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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58화 (58/117)

〈 58화 〉 드래곤을 유괴하다! (1)

* * *

드래곤을 유괴했다…!

는, 아직 완벽하게 성공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철창으로 막힌 방 안에 갇혀 있던 그녀를 꺼냈다.

"??"

철창 너머로 나온 아가용은 뭔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내가 신기하거나,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둘 다거나.'

나는 내 허벅지에 바짝 달라붙은 조그만한 녀석을 본다.

그녀는 루비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쉴새 없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의외로 호기심이 많고 성격이 유난히 밝아보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겉보기에는 이렇다할 트라우마나 문제점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작게 웃음이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속이 쓰렸다.

그동안 이 해맑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딴 곳에서 억눌러야 했을 그녀의 외로운 시간이 떠올랐다.

"에비, 그거 지지야!"

나는 선홍빛 벽을 징그러워하면서도, 묘한 관심을 보이는 녀석을 기겁하며 끌어안았다.

…아구, 쪼그마한 게 용감하기도 하네.

뭔가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병아리를 보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나는 내친김에 그대로 팔을 고쳐서 편하게 안기로 했다. ...뭐가 이렇게 가볍지? 그게 신기했다.

"?!"

한편, 그녀는 높아진 시야가 낯선 지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ㅡ

­헤헤.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이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엄청 잘 웃네. 그 때문에 나도 등신처럼 '흐흐….' 하고 마주 웃어주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 데이지.'

그러고보니… 얘랑 우리 꼬꼬마의 체격이 엇비슷했다.

그래서 그런지 데이지를 처음으로 만나서 데리고 나왔을 때가 생각났다.

이제는 나름대로 추억이 되버린 기억.

동시에 불쾌한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걔도 천조가리만 덮고 있었는데.'

이 세계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인간말종인지.

어린애에게 옷을 입히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버리지 같은 새끼.'

나는 한쪽 구석에 짜져있는 시어도어를 쏘아 죽일듯이 노려봤다.

살벌한 내 눈빛을 본 버러지가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도 위대한 분이십니까? 그, 혹시… 보호자이십니까?"

이 새끼가 모라는거지?

"실은, 해츨링, 아니 따님 분이 저희가 주는 옷이나 기구를 전부 거부하셨습니다. 저희도 드래곤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다만…."

시어도어는 드물게 식은땀을 흘리며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아서 생각하라지.'

딱히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따위 끔찍한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봐도 애들의 정서 교육에 긍정적이지 않은 장소니까.

한편.

"……."

내 어깨에 턱을 얹은 아가용.

그러니까, '레일라'가 살아있는 벽을 빤히 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은 망각하기에 힘든 과거조차 아름답게 승화하며, 현재를 낙관할 수 있다. 반면,드래곤은...

문득, 나는 용이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슬며시 손바닥을 루비색 눈동자 위에다가 드리워 그늘을 만들어냈다.

"?"

착하게도. 레일라는 시야를 막은 내 손을 쳐내지 않고.

그저 제 작은 머리통을 살짝 비비는 것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잠깐만 눈 좀 붙이자."

­끄덕, 끄덕.

오.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아가용은 엄마용보다 대인배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미운 애보다 착한 애가 귀엽다니까.'

어디 사는 까칠한 댕댕이랑은 비교조차 할 수 없구만.

나는 여린 등을 리듬감 있게 두드려가면서 밖으로 나섰다.

때마침, 공동에 울리던 굉음과 진동도 멎었기 때문에.

또 내 안의 감각이 레베카가 무사하다고 알려주었다.

'드디어.'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나는 환하게 웃을 지, 슬퍼할 지, 아니면 어려워할 지 모를 서툰 용의 미소를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한편….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레일라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

흑철로 만든 전신갑옷.

그건 인간이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단단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대장장이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듯이.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의 투쟁 속에서 금도 가지 않았다.

이러한 신기에 가까운 갑옷이 있었기에.

빅토르 예반이라는 검사가 당당히 선두에 나설 수 있었다.

2황자를 습격한 강대한 자들로부터.

빅토르가 목숨을 부지한 것도, 절세의 갑옷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깨지지 않는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다.

허나, 거짓말처럼.

묵빛 갑옷은 산산히 부서져,

휑한 궤적에서 검붉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빅토르는 그 구멍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39년이다."

그가 세상에 나기를 어언지 39년이다.

검을 제 손에 쥔 나이는 5살.

크고 작게 20년의 세월 동안 생과 죽음의 경계를 거닐었고.

모든 것을 잊고 잃어, 나락에 추락하여 14년은 유령처럼 지내왔다.

"전부 잊었다."

다만, 그런 빅토르 예반에게 잊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동안 전장에서 쌓아온 기술과 경험.

마나를 다루는 초인들과 나란히 하는 강인한 육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족쇄였다.

한참 전에 죽어야했을 그를 지금까지 살게 했음으로.

그건 동시에 잊혀진 기사에게 남겨진 미련일지도 모른다.

"졌다."

전력으로 휘두른 검이 막혔다.

