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드래곤을 유괴하다! (2)수정
* * *
주위가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자연재해처럼 몰아치던 것들이 거짓말 같았다.
불가해한 괴물들간의 폭력이 멎은 게 분명했다.
통로 밖으로 나서기 직전에.
Zz….
나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그 출처를 확인했다.
그건 새하얗고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내 품 속의 아이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작게 코를 골고 있었다.
'…잘도 자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다는 말처럼.
레일라가 세상물정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다.
물론 내가 얘보고 잠깐 눈을 붙이라고 말하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도 숙면을 취하실 줄은 몰랐다.
'특이하네.'
생애 처음으로 철창에서 벗어나서 탈출하는 순간이라고 하기에는 반응이 상당히 별났다.
이걸 태평하다고 말해야하나? 아니면 둔하다고 해야하나?
평범한 애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애당초 태생부터 남다르긴 하다만.
'얘를 어쩐담.'
나는 작게 피식거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있으면, 강제로 이별해야 했던 모녀의 감동적인 상봉일텐데… 이 상태로 괜찮을까 싶었다.
만약 얘가 떽떽거리는 댕댕이였으면, 바로 볼살을 꼬집어서 깨웠겠지만.
그에 반해 곤히 자는 아가용은 깨우는 건, 뭐랄까… 괜히 죄를 짓는 것처럼 양심이 찔렸다.
'바람꽃 1패.'
일단 깨우지 않고 이대로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회포를 푸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늦지 않다.
기쁨을 누리는 건, 아무래도 이런 지하가 아닌 하늘 아래서가 훨씬 보기 좋을테니까.
게다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벌써부터 긴장을 풀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주위를 살피면서 밖으로 나왔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무너진 공간과 거꾸러진 묵빛 거인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언제나처럼 붉은 여인이 서 있었다.
"레베카!!"
나는 굳이 큰소리를 내어 말했다.
막상 그녀를 보았더니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오랜 가뭄과 마주친 것 같았다.
대지가 말라붙어 쩍 갈라지고, 강과 바다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
한 때 삶의 의미를 잃고, 정처없이 사막을 떠돌아다닌 여인이 나를 돌아본다.
천년을 지새운 눈동자에 담기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또옥.
이윽고, 어디선가 빗방울이 떨어졌다.
단순한 말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흘러 넘친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폭우가 되어서 메마른 대지를 적신다.
점점 번지고 물들여, 그동안 쌓아온 뚝이 스르륵 허물어진다. 꽁꽁 얼어있던 빙하가 녹고 세계가 범람한다.
나는 그 감정의 격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파생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기 때문에.
단 하나만 확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 폭풍우는 지나가면… 그제서야 그녀의 세상은 풍요로워 지리라.
"얼, 레리… 꼴레리."
나는 볼품없이 끅끅거리면서, 한 손을 내밀어 그 일부를 훔쳤다.
이제 비는 충분히 내렸으므로.게다가 그건 내가 대신해서 흘려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그녀의 역할은 이게 아니다.
"울…."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 뿔이 난다던데,
그래도 지금만큼은 봐줄게요.
"……."
나는 그따위 썰렁한 농담조차 하지 못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덩달아 새어나올까봐…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젠가 말했듯이 서툰 말재주로 누군가를 달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별 볼일 없는 남자였으므로.
이럴 때는… 그 아이를 대하듯이 다독여 주었어야지.
그러니까... 배운대로 토닥토닥거리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위대하다고 불리는 존재 또한 평범한 어머니였다.
**
훌쩍.
…누가 코 흘리는 소리를 내었어?
나는 못 들은 척하며, 겨우 진정한 레베카에게 넌지시 물었다.
"안아보실래요?"
"그, 그래도 될까…."
뭔가 대형견이 병아리를 밟을까봐 지레 겁을 먹은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은 소중한 보물을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책망과 자식에 대한 죄의식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레베카는 의외로 소심하고 서툰 사람이었으니까.
"안될 게 뭐예요. 엄마잖아요."
나는 이 난리에도 곤히 자는 레일라를 떠밀었다.
그러자, 레베카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아이를 조심스럽게 받아 껴안았다.
"…정말 있었어."
그녀는 멍하니, 다시 축축해지는 눈빛으로 제 품 속을 바라봤다.
붉은색과 흰색은 확연히 다름에도 그 둘은 굉장히 잘 어우러졌다.
그 모습은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겐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가면을 다시 뒤집어 쓰고.
