었고.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던졌지만… 같이 있으면 왠지 즐거워지는 사람이었다.

"으, 아까워라."

그냥 사고칠 걸.

못 먹는 빵이 더 크게 보인다는 말이 맞았다.

에이미는 그 남자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 지 궁금해졌다.

여전히 얄미운 꼬맹이들을 상대로 오냐오냐 해주고 있을까?

아니면… 그 말도 안되게 아름다우면서, 어쩐지 할머니 같은 괴상한 아가씨한테 쩔쩔매고 있을까?

"……흥."

…분명 나중에 여자 때문에 고생할 상이었어.

어차피 주변에 남자는 차고 넘치잖아? 내가 어디 빠지는 사람도 아니고~

어느새 에이미는 신포도를 대하는 여우의 자세가 되었다.

그러던 중.

­에이미! 그만 농땡이부리고 이제 내려와라! 네 손님이다.

꿀맛 같던 휴식이 원수 같은 아빠 때문에 깨져버렸다.

아이씨, 순간 짜증이 났으나… '네 손님'이라는 묘한 단어가 신경 쓰였다.

"그러고보니까…."

저번에 피터 씨가 축제날에는 꼭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

"…설마?!"

생각을 마친 에이미는 빠르게 옷매무새와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아이참…! 이럴 줄 알았으면 새로 산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는건데. 아, 나 오늘 속옷은 뭐 입었….

­에이미! 어서 내려와!

"아, 가요!!"

에이미는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황급히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는 곧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에이미 누나! 안녕하세욤."

"어…."

그녀의 왕자님은 어디가고… 웬 말라깽이 소년이 꾸벅하고 에이미에게 인사를 보냈다.

그는 심부름을 오가면서 친해진 하인리히였다.

평소에 싹싹해서 마음에 드는 소년이었으나… 오늘은 썩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티낼 정도로 그녀의 성격이 모나지는 않았다.

"안녕~ 밤 늦게 어쩐 일이야?"

살가운 미소를 정면에서 본 하인리히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누런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이, 이거 읽어달라고 부탁 드리려고 왔는데…. 이게 온 도시에 붙어있어서 궁금하더라고요오."

최근 하인리히는 가끔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대가로 에이미에게 글을 배우고 있었다.

다만, 아직 글을 능숙하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어서 그녀를 찾아온 듯했다.

에이미는 어딘가 낯익은 종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요근래에 퍼지고 있는 수상쩍은 예언이 담긴 벽보처럼 보였다. 그것도 불온한 말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그거 잘못 건드리면 치안대가 잡아간다고 경고…."

"다, 다른 거 아니에요! 이건 오늘 새로 나온 따근한 거예요."

…새로 나온 게 문제가 아니잖아?

에이미는 철없는 소년에게 한마디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자극적인 예언에 대한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붉은 보름이 뜨는 날. 죄악으로 이루어진 자리에, 여신의 개가 나타나 죄인을 심판하리라.

때마침 오늘은 붉은달이었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은근슬쩍 종이를 받아들였다.

"오늘?"

"네! 이게 어른들 사이에서 완전 난리가 났더라고요. …근데. 이상하게 아무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아서요."

그러고보니… 바깥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아직 축제가 한창일텐데도, 온 도시가 침묵하는 것처럼 조용했다.

"…26년 전. 그 때랑 비슷하구나."

어디서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관 주인이었다.

에이미는 아빠의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26년 전이라면….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서 그다지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에이미는 자꾸만 과묵한 척하는 아빠를 채근했다.

결국 여관 주인은 전 황제 부부가 처형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작은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비록 현 황제 폐하가 진실을 밝혔지만… 처음에는 다들 입에 담기를 두려워했지."

"설마 그 황제 부부가, 마신을 섬겼다는 말이 어디 가당키나…."

에이미는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하인리히가 들고 온 벽보를 읽었다.

이윽고,

"…이게 뭐야…?"

봐선 안될 것은 본 사람처럼 손을 흠칫 떨며 침음성을 흘렸다.

