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55화 (55/117)

〈 55화 〉 연옥(3)

* * *

나는 악의와 기만으로 이루어진 함정 투성이인 미로를 선두에서 걸어나갔다.

그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고, 경험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익숨함이 담겨 있었다.

때때로 석벽과 철로 만들어졌고, 어둠과 삭막함으로 치장된 복도를 보며 묻는다.

'여기로 가면….'

이윽고, 귓가에 희미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쪽으로 가면 막다른 길이에요.

'그럼, 저기는?'

­저쪽은 아줌마들이 가면 다친다고 소리를 질렀어요.

분명, 환청일 거라고 생각하는 여린 목소리다. 그러나,

­헤헤, 그러니까 저만 따라오세요.

나는 그 목소리를 쫓아서 기억의 자취를 더듬고 있다.

그렇게 위험이 도사리는 길은 피해가고, 혼란을 야기하는 길목에서 답을 찾아낸다.

기이한 일이다.

처음 보는 장소에서 처음 마주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데자뷰인가…?'

기시감은 아래로 향할 수록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착각이라기에는 그 결과물이 너무 극적이다.

이 쯤 되면 내게도 묘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한다.

'내가… 이 장소에 와본 적이 있다고…?'

어쩌면, 이건 꽤 위험한 종류의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자신이 못미더워져서 이러한 현상을 레베카에게 전했다.

[…저한테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요?]

"음."

레베카는 앳된 얼굴로 내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술을 뗀다.

"그것 참 기이한 일이구나. 일단, 그대의 정신은 평소 그대로란다. 어떠한 침식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아. 흐음…."

레베카는 내 정신에 지극히 정상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천만다행이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서.

그제서야 나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헤헤, 다음에 또 봐요~

그 결과와는 별개로 여린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나를 향한 호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일부러 쾌활한 척하고 있었다.

'다음이라….'

역시 짐작되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기억이 유리창에 뿌연 김이 서린 것처럼 흐릿했다.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목소리다.

결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잘 부탁해.'

이미 나는 그 아이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

.

나는 레베카와 테오라는 최강의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가 되었다.

내 안내를 바탕으로 레베카가 경로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해치우고, 테오가 까다로운 마법적 요소를 몸소 해체했다.

버스의 성능이 원체 뛰어나서 그런지.

우리는 별 다른 어려움 없이 3계층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달했다. 그야말로 광속이었다.

'…원래 이렇게 쉽나?'

한편, 나는 연옥이 방탈출 카페처럼 느껴저서 살짝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친척 애들을 데리고 지하감옥에 견학을 하러 온 느낌이었다.

1계층은 그래도 사람이 살만한 평범한 수감실 같았고,

2계층은 보이는 게 거의 없어서 스킵하다시피 했다.

'부디 3계층도 무난하기를.'

나는 이 다음도 쉽게 갈 수 있기를 바라며.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

다양한 기구들과 가지런하게 쌓아올린 양피지.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도면과 정체 불명의 액체가 담겨 있는 플라스크.

그곳은 먼지가 하나도 없는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했다.

옅은 불빛에 보이는 것은 흐릿하게만 보였다.

아른거리는 촛불 너머로.

수술대를 연상시키는 제단이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제단 아래에 수은과 금으로 그려낸 거대한 원형의 진이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고요하게.

그의 창백한 얼굴은 젖살이 남아 있었고.

아직 남아인지, 여아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앳된 형상이다.

그런 그는 손목에서 바닥까지 이어진 선명한 혈흔이 만들어 낸 모습이었다.

"실패인가."

한참동안 그를 지켜보고 있던 백발의 남자가 혼잣말을 했다.

남자는 은빛이 섞여있는 붉은색 액체를 회수하며 담담한 한숨을 내쉰다.

"역시 투여할수록 적합률이 떨어지는군."

12번이었던가?

남자는 중얼거리며 여백에다가 지금까지 알아낸 결과를 채워넣는다.

­혈액을 투여할수록 A­12에게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다른 개체와 마찬가지로 투여량에 한계가 있는 듯하다.

­각성이라고 명명한 특이체의 능력 발현은, 혈액의 투여량을 늘릴 수록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극심한 통각을 동반하는 듯하므로 주의할 것.

­실험용 쥐 100마리와 표준형 개체에게 혈액을 투여 후 각각 10분, 12시간 내로 사망하였다. 용의 피에 독성이 있다는 설은 진실로 판명. 독성을 이겨낼 수 있는 특이체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듯하다.

­어린 개체보다 성체의 혈액이 효율적일 것으로 추정….

"…."

보고서를 작성하던 도중

때마침 잉크가 다 떨어져 버렸다.

"흠."

백발의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간단한 것조차 제대로 해 놓지 않은 무능한 자들에 대해서 짜증이 일었다.

"밖에 누구 없습니까."

하고 있던 일은 반드시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리던 남자가 말했다.