소외된 두 남자 중에서 희멀건 녀석을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쿵!
[말해. 이 새끼야.]
나는 시어도어를 멱살을 잡아 밀치며 나지막하게 윽박질렀다.
"무엇을 말입니까?"
[얘한테 무슨 짓 했냐고.]
근처에 레일라가 있어서 차마 내뱉지 못했던 의문이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새하얀 의태나 그동안 그녀에게 한 짓거리 등등…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지금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일단 한 가지만은 해결보고자 했다.
[왜 우리 애가 말을 안 해? 학습하지 않았다는 헛소리는 지껄이지 마라.]
꿈 속에서의 레일라는 능숙하게 말을 했다.
하물며 그녀가 언어를 모르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만."
[시발, 수작 부릴 생각이라면….]
"딱히 수작 부릴 것도 없습니다. 그건 제 전임자가 처리한 거라서 잘 모릅니다. 참고로 제가 이 곳을 맡은 건 2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멱살이 잡힌 시어도어는 괴로워하는 내색 없이 담담히 말했다.
[전임자?]
"예. 그 자가 태어나서부터 폴리모프 같은 고등마법을 쓰는 존재를 가만히 내버려둬선 안된다고 주장했더군요. 참으로 한심하게도."
시어도어는 진심으로 그렇다는 듯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내가 더 지껄여 보라며 멱살을 놓아주자, 그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꾸미며 말을 이었다.
"일단 해츨링은 부화하고 약 10여일 뒤에 목소리를 빼앗겼습니다. 기록을 보니… 혀를 자르려고 한 걸 간신히 막았다더군요. 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길. 그 시절에는 저는 연금술사도 뭣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30년도 더 전의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오히려 그걸 반대했을 겁니다. 마법을 탐구하는 자로서 드래곤이 구사하는 마법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매력적이니까요. 게다가… 망각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에게 미움받는 것보단 친교를 다지는게 훨씬 낫잖습니까?"
속이 뒤집어지는 이야기였다.
한편, 레베카가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시어도어가 죽는 꼴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묻는다.
[해결책은.]
"저주의 일종이니 시전자가 죽으면 풀릴겁니다. 아니면 해주하거나."
다행히도 영구적인 장애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해주 조건 또한 그렇게 까다로워 보이진 않았다. 드래곤에게 전자도, 후자도 실현할 능력이 있을테니까.
그럼, 이제 남은 건.
[그 망할 새끼 누구야.]
시어도어가 드물게 질색하는 듯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황궁의 대마법사. 프래드레이크. 미지를 경외하기보다 두려워한 겁쟁이입니다."
.
.
내가 평정심을 되찾고자 노력할 때,
"이제 제 차례입니까?"
눈치 없는 연금술사가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서 그를 노려봤다.
"이걸로 볼일은 다 끝나신 거 아닙니까. 그럼 제 차례지요."
시어도어는 동네로 마실 가는 것처럼 뻔뻔한 얼굴이었다.
진짜로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하나? 놈의 머릿속이 궁금했던 탓에 의문을 그대로 내뱉는다.
[내가 널 도울 거라고 믿냐?]
"지금도 살려두고 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누군지도 아는 것 같고. 좋게 좋게 갑시다."
시어도어는 심드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재수 없는 놈… 하지만, 녀석과의 대화만은 기분 나쁠 정도로 잘 통했다.
'싹수가 그른 놈인데.'
여기서 잘라내는 게 속이 시원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겐 시어도어의 조력이 필요했다.
레베카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지긋지긋한 지하에서 벗어나면 끝이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잠깐 머릿속에서 지워두고 있었던 것.
'12명의 실험체.'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을 잡았을 때부터,
연금술사의 공방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을때부터.
나는 그 존재감을 잊지 못하고 파편처럼 떠올리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모두 희생당하는 소년 소녀들.
그들이 이 암울한 나락 어딘가에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12명이나 되는 애들을 모두 데려가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한 명도 제대로 못 돌보는 주제에 12명이라니? 금방 탈이 나서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알면서도 무시하고 떠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곳에서라도 꺼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이런 놈이라도 필요했다. 나는 그들이 있는 장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까.
[계시의 아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이건 네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야.]
"…어째서죠?"
시어도어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모르긴 몰라도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동기를 부여해줄 필요성을 깨닫고 그럴싸한 이유를 떠든다.
[가짜 황태자에게 날개를 달아줄 필요는 없잖아.]
**
폐허가 되어버린 태초의 궁전.
