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드래곤을 유괴하다(3)
* * *
글을 좀 읽어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건 자만이다.
내가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큰 줄기에 불과했다.
따라서 곁가지로 뻗어나는 세세한 것까지 파악하지 못한다.
나는 내 눈에 들어온 것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원작에서 서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지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매달린 어린용은 미지의 존재였다.
"……!"
레일라는 꺼림칙한 그림을 그려낸 뒤 자꾸만 불안해했다.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엔, 오목눈이가 잠을 자던 중에 악몽을 꾸고 놀란 것처럼 보였다.
이를 어린 아이의 치기어린 걱정이라고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공포영화에서는 어린애의 감을 무시한 자들은 모두 끔살 당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그런 이유보다도 뭔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지난날, 나와 레일라가 만났던 기묘한 꿈.
그건 단순히 꿈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꿈을 토대로 연옥의 복잡한 길을 외우고 있었다.
'…애도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는 눈치였고.'
일단 그건 내게 허락된 재주가 아니었다.
즉, 나 이외의…. 아마도 이 어린용에게 내가 모르는 신비한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연옥의 문.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비틀린 태양.'
추상적과는 거리가 먼 직관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버리고, 동그란 루비색 눈과 높이를 맞추었다.
"이 사람들이 여기로 오고 있어?"
끄덕끄덕!
마치 '정답이에요!' 하듯이 녀석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쩐지 캐치마인드를 성공적으로 마친 화가처럼 기뻐보였다. 답안을 맞춰서 다행이다.
"세상에! 그림 천재네."
헤헤.
내친김에 머리를 막 헝클어주자, 싫다는 기색없이 레일라는 방실방실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비행기라도 태워주고 싶은데….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애써 참아야 했다.
까드득. 으드득.
그리고,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무서웠다.
바람도 안 부는데 왜 한기가 드는건지….
문득, 시어도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냈다. 그는 조금 초조해보였다.
"언제까지 헛짓, 아니 시간 낭비를 할 생각입니까."
레일라의 그림을 믿는 건지, 나름대로 계산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지금 바로…."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놈을 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시어도어에게도 내가 알지 못한 능력이 있었다.
대충 거짓말의 유무를 파악할 수 있는 모양인 것 같긴한데….
그게 원작에서도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 세계에 개입하면서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어쩐지 원래부터 있던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자리아 황녀에게도 기이할 정도로 발달한 감이 있었으니, 이 놈에게도 뭐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불안감이 생겨났다.
역시 내가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온 거냐?'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
그에게도 내가 알지 못한 특출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
아무래도 정면돌파를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지금의 레베카가 진심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공간이 협소한 지하인데다가, 그녀의 곁에 보호해야할 대상까지 있었다. 무작정 왔던 길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럼.
놈들이 내려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처럼 그리 길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한참 궁리를 하던 도중.
문득, 존재감이 옅은 그림자 같은 소년이 눈에 밟혔다.
'테오를….'
계획을 바꾸기 전의 달갑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던 중,
"정문은 안될 거 같으면. 제가 아는 길로 갑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어도어가 나서서 말했다.
아는 길? 나는 신경쓰이는 단어에 곧장 되물었다.
그러자.
"연옥은 천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쥐굴 하나 정도는 생기기 마련입니다."
놈은 무슨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뻔뻔한 얼굴로 덧붙인다.
"뭐, 이건 제가 1년 전에 만들었지만."
**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아하게 머리를 한대 묶은 여기사가 보고했다.
그녀의 말대로, 1계층의 문을 지키는 골렘이 움직인 흔적은 없었다.
즉, 골렘에게 입장을 허락받은 자가 지나갔다는 의미였다.
"정말로 안토니오 주교가 온 모양이군요."
시몬 대주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아는 안토니오는 자신의 안위만을 중요시하는 한심한 자였다. 결코 험지에 발을 디딜 성격이 아니었다.