"뭔데요?"

"……."

…이런 걸 입에 담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고작 활자가 역병만큼이나 두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꼈다.

에이미는 아빠가 말한 26년 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것 같았다.

­구구구..

땅이 울리고, 대지가 비명을 지른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

"폐하, 아니 아바마마… 소녀가 성년을 맞이하여 아바마마께 청하고 싶은 소원을 있사옵니다."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은 당돌하게 황제의 앞에 선 여자를 본다.

그녀는 더없이 우아하고 당당했다. 과연 황족이라고 일컬을만한 자태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군.'

헬리오드는 누이동생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에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불쾌하다기에는 조급했고, 조급하다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는 금색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늙은 황제와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이냐, 로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대에 서지 않았던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이다.

그런 그녀가 무대를 만들었고, 분에 넘치는 관객을 모았으며, 끝내는 스스로 배역을 맡으려 하고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야 했을 누이의 일탈.

헬리오드는 거기에 거슬리는 정도가 아닌 꺼림칙함을 느꼈다.

'언제부터 였느냐, 로제.'

제 어미의 동정으로 목숨을 구걸할 때였느냐.

제 형제들이 재와 먼지로 변모할 때였느냐.

제 하찮은 소원조차 이룰 수 없어진 때였느냐.

제 친애하는 종들이 하나둘씩 짓밟혔을 때였느냐.

'아니면.'

황궁 밖을 나도는 걸 눈 감아준 자신의 안일함이더냐.

언제든지 밟아죽일 수 있다하여 동정을 베푼 내 업이더냐.

'…되었다. 뭐든 좋다.'

굳이 가시밭길을 걷겠다면.

지금에 와서 황좌를 엿보겠다면 말리지 않는다.

슬픈 일이 되겠지만,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지어다.

"허락하마."

"하해와 같은 자비로운 폐하의 허락에 소녀가 감읍하옵나이다."

형식적인 미사여구와 칭송을 마치고.

사람들은 이제 막 18살이 된 소녀의 치기어린 소원이 무엇일지 상상한다. 웅성거리는 작은 소리가 파문처럼 퍼져나간다.

이윽고, 연극배우처럼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린다.

"폐하, 어느날 여신께서 제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자체가 죄악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

그 순간.

"……."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흐른다.

출신의 고하를 불문하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황제조차도.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만이 귀기 어린 적막 속에서 입술을 연다.

"여신께서는 분노하고 계십니다."

"…신탁이라도 받은 것입니까."

침묵을 깬 것은 새하얀 머리의 여자다.

성녀라 불리우는 크리스틴 벨은 조소를 짓고 있었다.

"만일 개소리라면 각오하셔야할 겁니다."

성녀의 거침없는 욕설.

새롭게 충격에 휩싸인 이들이 가운데서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만이 말을 잇는다.

"요하네스 폰 임페리얼, 존속을 살해한 그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미친…."

초로의 황제에게서 얼굴이 지워지고.

성녀조차도 경악성을 흘렸다. 관객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하나가 된다.

그럼에도 황녀는 입술은 멈추지 않는다.

"요제프 폰 임페리얼의 아들."

전 황제의 이름.

황제였으나 형장의 이슬로 사그라진 죄인.

그제서야 헬리오드는 기괴한 감각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건, 불안이었다. 그는 더이상 저 입을 열게 해선 안된다는 것을 직감한다.

"황녀의 입을 막아라. 책임은 내가 진다."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은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검을 들고 다가오는 인간들을 보며.

천년을 지켜본 고룡은 드물게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문득 레베카가 어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적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도 이곳이었다. 드래곤 로드가 초대 황제에게 허락했다는 '태초의 궁'이었다.

당시에 해츨링이었던 그녀는 로드에게 붙잡혀 이곳에 오곤 했다.

'여전하구나.'

당시에 경외를 표하던 인간들은 전부 사라졌으나.

이 장소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천년이 지난 지금.

인간들은 착각하고 있다.

