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연옥(5)
* * *
"이백하고도 17년만인가."
검신을 바라보는 레베카는 더없이 결연해보였다.
"뽑았다면 베어야할 터."
허공을 두어번 가르며.
그녀가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뒷모습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검객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듯했다.
검 한자루만 들고서 적진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영웅의 풍모였다.
'호걸이로다.'
이백년의 시간을 넘어, 팬드래건이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검사가 재림했다.
솔직히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름답고 강인한 모습이었다.
'…멋있어.'
그런 레베카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깨닫는다.
…말이 좋아서 영웅이고 멋이지.
이 사람, 실은 무지성으로 베어버릴 작정이잖아?!
[스탑!]
나는 황급히 레베카를 뒤따라가 뜯어말렸다.
약간 이성을 놓듯이 말을 듣지 않아서, 겨드랑이에 양팔까지 끼워넣어가면서 간신히 제압했다.
[아 좀. 저기 누가 지키고 있다잖아요. 무작정 들어가서 어쩌려고요.]
"괜찮다. 오우거 정도는 마나가 없이도 손쉽게 벨 수 있단다."
…사람이라던데.
어쨌든 레베카는 뭐 하나도 잘못된 게 없다는 듯한 덤덤한 얼굴이고 목소리였다.
오히려 그녀가 나를 질책하듯이 흘겨봤다.
"그대여, 설마 나를 못 믿는거니?"
눈나 믿지?
뭔가 신뢰를 시험하는 듯한 가불기다.
[…당연히 믿죠. 근데 힘들게 칼질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거 있으니까요.]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어도어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을 덧붙인다.
[저 자로 빅털인지 뭔지하는 괴물를 방심시키고 난 뒤에 급소를 찌르는 방향으로 가시죠. 쉽게쉽게.]
오우거 같은 괴물이랑 정면에서 싸워주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조금 비겁하더라도 안전한 게 제일이지.
무척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나 혼자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레베카와 테오, 심지어 시어도어까지도….
뭔가 되게 찜찜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기인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조금 위축된다.
[야, 눈을 왜 그렇게 떠?]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만만한 테오에게 물었다.
테오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원래 아무것도 아니면 뭐가 있는 건데….
상당히 찜찜했지만. 어쨌든 레베카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한편.
"그렇게는 안될겁니다."
졸지에 미끼가 되어버린 시어도어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하긴, 뒤에서 몰래 떠드는 거랑 앞에서 총대매는 거랑 차이가 크긴 하다.
근데 어쩔라고?
도망갈 데도 없는 주제에 까라면 까야지.
[왜 하기 싫어? 숨 쉬는 건 어때?]
나는 이제와서 발을 빼려하는 시어도어를 갈굴 생각으로 이죽거렸다.
그럼에도 시어도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딱히 제가 의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저희 빅토르 경에게 큰 장애가 있습니다."
그게 뭔 야옹이가 우는 소리야.
내 어이없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어도어는 말을 이었다.
"십오년 전, 당시 2황자를 호위하던 빅토르 경이 사고에 휘말렸습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했으나… 결국 2황자를 보호하지 못했고, 머리를 심하게 다친 상태였죠."
"비록 몸은 회복 되었으나, 한 번 손상된 뇌의 사고기능과 자각력은 돌아오지 않더군요. 그는 간신히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복잡한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근위기사에겐 크나큰 타격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황실근위대로서 2황자를 지키지 못한 죄까지 지었죠."
[저런.]
어느 기사의 기구한 사연이었다.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근데.
너무 길었다.
애당초 관심도 없었고.
[3줄 요약.]
나는 장문보다는 3줄 요약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런 내 말에… 시어도어의 미간을 파르르 떨렸다. 좀 화난 거 같다.
이내 표정을 고친 시어도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현재 빅토르 경의 뇌는 오우거와 비슷해 단순한 명령 밖에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 빅토르 경 같은 인재를 쓸 곳이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로 데려왔고, 그에게 부과된 명령은 '정해진 절차 없이 출입한 침입자를 죽여라'입니다. 참고로 절차는 연구진 3명 이상의 동행입니다."
시어도어는 완벽한 3줄 요약을 했다.
조금 뿌듯해보인다.
"그러니까. 적어도, 황실의 출입허가서를 들고 있지 않는 한… 저라도 죽일 겁니다."
일단 오랫동안 일해온 황실의 문장을 알아본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불쌍한 기사의 전부였다.