'…이딴 식일 줄이야.'
한편, 헬리오드는 제대로 된 경비가 하나도 없는 연옥의 작태를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국이 너무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나머지 기강이 허물어진 게 분명했다.
원칙대로 책임자에게 징계를 내리고 싶었으나.
그는 애써 화를 참고 묻는다.
"안토니오 주교에게 연옥을 들어올 동기가 있는가. 이를테면 교국에서 보낸 첩자라던가."
"그럴 리가 없지요. 그는 그럴 그릇이 못됩니다."
시몬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헬리오드는 눈웃음을 짓는 신부를 표정 없이 바라봤다.
"……."
"……."
두 남자의 침묵과 눈빛이 오고 간다.
이윽고, 황태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뗀다.
"아니, 그는 타국의 첩자일 가능성이 있다."
고요하고 선명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대주교는 눈웃음을 유지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헬리오드는 등을 돌리며 주위에 정렬한 기사들을 보았다.
충성스러운 도구이기에 그들은 제 주인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어느정도 명분은 필요했다.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안토니오 주교에게 황궁의 테러를 홱책한 혐의가 있다. 현재 그는 지하감옥에 공범자와 함께 숨어든 걸로 추정된다."
황태자는 그들의 면면을 일일히 들여다본다.
분노와 흥분, 소속감과 상처입은 자긍심, 제 가치를 높이고 싶은 온갖 욕망들이 낱낱이 보였다.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명한다.
[공범자는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이다.]
[감히 제국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뤄주어라.]
**
일단 시어도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왕이면 헬리오드와는 부딪치지 않는 쪽이 안전했다.
"서두르죠."
계획을 수정하고, 이제 방을 나서려는데ㅡ
타박, 타박.
갑자기 레일라가 허물어진 묵빛 거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빅토르라는 이름의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갇혀있던 새하얀 아이와 갇혀있던 검은 기사는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스르륵.
레일라는 그의 갑옷을 자그만한 손으로 쓸었다.
지저분하고 차가웠을텐데도 정성스럽게 매만졌다.
그건 어쩐지 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함께 갇혀온 불행한 기사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같았다.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으려나.'
나는 동화 두닢을 꺼내어 먼 길을 떠나야할 자에게 쥐어주었다.
이 세계에도 노잣돈의 개념이 있었으므로.
.
.
망자를 두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애가 어디갔어?"
연금술사의 공방에서 찾았던 꼬마가 사라졌다.
기절한 애를 꽁꽁 숨겨두었던 탓에 누군가가 데려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린 걸까?'
상당히 마른 꼬마였는데… 도망갈 기력은 있었나 보다.
어쨌든 그 탓에 상황이 난감해졌다.
지상에서 조여오는 황태자와 지하의 어딘가로 도망친 어린애.
이 상황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선택을 해야했다.
다수와 소수 사이에서 어느 쪽을 구해야하는가에 대해서.
이번만큼은 충동이나 감성이 아닌 차가운 이성으로 선택해야했다.
내 선택에 따라 걸려 있는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안일했어.'
이제와서 아이를 찾겠다고 시간을 쓸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의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최악의 경우에는 모두가 위험해진다.
내 안에 있는 저울의 추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으나.
나는 그 선택을 타인에게 미루고 싶었다.
허나, 겨우 딸을 되찾은 레베카에겐 떠밀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니까. 또한 15살짜리 애한테도 넘기는 건 더욱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한다.
"바로 출발하죠."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이가 사라진 빈 자리를 보며.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
2계층으로 내려오자마자.
헬리오드는 의외의 인물과 마주했다.
"사, 살려주세요!"
팔과 다리를 묶인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수녀였다.
연옥에서 탈옥한 죄인이라기에는 퍽이나 어울리지 않는 자였다.
헬리오드가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주교, 저자를 아시오?"
"…얼굴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몬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두고 성당에서 수행 중인 하급수녀라고 일렀다.