'태초의 궁'의 주인은 언제나 용이었다.

이 곳은 인간의 궁전이 아닌 드래곤 로드의 레어다.

'가장 적합한 무대인가. 과연.'

마법의 주인이 지냈던 장소에는 어떠한 마법적 구속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애당초 어린 용의 훈련을 위한 장소였다.

이 곳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전지전능하다.

"커헉!"

레베카는 손짓만으로 날파리를 털어버린다.

이후로 허공에 떠오르며 멍한 얼굴의 황태자를 흘겨본다.

'빛의 여신처럼 신성하게라니….'

터무니 없는 연기를 요구를 받았다.

허나, 한 때 신이나 다름없는 추앙을 받았던 그녀로서는 실로 간단한 주문이었다.

고룡은 인간들이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현실로 실현할 수 능력까지 갖추었다.

우선 호흡을 어지럽히는 마력의 안개다. 두려움은 판단을 흐트린다.

그 다음은 빛이다. 대대로 빛은 찬양과 신격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날개. 그녀의 본신처럼 피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순백의 깃털로 이루어진 천사의 그것이다.

명화 속의 우상.

이를 흉내내는 것만으로 숭배 받을 수 있다. 때때로 인간은 무지몽매하다.

"…여신의 대리자…!"

경탄과 경악, 불신과 맹신.

두려워 하면서도 칭송함, 그 모든 걸 아울러 외경이라 한다.

"……."

그러나, 그 대상이 되는 레베카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자긍심이 상했다.

'…로드가 봤으면 통곡할 일이군.'

용이 잠들면서 그들이 잊었을 뿐.

천년 전만해도 마땅히 그랬어야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같잖게 여신의 흉내를 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요하네스, 죄 많은 사특한 황제여.

늙은 황제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치솟은 빛을 보았다.

­부정을 범하고.

­진실을 은폐하고.

­인륜을 저버리며.

­법도를 어겼노라.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떨어질 때마다ㅡ

"까아아악!"

"이게 무슨…!"

바닥이 흔들리고, 기둥에 금이 갔으며, 벽이 허물어지고, 기어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연회장은 혼비백산한 자들로 가득했다. 바닥에 주저앉고,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한 채 널브러진…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황녀님을…. 아니, 귀빈들부터… 이런, 제기랄!"

고위 기사와 궁정 마법사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황녀의 몸에서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신벌이다, 여신의 신벌이야!"

"심판…."

"제발, 살려줘!"

정작 그 난장판을 만들어낸 레베카는 심드렁했다.

어서 빨리 지루한 연극의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부질없는 복수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었으므로.

­간통으로 태어난 황족이여, 더이상 신탁을 은닉하지 말라.

그 경고와 함께 세상의 중심이 무너지고 있었다.

밤을 몰아내는 환한 빛을 뿜어내면서.

**

소녀는 북쪽 숲속에 자라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러고는 밤하늘 아래서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도시를 보며 중얼거렸다.

"…또 두고 갔어."

어린애인 게 싫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계속 곁에 있을 수 있을테니까.

피터는 캠핑이라는 새로운 놀이라면서 저택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성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러면서 예쁘게 차려입은 아줌마와 그녀와 같은 색의 남자애만 데리고 도시로 돌아갔다.

"거짓말쟁이."

­나도 갈래…! 약속했어.

­응, 그런 적 없어~ 대신, 착하게 있으면 맛있는 거 사올게.

착하게 있으면.

그 말을 떠올릴 때면 어째서인지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데이지는 불안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주받은 아이]

지금까지 그녀와 닿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만져줄 때면 기분이 말랑말랑해지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무서워서, 또 생각만으로 괴로워서… 마치 목을 옥죄이듯이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녀는 사실 이게 즐거운 꿈이 아닐까하고 가끔 생각하곤 한다.

자고 일어나면, 한 순간에 꿈이 사라져버릴까봐 두려워서... 홀로 잠들 수가 없었다.