빅토르 경은 진정한 의미의 무지성이었다.
[…….]
한편,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도 그럴게.
근무 중에 사고를 당해 장애까지 생긴 것도 억울한데.
장애인이 되어서도 이런 지하까지 끌고 와서 일을 시킨다고…?
'…제국은 악마냐?'
사탄도 울고 가겠다. 이 납븐 놈들아.
악랄하기 짝이 없는 처사에 대해서, 두려워져서 몸이 덜덜 떨렸다.
만약에 내가 빅토르 경이었으면 차라리 죽여주기를 바랄 것 같다.
빅토르 경을 그냥 줘패는 게 답인가.
그보다 더 좋은 수가 있을 거 같은데.
"됐다. 이제 기다리는 건 신물이 나는구나. 지금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마."
레베카가 조바심이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걱정스럽다.
[하지만.]
"그대여, 나를 믿어라."
일말의 의심도 없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홀라당 반해버렸을 정도로 늠름했다.
나는 온갖 상념과 근심이 들었지만, 그녀의 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빅토르 예반.
그는 한 때 전신이 흉기라고 불리던 강대한 기사였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정신 또한 흉기가 되어 잊혀진 괴물이었다.
빅토르는 언제나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일과는 단조롭다.
틈틈이 수면을 취하고, 일정 시간이 되면 운동을 하며, 배가 고프면 창고에 저장된 건육과 물을 먹는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게 그의 삶이었으나.
그것은 삶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하나의 기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인간이었음에도 그랬다.
빅토르는 그 과정을 줄곧 반복해왔다. 허나 그 과정에서 권태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14년의 반복 속에서 죽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다.
잊혀진 기사의 나이는 올해로 서른아홉이었다.
"……."
그런 빅토르 예반의 삶은 방 안에 설치된 알람 마법이 울리기 전까지 계속된다.
만약, 알람이 울리면 그의 단조로운 삶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마치 지금처럼.
삐용삐용.
알람의 의미는 두 가지였다.
두번만 소리가 나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일과의 반복을 의미한다.
그 때는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을 안으로 보내주면 된다.
하지만.
삐삐삐삐삐삐삐!
이 요란한 소음은 그를 향한 절대적인 경고다.
이 곳에 찾아오는 모든 것을 배제하라는, 신이 내리신 과업이다.
그러므로.
삐삐삐삐삐삐삐삐!
이건 빅토르 예반이 지상에서 나락에 쳐박힌 뒤 처음으로 있는 일이다.
"크크크."
세상에 잊혀진 괴물은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그것은 어쩌면 웃음처럼 보였다.
**
시어도어가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꺼림칙한 느낌의 옅은 안개였다.
그리고.
중앙에 우두커니 선 하나의 시커먼 덩어리였다.
2미터를 거뜬히 넘어갈 듯한 철로 이루어진 형상이다.
그런 거인의 손에 들린 물체는 그보다도 거대했다.
'동상?'
아니었다.
갑자기 철로 만든 거인은 몸을 크게 뒤튼다.
그러고는 마치 수축하듯이 몸을 구부리며 한쪽 팔을 뻗는다.
그러자.
파아아앗.
기괴하고도 섬뜩한 소음이 들렸다.
그건 공기를 찢어내는 파공음이었다.
무언가가 날아온다.
마치 공간을 접어내듯이.
그건 순식간에 눈앞에 닿을 듯했다.
거대한 존재감에, 그 압박감에 꼼짝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검이었다.
그러나.
그건 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겁고, 그리고 조잡했다. 그야말로….
"피해라!"
레베카의 뾰족한 외침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몸을 날린다.
콰아아아앙!
그 자리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마치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등 뒤로 돌파편이 튀었다.
먼지를 일어나고 가라앉는다.
석벽을 뭉개고 깊숙이 박혀있는 것은 검이 아니었다.
무덤에 꽂아두는 비석처럼 거대한 무언가였다.
'미친….'
이딴 걸 쓰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베르세르크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두르는 가츠를 보며 조연들이 기겁할 만했다.
그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크기와 위력이었다.
비록 지금은 던져졌지만.
[테오! 괜찮냐?]
"사, 살았어요…."
"여전히 터무니 없습니다."
우리에겐 천만다행으로.
철로 된 묘비 밑에 파묻힌 시체는 없었다.
다만.
그건 장의사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고로 우두커니 서있던 철로 만든 관 자체가 움직였다. 그리고 묘비는 하나가 아니었다.