그동안 단련한 육체와 절세의 갑옷은 손쉽게 파훼당했다.

비로소 미련은 드디어 부서져 버렸다.

"…아아."

빅토르 예반은 그게 무슨 기분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고장나버린 기사에게 허락된 것은 많지 않으므로.

그래서 그는 단 하나만은 새기고자 묻는다.

"이름."

더없이 아름답고 강한 여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처럼 붉디 붉은 입술이 달싹인다.

"팬드래건."

200여년 전 맨바닥에서 기어오른 위대한 이름.

설령 미련한 몸이 되었으나,

빅토르는 동경했던 이름만큼은 잊지 않았다.

"영광이다."

빅토르 예반은 만족스러웠다.

**

적막한 숲 속.

곧게 솓아난 키가 큰 나무 위에 두 소녀가 앉아있다.

밤을 그대로 오려낸 듯한 검은머리의 소녀는 별빛을 바라보고.

맑은 하늘처럼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는 조그만한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다.

두 아이는 그렇게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겨울바람을 견뎌내고 있었다.

문득.

붉은 보름달 옆에 숨겨져있던, 작고 새하얀 별빛이 반짝거렸다.

그 선명한 반짝임은 밤하늘의 별을 이어그리고 있던 보랏빛 눈동자에 뚜렷하게 들어왔다.

'예뻐….'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아주 자그만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예뻐보였다.

그런데.

그 별을 바라보고 있으니.

뭔가 불안해지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힉!"

결국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데이지는 벌떡 일어났다.

속이 답답한 모양인지 조막한 주먹으로 평평한 가슴을 두드렸다.

"…모하는, …… 응?"

한편, 데이지라는 지지대를 잃어버린 바람꽃의 머리가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운다.

그런데… 하필 그들이 올라탄 나무는 지면에서 제법 떨어진 상공이었다.

졸음이 단박에 달아난 바람꽃은 저편의 아득한 어둠을 보았다.

"끼으…!"

기겁한 바람꽃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한참을 낑낑대며 허둥지둥거렸다.

다행히도 바람꽃은 팔다리와 꼬리를 전부 써서 매미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살았다.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십년감수… 하면 태어나지도 않았으나, 어쨌든 무척이나 안도했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자….

괜히 억울하고 슬퍼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흑…."

북, 북부의 늑대는 울지 않아.

고로 바람꽃은 울지 않는다.

"괘, 괜찮아?"

데이지는 몹시 뜨끔한 표정으로, 엎드린 채 끅끅거리는 바람꽃을 봤다.

안절부절못하는 손은 마치 죄스러운 파리처럼 보였다. 그녀 또한 자신이 지은 죄는 아는 모양이다.

잠시 후.

"야아악! 떨어질 뻔했잖아아아아앙!"

바람꽃이 송구스러운 표정의 데이지에게 서러움을 쏟아냈다.

…쪼금 찔끔한 거 같아.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일부러 더 씩씩거렸다.

"그, 그 미아내."

"미안하면 다야? 미안할 짓을 왜 해!"

"일부러 그런 거…."

"일부러가 아니면, 넘어가도 돼?!"

말재주는 없고, 죄만 많은 땅콩이었다.

데이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잘못해써."

"흥, 몰라! 일단 내려가서 얘기해. 여긴, 으으…."

이미 잔뜩 삐져버린 바람꽃은 한시라도 나무에서 내려가고 싶었다.

그녀는 더이상 높은 곳은 질색이었다.

"으응…."

데이지는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람꽃은 나무에서 내려갈 준비를 하며, 문득 생각난 것을 말한다.

"야, 땅콩. 근데 왜 그랬어? 너… 이게 몇 번짼 줄 알아!!"

순간, 울컥한 바람꽃이 빼애액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 깜짝 놀라서 깨어난 게 한 두번의 일이 아니었다.

참고로 그것들 모두 저 모지리 땅콩이 때문에 그랬다!

"…여기서 답답했는데."

데이지는 억울한 표정으로 꿍얼거렸다. 제 명치를 꾹 누르면서.

얘가 뭐라는 거지…?

바람꽃은 그런 데이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한다.

"됐어…! 넌 내려가면 죽었어."

그렇게 낑낑거리며 나무에서 내려가던 중.

"……??"

바람꽃은 데이지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멀뚱히 서있는 것을 꺠달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잔뜩 열받은 그녀가 빼액 소리를 지른다.

"땅코옹! 너도 내려오라고! 너 죽을래?!"

­주글래애애애!

10살짜리의 분노가 담긴 메아리가 적막한 숲속에 울렸다.

이윽고.

나무 위에서 어딘가 민망한 듯한 소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지… 나, 못 내려 갈 거 같은데…."

"뭐?"

쟤가 뭐라는 거야?

바람꽃은 확 미간을 찌푸리자,

데이지가 더듬더듬하며 진실을 고백한다.

"높은 곳, 무서워서…."

마치 고양이가 높은 나무 위에서 망부석이 되는 것처럼.

실은 데이지 또한 그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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