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54화 (54/117)

〈 54화 〉 연옥(2)

* * *

지옥으로 향하는 계단.

연옥의 도입부는 사람 두셋 정도가 지나갈만한 폭이었고.

나선형 계단처럼 중심이 휑하게 뚫려있는 구조였다.어두컴컴하고 깊어서 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유독 짙은 어둠이 몰려있는 통로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녹슨 쇠냄새가 섞인 지하의 눅눅한 냄새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명이 귓가에 스쳐지나갔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짙다던가.'

명색이 빛의 여신을 섬긴다는 성당 아래에 이런 음울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했다.

[내려가지.]

나는 벽면에 듬섬듬성하게 난 도깨비불 같은 푸른 불빛을 보며 말했다.

겁을 집어먹은 타락한 목자(?者)들과,

빼앗긴 자식을 되찾으러 온 어머니와,

그리고 운명대로라면 이곳에 있었을 소년까지.

그들은 저마다의 침묵을 머금고,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는 지하로 발걸음을 옮긴다.

.

.

연옥은 엄연히 감옥이다.

현재는 비인륜적인 실험실의 성격이 강하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수감된 자들을 탈옥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그런 연옥의 내부는 미로와도 같았다.

그것도 옳은 길을 정해진 방법으로 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종류의 미로였다.

'모르면 죽어야하는 망겜 같은 곳.'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세이브와 로드를 반복해서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에는 그런 기능이 없다.

그 때문인지...

"이, 이보게… 여긴 모르고 올만한 곳이 아니다만… 자네, 길은 알고 있는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안토니오 주교가 불안해보이는 얼굴로 자꾸만 말을 걸었다.

[…….]

연옥의 내부에 대한 정보.

솔직히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무지했다.

원작에서도 세세하게 다뤄지지 않는 미로찾기를 내가 알 턱이 없었고,도플마저 교단과 관련해서는 효용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전설 속의 감옥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다.

그 누구도 연옥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곳을 지키는 충실한 간수들을 제외하곤.

"아, 아니… 길은 알고 가야…."

그 탓에 생각을 달리했다.

밖이 안된다면...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령 죄수와 실험체를 가두는 공간이라고 할지라도,살아있는 그들을 관리할 인적 자원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간수와 같은 무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를테면 연구직 같은 놈들이.

'마침 설득해줄 놈도 데려왔고.'

계획은 그런 만만한 녀석을 붙잡아서 길안내를 시킬 셈이었다.

도중에 정체가 탄로날 가능성이 있으나…. 그 정도 위험부담은 감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뭐야.]

어느새, 눈앞에는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거대한 석상이 보였다.

그것은 연옥의 1계층으로 향하는 입구을 지키는 골렘이었다.

"휴우. 자네, 길을 알고 있었나 보구만."

나는 단 한번도 길을 헤매는 일 없이 제 1계층으로 가는 입구에 도달했다.

그저 발이 닿는대로 걸었을 뿐인데도….

'어째서…?'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연옥 안으로 들어와 본 적이 없다.

그런고로 듣도 보도 못한 지하감옥의 길 따위는 몰라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길을 알고 있는거지?'

귀신에 홀린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연옥의 문을 열었을 때부터 느껴지던 기시감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어쩐지 누군가와 손을 잡고, 이 주변을 돌아다닌 듯한ㅡ

"과연. 여신의 사도답게 잠벌의 공간도 익숙한 게로군."

문득, 나를 흘겨보던 안토니오 주교가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제법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벌벌 떨기만 하던 사형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크흠, 자네도 고생이 많구만. 이 꺼림칙한 짐승들을 돌보러 여기까지 와야한다니…. 정말이지, 자네는 신실한 자일세."

어느 위선자가 근엄한 미소를 띄우며 주둥이를 열었다.

"그거 알고 있는가? 내 이래봬도 본교에서 베네딕토 예하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네. 자네도 알겠지만, 성하께서 그 분을 아끼시는 탓에 다음 교황 후보로 선출될…."

뱀의 혀가 너무 길었다.

[본론.]

"만, 만일 베네딕토 예하께서 교황이 되신다면…! 나는 바로 추기경이 될 걸세. 그럼, 자네가 이런 '역겨운 것'들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겠네. 원한다면 사도의 수장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네만?"

과연, 안토니오 주교는 타인의 욕망이 무엇인지 생각할 줄 아는 성직자였다.

더군다나 참 종교인답게 측은지심과 역지사지의 마음까지 지닌 듯했다. 내게 있지도 않은 고뇌과 고통까지 공감해주니 말이다.

하기야, 원래 타인과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비난의 대상을 만들고, 공감해주는 것만한 게 없긴 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가치까지 드러내면 완벽하겠지.

이런 상황에 이따위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토니오 주교는 그럭저럭 두꺼운 철면피를 갖춘 인물이었다.

'하긴.'

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주교라는 자리를 카드패로 딴 건 아닐 테니, 이런 뻔뻔함이라도 가져야할 것이다.