그런 수녀를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요요하게 반짝거렸다.
"저하. 안토니오 주교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헌데…."
제법 희소식이었다.
수녀의 근처에서 그들이 찾고 있던 인물이 발견했다.
다만, 안토니오 주교는 의식불명으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일격으로 흉골을 산산조각냈습니다. 이건, 무술을 배운 자의 짓입니다."
헬리오드는 보고하는 기사의 말을 새겨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백발의 연금술사는 지독한 몸치였다. 그 자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말은 즉슨.
'역시 다른 자가 있군.'
누군가가 제국의 비밀을 들쑤시려 하고 있었다.
가장 은밀한 곳을 허락없이 칩입했다.
'무엇을 노리는 거지? 설마….'
아직 침입자의 목적까지 명확히 알 수 없다.
헬리오드는 확신을 얻고자, 남아있는 목격자에게 묻는다.
"무엇을 보았는지 낱낱이 고하라."
"그, 그, 그…."
"본인을 기만하려든다면 산채로 끓는 기름에 튀겨주마."
"히끅, 으, 어… 수도사… 아니, 이단심판관… 그, 불길한, 아이들을 보호, 해야하셨고…."
젊은 수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붙였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턱이 덜덜 떨려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
허나, 헬리오드는 뚜렷하지 않는 문장 속에서 단서를 집어냈다.
그제서야 정체 모를 놈들이 무엇을 노리는 건지 명확해졌다.
"시오네 경, 2개 분대를 이끌고 4층으로 향하라! 그곳에 머리가 검은 아이가 있으면 보호하고. 만약 그들 곁에 거수자(?者) 있다면 모조리 죽여라. 황명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여기사를 필두로 20명 남짓한 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비록 인원이 3분의 1로 대폭 줄어들었으나.
수녀는 여전히 터무니없는 공포에 시달렸다.
어둠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2계층에서도…. 그녀에게 쏟아지는 황금색 눈동자는 지독하게 환해 보였기 때문에.
"사, 사살려…."
한편, 헬리오드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수녀에게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남아있는 자들에게 명한다.
[당장 이 자를 데려가 고문하라.]
그가 원하는 것을 들려줄 때까지.
산채로 뜯고 자르고, 찌르며, 태워라.
[너는 여신의 종을 꼬드긴 간악한 마녀다.]
**
남아있는 11명의 애들을 데리고 가고자.
나태의 죄를 권장하는 4계층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이했다.
"야… 파뿌리."
"저는 식물이 아닙니다만. 뭡니까?"
놈은 태평한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한편,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어린아이 손목만한 두께의 철창을 가리킨다.
그건 '계시의 아이'들을 가둬두었다는 공동의 입구였다.
그러나… 그 곳이 너무 맥없이 열려있었다.
"이거 원래 열어두는 거냐?"
"당연히 아닙니다."
"근데 왜 열려있어? 니들 원래 이렇게 허술해?"
"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내 물음에 시어도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 철창 안을 빤히 노려봤다.
문이 열려있는 것과 별개로 애들이 있을까 싶었다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레베카가 그건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이 공동 안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정황상 이곳에 갇혀있던 아이들이 자력으로 달아난 모양이었다.
어쩌면… 시어도어가 A12라고 부른 그 아이가 먼저 온 걸지도 모르겠다.
"그럴싸한 가설입니다. 4계층은 훈련시설로 개조한 터라 길이 단순하니까요."
시어도어가 지 혼자서 흠흠거리면서 납득하고 있었다.
덕분에 명치 한 대 세게 후려패고 싶은 걸 참아야했다. 어쨌든 놈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스노우볼 미치겠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필 황태자의 흑수(?手)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 이런 불상사가….
어린애 하나를 간수하지 못한 게 이 지경까지 번졌다.
후회스러웠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어떻게 하지?'
결국 다수도, 소수도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