쾅!
그것은 그 거대함과 육중함에 비해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놈이 바닥을 찍을 때마다. 공간이 압축되고, 바닥을 포함한 천장까지 방 전체가 비명을 질러댔다.
굳이 비교하자면, 5톤 트럭이 풀악셀을 밟고 나를 짓밟으려고 달려오는 듯했다.
…죽음을 형상화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비로소 오금이 저린다는 게 뭔지 알았다.
피하지 않으면 좆된다는 걸 알면서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내 시선에 드리우며.
여리게만 보이는 호리호리한 등이 내 앞을 막아선다.
그러자.
붉은빛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오너라, 기사여."
애처로운 듯한 낭랑한 목소리만이 들렸다.
"네 안식이되어주마."
한 때 기사였던 여인이 검을 뻗었다.
**
묵빛과 붉은빛의 간극.
거기서 들려오는 굉음과 진동, 그 여파만으로도 몸서리를 쳤다.
키이잉!
콰아앙!
그 굉음은 고작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쳐서 생겨난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그건 인외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평범한 인간인 나는 그 원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저 괴이과 괴물, 생과 생이 마모되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초인인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저 영역에서 티끌만한 도움조차 되지 않는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팝콘이나 먹고 있을 수는 없었다.
[테오 먼저 진입하자.]
최소한, 레베카의 방해가 될 수 없었기에.
우리는 황급히 괴이가 지키고 있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괴이는 레베카에게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무탈했다.
문 너머에는 기분 나쁜 선홍빛으로 칠해진 외길이 있었다.
그곳은 바깥에서 보았던 꺼림칙한 안개로 뒤덮혀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통로가 그리 길지 않았다.
"저게 인간이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뭐 한쪽은 아닌 거 같지만."
시어도어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떠들었다.
죽을 뻔한 주제에도 주둥이가 살았다. 하긴, 놈은 원작에서도 수다쟁이였다. 그리고,
"알을 잃은 드래곤이 찾아오다니… 이것 참 아깝습니다. 성룡의 피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닫아.]
타인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데 천재적이었다.
내가 쏘아보고 있음에도, 녀석은 혼자서 중얼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것도 의문이군요. 천년 전을 계기로 모든 드래곤은 잠들었다고 들었는데…. 게다가, 알을 도난 당한 지 50년이 지난 작금에야 나타나다니. 흠,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이 곳 탐지…."
[시발, 아가리 닫으라고.]
이 짐승같은 새끼는 쳐맞아야지만 말을 듣나.
나는 입술이 터진 놈을 내려다봤다.
[야, 내가 너 같은 새끼 살려두는 게 예뻐서 그러는 거 같냐? 어디 한 번만 아가리 찢어달라고 떼 써봐.]
"…사양하겠습니다."
시어도어는 비척비척거리면서 일어났다.
테오는 움찔하며, 약간 겁 먹은 눈으로 나를 훔쳐봤다.
역시 재수 없는 놈이라도 사람을 패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았다.
기분이 무척 더러웠다.
[입 닥치고 협조하면 서로한테 좋다. 좋게좋게 가자 좀.]
시어도어는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20보 정도 걸었다.
곧 거무튀튀한 쇠창살로 막혀있는 방이 보였다.
그 철장 너머을 보자, 지금까지도 없었던 강렬한 기시감에 심장이 벌컥 뛰었다.
갑자기 혈압이 올라서 그런지 조금 어지러웠다.
내가 막 벽을 짚으려고 하자ㅡ
"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곳에는 마물이 있습니다. 혹여나 벽 쪽으로는 손을 대지 마시길."
문득 시어도어가 답지 않게 충고를 해주었다.
'그러고보니….'
방에 들어오기 전에 시어도어가 말했다.
이 곳에는 마나를 먹는 마물을 '가공'해서 사육하고 있다고.
막상 그 마물이 어디에 있나 했더니….
[…설마, 이 벽 자체가 마물인거냐.]
내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시어도어가 그렇다는 듯이 작게 미소를 띄웠다.
.
.
두근.
시어도어의 말대로.
선홍빛 벽은 말 그대로 살아있었다.
두근두근.
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들려올 때마다 두려워하는 듯이 크게 꿈틀거리며 맥박치고 있었다.
그건 빈말로도 괜찮다고 넘어갈 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히이익…!"