그는 이번 작업은 마무리하고 난 뒤에 쓸모없는 부품들을 싹 다 갈아버릴 생각이었다.

"……."

그러나, 공방 너머에서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하십시오."

여전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남자는 어제부터 지상으로 나간다며 보고하러 온 부품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그건 그가 공방에 틀어박혀 집중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우호~ 고작 두 달 만에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다고? 어이어이, 이거 신기록이라고!

­로자리아 황녀님, 그녀는 신인가? 그녀는 신인가…….

­크크크… 이 은혜… 역대급 성년식으로… 돌려주지….

오랜 지하 생활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부품들이 그렇게 떠들어댄 것 같다.

아무래도갑작스러운 지상의 요청에 응하여 황녀의 성년식을 지원하러 도망치다시피 나가버린 모양이다.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채.

"하아."

백발의 남자.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모든 연구마법사들이 바깥 나들이를 가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그가 무심코 허락한 일이긴 하지만.

"망할 것들."

아무튼 시어도어는 지상으로 내뺀 연구원들과 그 빌미를 준 황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한참만에 노여움을 가라앉힌다.

그런 연금술사의 뇌리에는 별개의 감정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녀가 성년인가.'

축하하러 갔어야했을까…?

시어도어는 쓴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이제와서 그 아이와 만나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꼬르륵.

지독한 공복과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3일 정도 먹지 않았던가. 슬슬 영양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시어도어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A­12를 내려다 봤다.

그가 굶었던 만큼 이것도 함께 굶주렸다.

원활한 회복을 위해서 녀석의 사료도 챙겨줘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시어도어에게는 일종의 결벽증이 있었다.

그런 그의 공방에는 섭취할만한 음식물은 없었다.

만약에 심부름을 시킬만한 부품들이 없다면, 그가 직접 공방을 나서서 저장고까지 가야만 한다.

"귀찮게 됐군."

생물이란 참 성가신 존재다.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는 몸이 절실했다.

허기에 진 시어도어는 어쩔 수 없이 공방을 나섰다.그런데,

­뚜벅뚜벅.

인기척이 없어야할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하나 정도는 남아있었나.'

그는 그럭저럭 책임감 있는 부품이라고 칭찬하며 그 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거기... 당장 이쪽으로 오십시오."

**

분노의 형벌을 의미하는 3계층은 다른 계층과 비교해도 수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여기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녀요!

앳된 목소리와는 달리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복도였다.

그 부분 때문에 오히려 경계심이 생겼다.

주변을 살피며 나아가던 도중ㅡ

"거기... 당장 이쪽으로 오십시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뭔가 매가리가 없는 시원찮은 목소리였다.

나는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할 생각으로 뒤를 돌아봤다.

흰 가운을 입고 있는 백발의 남자가 보였다.

[…음.]

딱봐도 이기적이게 생긴 자식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특히나, 자세가 굽었는데도 훤칠한 팔등신을 보니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남정네 주제에 면발처럼 길다란 백발,

다크서클이 짙은 칙칙한 눈깔,

쥐어박고 싶은 높은 콧대,

삐뚤어진 주둥이와 점잖은 척하는 턱주가리….

분명 초면인데….

그런데도, 언제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 멀뚱히 있는 겁니까. 어서 이쪽으로 나오라니까."

존댓말인데도 안하느니만 못한 재수 없는 말투.

그때서야 나는 저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새끼가 왜 여기있어?'

병들어보이는 백발의 미남자.

그는 도플이 조사한 제국 최고의 신랑감 후보 중 하나다.

무려 황태자와 더불어 F4에서 속하는 잘난 새끼였다.

3대 공작 중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가문의 후계자.

제국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재능있는 연금술사.

그리고.

'원작 속 악역.'

삐뚤어진 어린 시절로 인한.

안면인식 장애, 결벽증, 공감능력 결핍 등의 질환을 앓고 있는 싸이코패스.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

놈이 연옥에서의 실험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즉,

'…용사를 실험하는 새끼.'

그런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은 초반부의 빌런 포지션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알고 보니 사연이 있는 놈'이라는 세탁기를 돌려서 남주 포지션이 된다.

어쨌든 놈은 이곳의 책임자나 다름없었다.

연옥에 관해서라면 내가 모르는 것도 모두 깨고 있으리라.

'이런 걸 보고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왔다고 하나?'

가장 쓸모있는 쓰레기가 제발로 걸어왔다.

여신에게 티끌만한 양심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레베카.]

마법과 마나가 존재하는 세계.

그런 세상에서 준비된 마법사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방비한 마법사만큼 쉬운 존재도 따로 없다.

[저, 저건 잡아야해…!]

나는 초희귀 포켓몬을 발견한 트레이너가 된 기분으로 말했다.

너로 정했다!

{레베카}♀ Lv.99는 전광석화를 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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