'저 수녀도 이런 식으로 꼬신걸까?'

왠지 그랬을 것 같다.

이름 모를 수녀는 안토니오와 나이 차이가 족히 20살을 될 법한 젊은 여자였다.

비록 신실하진 않을지언정, 수녀가 중늙은이에게 안길 이유는 추레한 몸뚱이가 아닐 게 분명하니..

'…어질어질하네.'

어떤 세상이든 타락한 종교인은 있나보다.

여신이 보았다면 피눈물을 흘릴만한 작태였다.

'진짜 쿼츠였으면, 바로 반갈죽인데….'

그럼 점에서 안토니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진또배기 광신도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역겹다니….

나는 내 등에서 중얼거리는 작은 중얼거림을 들어버렸다.

무척 미약한 목소리였지만… 거기에는 충분히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후우.'

기분이 불쾌하다.

또, 제 때 저 주둥이를 막지 못한 게 후회됐다.

[주교.]

"뭔가… 억!"

나는 안토니오의 멱살을 쥐고,

­짝!!

­짝!!

놈의 따귀를 왕복으로 후려갈겼다.

"으, 으, 어, 어…."

주저앉은 그는 고통과 수치로 퉁퉁 부은 뺨을 부여잡으며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나는 그런 놈을 내려다보며 새겨넣듯이 경고했다.

[두번은 없다.]

마음 같아선 잘근잘근 밟아주고 싶지만….

[닥치고 앞장서라.]

아쉽게도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

지하감옥 연옥은 종교적인 색채가 무척 짙었다.

그런 점에서 의외로 대성당에 있는 게 퍽이나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걸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감옥의 모티브가 신곡에서 나오는 연옥과 유사했다.

이른바 '칠죄종'이라고 불리는,

만화나 소설에서도 종종 우려먹는 그것들로 감옥의 테마가 구성되어 있었다.

제 1계층인 교만부터 시작해서 제 7계층인 색욕까지.

총 일곱 계층이나 되는 지하 감옥의 어딘가에 구출 대상이 있다.

이 경우에 최악은 레베카의 딸이 있는 최하층에 있을 경우지만...

'적어도, 7계층은 아니야.'

해츨링을 관리하고 실험하려면, 어느정도 접근성이 확보되어야할 것이다.

또한 아래로 내려갈수록 혹독해지는 연옥의 특성 때문이라도 연약한 해츨링을 최하층에 둘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아랫층에는 마족이나 대역죄인 같은 위험 분자가 갇혀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은 즉슨... 가장 위험부담이 큰 아래층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어디로 가야할 지 알 거 같아.'

마치 내 손에 정답지가 들려있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이 기묘한 감각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한 호의만 느껴졌다.

'믿어볼까.'

나는 좋을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차하면 그때까지 길잡이를 구하면 되니까.

문득, 테오가 한쪽을 가리키며 작게 소근거렸다.

"…형, 저기 빛이 보여요."

형?

일단 그 쪽을 확인한다.

이윽고, 나는 가면 밑에서 히죽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군.'

1계층에는 바깥과 연결된 작은 유리창이 있었다.

아무래도 죄수들이 햇빛을 쬘 수 있도록 일부러 만들어낸 공간인 듯했다.

나는 그 달빛을 눈여겨보았다.

더이상 1계층에서 확인할 건 없다고 확신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옥의 지리를 깨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2층으로 내려간다.

**

제 2계층의 테마는 질투다.

질투에 눈이 먼 자들이란 의미에서인지….

본격적으로 주위가 어두워지고, 지리를 모른다면 헤맬 수 밖에 없는 미로가 시작된다.

'슬슬 처리해야 하나?'

나는 울상을 짓고 있는 안토니오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수녀를 흘깃 보았다.

사실상 1층을 넘어온 뒤부터 안토니오 주교는 역할을 다했다.

만일 화살이 날아온다면, 고기방패로 내세우는 게 그나마 쓰임새일 정도다. 수녀는 처음부터 쓸모가 없었고.

그들은 겁에 질린 데다가 걸음마저 느린 짐덩이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내 뒤통수를 치거나 암 걸리는 트롤짓을 벌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백프로다…!'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웹소설의 내공만 10년이다. 환산하면 6분의 1갑자다.

고로, 나는 목막힘을 불러일으킬 고구마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원한 어린 안토니오의 눈깔만 봐도 사이즈가 나온다.

겁 먹은 새파란 수녀의 얼굴만 봐도 그림이 그려진다.

'대충 입막음으로 죽이려 들거나, 조용해야할 순간에 비명을 지르겠지.'

안다. 독자로서의 경험이 말한다.

이런 고구마와 후환을 남겨서는 안된다고.

'지금 해치워야한다.'

나는 적절하게 손절할 타이밍이라고 직감했다.

[테오, 스트레스 풀 시간이다.]

"??"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살짝 답답해진 나는 테오에게 조언을 덧붙여주었다.

[저 새끼 명치 한번 세게 쳐봐.]

"…네?

"??"