그 그로테스크함을 맞이한 테오는 기절할 것처럼 얼굴이 새파랬다.
역시 밖에 어린애를 숨겨두고 온 게 옳은 판단이었다.
이 꺼림칙한 안개는 벽으로 가공된 마물이 내뱉는 숨결이었다.
기분이 역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곳에다가 그 아이를 집어둔다는 발상 자체가 끔찍했다.
[…다음부턴 진작에 얘기해.]
나는 시어도어를 벽에다가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며,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한편, 놈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내 속을 뒤집어 놨다.
굉장히 불쾌했다. 뭐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에휴, 네 이복누이는 순순하던데. 하여간 삐뚤어진 새끼.]
내 말을 끝으로.
"……음?"
실실 웃고 있던 시어도어의 입가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쳐맞을 때보다도 더 격한 감정을 보였다.
"그게 무슨."
나는 놈을 테오에게 맡기고 앞서 걸었다.
줄곧 기다렸을 아이에게 오물을 보이기 싫었다.
눈앞에.
근 두달 동안 봐왔던 철창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이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그 아이는 여기서 지내왔다.
기억이 점점 되살아난다.
.
.
나는 잠이 들 때면 같은 꿈을 꾸었다.
작고 새하얀 여자아이가 나타나는 꿈.
헤헤, 어서오세요오.
처음 만난 그 날 이후부터.
그 아이는 나를 볼 때면,
슬픔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처럼 배시시 웃기만 했다.
피곤하시겠지만. 오늘은 다른 곳으로 놀러가봐요.
어느날 부터.
하얀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다니며 이것저것을 보고 들었다.
감옥의 창살,
작은 창문도 없는 공간,
철갑을 입은 무뚝뚝한 남자들,
검붉은 쇠사슬과 말라붙은 핏자국….
그녀가 알려주는 세계는 항상 무미건조했다.
거무튀튀한 철과 무표정한 석벽 뿐이었다.
나는 티 없이 웃는 아이에게 매번 의문을 품었다.
너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허나, 꿈 속의 나는 벙어리였기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깨어날 시간이 되면.
히잉, 벌써 헤어질 시간이네요…. 그래도 내일 또 봐요…!
그 아이는 울상을 짓다가, 이내 배시시 웃으며 내 손을 놓는다.
아….
그리고.
매번 잊어버렸던 그 수줍은 목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깨어났었다.
'이걸 잊었다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간다.
차갑게 식은 벌컥 철창에 매달려서 그 너머를 들여다본다.
거기에.
꿈에서 본 것보다 삭막한 풍경이 있었다.
초라한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낡은 동화책이 있다.
그것뿐이다.
이 방 안에서.
홀로 지내온 아이에겐 그게 전부였다.
나는 초라한 침대 위에 부풀어진 곳을 바라봤다.
[…너는….]
'너는 누구니?'
꿈속의 나는 언제나 네게 물었다.
설령 들리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그러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항상 외롭게 재잘거리던 너와 얘기할 수 있는 내가 있다.
이제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하며, 낄낄거리며 웃어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가면을 벗고, 힘껏 소리를 지른다.
그동안 미루어 왔던 것을 토해낸다.
"데리러 왔어!!"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아니라면, 들릴 때까지 고래고래 떠들어댈 것이다.
스스륵.
다행히도 내 목소리를 눈치챘다.
낡은 이불을 돌돌 감은 채로, 침대에 내려와 휘적휘적 걷는다.
졸린 듯이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그녀는 색깔을 빼앗긴 것처럼 온통 새하얗다.
단 하나의 색만을 제외하곤.
"후아암…."
꾸벅꾸벅 졸면서 도착한 뒤, 귀여운 하품 소리를 냈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가슴 속의 북받침을 소리로 만들어낸다.
"안녕."
내 목소리에.
"?!"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 번쩍하고 눈을 뜬다.
그러고는… 눈꺼풀을 다시 감았다가 뜨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오.'
덕분에 1초가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얘가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으니 뭔가 신기했다.
나는 그 반짝임에 향해 손을 뻗었다.
그 홀릴 것 같은 루비색을 향해서.
"데리러 왔어."
그런 내게 대꾸하듯ㅡ
"……!"
그녀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색이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이윽고, 예쁜 초승달을 그렸다. 늘 그랬듯이.
그러나, 이번에는 그 아이는 손을 뻗는다.
이제 이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빠….
그리고 나는 더이상 잊지 않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