먼지투성이가 된 헬리오드는 귓가에 울리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두근, 두근.
불규칙적이고 맹렬했다.
살면서 심장이 이렇게나 뛰었던 적은 처음있는 일이다.
그는 목을 조여오는 듯한 감각을 무어라고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답답하군.'
그건 '위기감'이었으나.
제국의 황태자에게 있어서 '위기감'은 너무나도 거리가 먼 단어였다.
배우지 못한 것은 헬리오드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해야할 것을 알았다.
무너진 궁전에서 성난 타국의 귀빈들의 투정을 받아 줄 때가 아니었다.
"마법사는 우선적으로 출구를 개척하라. 근위대와 시몬 대주교는 출구가 열리는 즉시 본인을 따라오시오."
.
.
헬리오드는 정예를 이끌고 도시 한폭판을 가른다.
준마를 타고 쏜살같이 달리면서도, 도시에 나도는 불온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태양이라고 경배하던 백성들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감히.'
제국에서 그 누구보다도 추앙받으며 살아온 그였기에 알았다.
저 눈빛에는 일말의 경외도 없었다. 그저 꺼림칙한 것을 보는 듯했다.
'감히 버러지 같은 것들이.'
헬리오드는 저 부정한 눈을 모두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은 하찮은 저치들에게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황위를 내어주지 않는 늙은 황제의 고집도,
불가해한 권능을 보였던 누이의 행방도,
앞뒤를 다투며 달려드는 타국의 귀빈도 아니다.
이번 사태가 끝난 뒤에 생겨날 여파(??)였다.
앞으로도 이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나갈 것이다. 자칫하면 제국의 존속을 위험할 정도로.
완벽했던 거대한 사자가 흠집이 보인다면,
굶주려온 개들은 단결하여 사자의 심장을 뜯으려 들 것이다.
'이대로 내어줄 순 없다.'
지금 뿐이다. 사태가 커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제국에 쏟아진 지나친 이목을 돌려야한다.
그러므로 개들이 만족할만한 고깃덩어리를 내주어야한다.
헬리오드는 그 살점을 도려내기 위해서 몸소 말을 이끌었다.
허나, 그의 예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대주교. 왜 문이 열려 있는 겁니까."
"…안토니오 주교가 없군요."
헬리오드와 시몬.
그들은 결코 열려있어선 안되는 문을 바라봤다.
끼이이이이...
지하로 향하는 통로에서 기이한 바람이 불어왔다.
불길하다.
헬리오드는 직감했다. 여기에 어떠한 원흉이 있음을.
"그대들은 주위를 지켜라. 개미 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나머지는 본인을 따라 전진한다."
부디 그대로 있거라.
헬리오드는 살벌한 황금색 눈으로 어둠 속을 노려봤다.
**
시어도어와 이야기를 끝내고 슬슬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아가…."
"??"
레베카에게 안겨있던 레일라가 눈을 떴다.
오, 드디어. 나는 모녀 간의 감동적인 만남을 생각했으나….
"…!!"
의외로 레베카의 품에서 레일라가 거세게 발버둥을 쳤다.
조그만한 게 저항이 제법이었다.
"에? 어어?"
그 탓에 레베카가 잔뜩 당황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딸을 품에서 놓아주어야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레일라가 다급하게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주변을 살폈다. 뭔가 찾는 눈치였다.
'뭐지? 화장실인가?'
아가용의 돌발행동에 모두가 관심을 집중하는 가운데ㅡ
"!!"
나랑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쪼르르 내게 뛰어왔다.
아무래도 내게 볼일이 있던 모양이다.
…어째서…!
어디선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탄식이 들렸는데….
어째 후환이 두려워져서 못 들은 걸로 해야겠다.
아무튼 그렇게 달려오나 싶더니ㅡ
털썩!
갑자기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바닥에다가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아가자기한 손가락이 단단한 돌바닥을 뚫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허나, 어린애답지 않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기에.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말리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건…."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형상을 보며 테오가 침음성을 내었다.
꾸욱.
그림을 완성한 레일라가 겁먹은 표정으로 내 옷자락을 당겼다.
나는 그녀를 달래며 그림을 보았다. 단순히 장난으로 낙서한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돌과 손가락으로 만들어낸 그림은 조잡했으나,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연옥의 문이다.
그 곳에 검을 든 기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위에 떠있는비틀린 태양이 무척 섬뜩했다.
아무래도 어린용은 무언가를 본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