잠들지 못하는 소녀는 저 멀리서 보이는 밝은 빛을 바라보았다.아마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줄곧 그러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번쩍!

문득 그곳에서 튀어오르는 별똥별이 보였다.

사실 그건 별똥별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했지만ㅡ

"아!"

데이지는 배운대로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포개었다.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별님께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서….

영원히 제 곁에 있게 해달라고.

**

"뭐가 저리 매가리 없게 뿌사지노…."

늙은 난쟁이는 빛과 함께 무너지고 있는 황궁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허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기냥 저 할망구가 죄다 때리쥑이면 되는거 아니가."

이럴거면 자신을 부려먹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묻는 듯했다.

대단히 합당한 의문이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죽여서도 안되고."

"편하게 모가지만 따버리면 낫잖나."

"제국이 진짜로 망하면 안돼요. 죄 없는 사람들만 죽어날 겁니다."

"뭐, 글킨하다만."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제국이 없으면, 인류의 힘이 그만큼 약해진다.

훗날 마족 놈들과 투닥거려줄 녀석들을 아예 초주검으로 만들어 버릴 순 없었다.

자칫하면 인류 멸망이라는 최악의 엔딩을 맞이할 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왕까지 만나는 건 사양이야.'

내 편안한 노후를 위해서라도…!

제국은 썩은 부위만 도려내고 존속되어야한다. 진짜로다가...

"그리고 제 말의 증거요. 잘 챙겨주세요."

나는 내옆에 있는 리아를 가르키며 말했다. 비로소 도플과 한 약속을 지킬 때였다.

"고얀 새끼…. 처음부터 작정한 기였네…."

리아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깨달은 도플이 허탈한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간 고생한 도플를 위해 해줄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나중에 레베카한테 그의 노고를 언질을 주긴 해야했다.

이제 남은 건.

테오를 데리고, 레베카와 합류한 뒤에….

"…저기요.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덕분에, 정말 고마워요. 나중에 꼭 만나요. 멋진 드레스 만들어줄게요."

나를 붙잡으며 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주섬주섬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말이 두서가 없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워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편, 나는 레베카가 로자리아 폰 임페리얼의 이름으로 벌였을 희대의 연극을 떠올렸다.

…뭐가 되었든, 이제 황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모두가 행복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근데… 저 남잔데요?"

"아."

리아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이걸 보고 누가 황녀라고 생각할까?'

그녀의 앞길이 캄캄해서 보기 좋았다.

**

나는 옷을 갈아입고.

저택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오를 데리고 걸음을 옮긴다.

"제, 제가 가능할까요?"

어수선한 도시 분위기에 긴장한 듯이 테오가 불안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소년을 등을 떠미는 것 뿐이었다.

나는 테오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고 있다.

"연습할 때도 잘했잖아? 전부 레베카를 돕는 일이야."

"…은인을."

"그리고 람람이가 너보고 그러더라. 바람보다 빨리 달려서 멋지다고."'

"그, 그 애가요?"

그는 은혜를 잊지 않으며, 순정을 간직하고, 그리고 정에 굶주린 아이다.

"네네, 알겠어요."

테오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끄덕였다.

'착한 녀석.'

내가 흐뭇하게 머리를 툭툭 두드려두자, 녀석이 손을 슬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근데, 그 애는 그런 식으로 부르면 싫어해요. 아저씨."

"……형이라고."

하여간 마음에 드는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이라니까.

**

약속 장소에 웬 꼬맹이가 있었다.

마치 레베카와 데이지를 반반 섞어넣은 듯한 외모였다.

"왔구나?"

꼬마 주제에 어른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말도 안되게 앙증맞았다.

평소 같았으면 마구잡이로 비행기를 태워주고 싶다만, 그럴 때가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하얀 수도복을 차려입은 나는 품 속에서 꺼낸 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감춘다.

이윽고, 셋이서 눈앞의 여신상이 조각된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붉은 보름달이다.

부디, 여신께서 보고 있다면...

정답은 알려주지 않아도, 티끌만한 양심이 있기를 바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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