얘가 아직 어려서 그런 지 이해력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으니, 레베카에게 그 시범을 부탁하기로 했다.

[레베카, 저 여자 깔끔하게 보내줄 수 있어요?]

"흠. 재로 만들라는 거니?"

[…아니 명치 한대만 쎄… 아니, 살살 패줘요. 기절할 정도로만.]

"어려운 주문이구나."

나와 레베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토니오와 수녀는 멍한 표정이었다.

이름 모를 수녀가 불온한 분위기를 깨닫고 입술을 떼려고 했다.

"저… 끄욱."

허나, 대사를 한 번 내뱉지도 못하고….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뒤집고 축 늘어져 버렸다.

"이, 이, 이게 무슨…!"

한편, 안토니오 주교는 자기 쪽으로 허물어지는 수녀를 기겁해 가면서 피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하룻밤의 정을 나눈 여자인데…. 인상이 마이너스에서 더 떨어질 때가 있었다.

레베카는 손맛이 없었다고 아쉬워하며 쓰레기를 가리켰다.

"저건?"

[저건 테오 꺼라서 물어봐야 해요.]

"아, 아아니, 전 사양할게요오."

잔뜩 당황한 테오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이걸 양보하네.

스트레스는 풀 수 있을 때 풀어야하는데….

'억지로 시킬 수는 없지.'

나는 레베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

그녀가 고사리손을 쥐었다가 펴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안토니오가 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거센 저항을 보였다.

"오, 오이지마…!!"

…뭐지?

일본인인가?

어쨌든 안토니오는 이상한 절규를 마지막으로.

빠악!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피가 섞인 거품을 문 채로 쓰러져버렸다.

"아차…. 힘 조절에 실패했구나. 쯧, 치료하더라도 평생 헛숨을 달고 살겠어."

가해자라기에는 너무 태연한 목소리였다.

누가 들으면 의사인 줄 알겠다.

[얘네들은 대충 구석에 박아두고, 아, 그리고요….]

이제야 마음 편히 연옥을 돌아다닐 수 있겠다.

**

"…얘가 어디갔어?"

바람꽃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데이지를 찾고 있었다.

결코!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땅콩이가 걱정되어서 찾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모지리 땅콩이는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가는 겁쟁이라서 찾는 것 뿐이었다.

'칫, 말도 없이.'

그러니까. 바람꽃은 땅콩이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절대로 섭섭해 하지 않는다.

게다가… 북부의 늑대가 고독할 수록 강해진다고, '푸른 질풍'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울아빠는 친구가 별로 없었어.'

그 덕분인지 그가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딸아… 강함에는 희생이 따른다.]

문득, 맨날 혼자서 술을 마시던 중년 남자의 씁쓸한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킁."

…강함과 별개로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영리한 북부의 딸은 사실 늑대가 고독과는 거리가 먼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바람꽃은 집안 곳곳을 싸돌아다녔다.

레베카가 아공간에서 꺼낸 집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딱히 숨을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또래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뾰족할 수가 없었던 바람꽃은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솔 아줌마, 땅콩이 봤어?"

"땅콩? …그 작은 인간?"

"응응."

"아까 밖에서 나무를 타는 것 같던데… 근데, 너 괜찮겠니?"

"뭐가…?"

"걔도 똑같잖아. 그 불길한 떠돌이랑."

솔 아줌마는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

.

바람꽃은 씩씩거리면서 집 밖으로 나왔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몰라…!"

고향의 동족들은 그녀가 땅콩이나 소심이랑 어울린다고 걱정하곤 한다.

그리고, 바람꽃은 그들이 그럴 때마다 속이 답답해져서 저도 모르게 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니까 도망치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높은 나무에 올려다본다.

그곳에 작은 인형이 굵은 가지에 걸텨 앉아있는 게 보였다.

바람꽃은 어쩐지 한달 전에 비가 왔던 그 날이 생각났다. 그 때랑 똑같았다.

'에휴, 이번에는 이불도 없는데.'

미련한 땅콩이! 라고 욕하며, 나무를 매달렸다.

다만… 북부의 늑대는 나무를 타는 데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다. 그래도 낑낑거리며 열심히 오른다.

"으으, 높아, 추워."

그렇게, 한참 만에 도달한 정상.

바람꽃은 그곳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코끝이 빨개진 채,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도시 쪽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미련하고 둔해빠진 땅콩이다.

"멍청이."

바람꽃은 그 옆으로 성큼 다가가 비스듬히 앉는다.

그러고는 자신의 풍성한 꼬리를 데이지의 허벅다리 위에 척 걸쳤다.

"...??"

"…둘 때가 없어서 올려둔거야."

바람꽃은 그리 말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다.

"원래 북부의 늑대는 추운 거 좋아해."

"…그래?"

"그래."

시간이 지나자,

서로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점점 따뜻해진다.

데이지는 남몰래 생각한다.

평소에 털뭉치라고 불렀던 만큼,

무척이나 부드럽고 포근하다고…

­훌쩍.

소녀는 수줍게 콧물을 훔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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