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일촉즉발
* * *
철컥.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이윽고, 서너명의 기사들이 철창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하나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연다.
"공동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급히 떠난 흔적이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선두에 서있는 여기사가 물었다.
그러자, 추적술에 일가견이 있던 기사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곳에선 그다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 말한 기사가 발구름을 쳤다.
튼튼한 석재 바닥에 눈에 띄는 발자취가 남아있지 않았다.
"흠."
무뚝뚝한 얼굴의 여기사는 그의 난색을 이해했다.
넓고 복잡한 지하 감옥은 미로와도 같았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이 사람을 찾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낯선 환경에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황명까지 내려온 마당에 물러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인원을 나눠야겠습니다."
그들은 이 곳의 지리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섞어 흩어지기로 했다.
그들 중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기사가 중얼거린다.
"…짬이 낮은 게 서럽군."
연식이 가장 낮았던 그는 우울한 얼굴로 윗층으로 돌아간다.
바람직하지 못한 소식을 제 주인에게 보고하고자.
.
.
3계층.
연금술사의 공방.
그곳에는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섬뜩한 찬바람이 불었다.
그 원인 앞에서, 기사 하나가 거의 부복하다시피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문 앞에서 히텐슈타인 공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가지와 혈흔은 발견했으나… 그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
헬리오드는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의 실종에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나 당연하다듯이 공방에 처박혀 있는 자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그것도 속옷을 제외한 옷가지와 소량의 혈흔을 남기고.
그 흔적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사로잡혔군.'
시어도어가 살해당했다고 추정하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다. 굳이 옷을 벗길 이유가 없었으므로.
아마도 제압의 목적이거나 수치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소량의 출혈은 그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터다.
축제 날에도 지하에 처박혀 제 본분에 다한 연금술사는 운이 나빴다.
'역시 공범이 아니었나.'
한편, 헬리오드는 부하의 결백을 알게 되었음에도 인상을 펼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시끄러운 연금술사가 정체 모를 세력과 함께 있었다는 의미였다. 매우 꺼림칙한 정보였다.
"……."
그는 태평한 얼굴로 떠들던 백발의 남자를 떠올린다.
단 한 번도 충성스럽지 않았고, 오로지 제 이득만을 추구하여 움직이는 자였다.
평상시라면 대체할 수 없는 유능한 인재이겠으나,
현 상황에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순분자일 뿐이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못해서 유감스러웠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문제가 더 성가셔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런 헬리오드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먼저 4계층으로 내려보냈던 기사 중 하나가 찾아와 그에게 보고했다.
"…침입자와 보호대상의 행방이 모호하여 현재 수색 중입니다."
"……히텐슈타인은?
"죄송합니다."
"……."
정체 불명의 침입자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연금술사도,
계시의 아이도 찾지 못했다는, 불쾌하고도 불길한 소식.
뿌드득.
무능한 것들에 대한 분노로 혈압이 거꾸로 치솟는다.
허나, 헬리오드는 그 이상 분노할 수조차 없었다.
들끓는 위장과 달리 차갑게 식은 머리가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출입구가 하나 더 있다…!'
교만한 연금술사가 제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둔 쥐구멍.
헬리오드는 연금술사와의 거래를 위해서 그걸 눈 감아주었다.
'지금 뒤따라가는 건….'
너무 늦었다. 그리고 더이상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한 시라도 빨리 황궁, 아니 수도를 폐쇄해야한다.
헬리오드는 드물게 다급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장! 지상으로 복귀한다!!"
**
"아직 아무도 없군요."
뺀질거리는 연금술사를 따라 밖으로 나서자.
그곳은 웬 뼈다귀들과 이름 모를 괴물들이 가득했다.
그 기괴한 형체는 영화 속에서나 튀어나올 법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한 눈깔.
내 머리통을 쉽게 으깰 수 있는 날렵한 주둥이.
'시발, 깜짝이야.'
처음 그 형상을 마주했을 때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래도 긴장을 하고 있던 덕분에, 다행히 소리를 지르는 일은 없었다.
나는 간이 쪼그라든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뭐시여…."
"보시다시피 표본과 박제입니다. 지금 보고 계신 것은 다이어 울프로군요."
…얼빠진 시어도어의 말대로였다.
이 거대한 늑대는 겉모습만 그럴듯한 뿐이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뭐 이딴 악취미가 다 있나 싶었지만, 어쨌든 간신히 안도할 수 있었다.
"으으."
기겁한 건 나 뿐만 아닌 지 테오도 새파란 얼굴로 오돌오돌 떨었다.
한편.
"아아,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zz….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는 용마망과 그녀에게 안긴 채로 잠이 든 응애용은 예외였다.
어째 남자들만 초라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마주친 판타지 속 괴물들이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애당초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일단은 지상인가.'
연옥와 마찬가지로 끔찍한 곳이긴 하나, 어쨌든 그곳에서 탈출하기는 한 모양이다.
삐뚤어진 연금술사는 우리를 기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나는 시어도어에 대한 평가를 일부 수정하며 물었다.
"황궁 내부에 있는 박물관입니다."
"??"
"전하도 이 곳을 알고 있습니다만… 다행히도 여기까지는 고려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째서지?"
시어도어는 의심이 가득한 내 눈을 알아차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처음부터 배신자가 아니었잖습니까."
하기야... 황태자라도 바깥의 사정을 모르는 시어도어가 도망친다고 가정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여긴 저와 전하만의 비밀장소입니다.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진 않았을 겁니다. 뭐, 어쨌든 제가 없는 걸 눈치챘으면 이쪽으로도 사람을 보낼 겁니다."
멍청하게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는 어수선한 일행들을 추스렸다. 이제 정말 수도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끝이다.
그 말은 즉슨, 이 재수없는 연금술사와도 이별할 때라는 의미였다.
"야, 고생했다. 이제 가봐."
시어도어는 달갑지 않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제 몫을 다했으니 사지는 멀쩡하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 그럼 가시죠."
"…?"
마치 놈이 금붕어 똥처럼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다.
뭔가 하는 꼴이 석연치 않았다.
"너 집에 가라고.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이게 뭔 개소리야? 지가 반려동물도 아니고….
내가 짜증을 가득 담아서 쏘아보자, 놈이 태평한 면상으로 유지하며 말한다.
"저한테 빚이 있지 않습니까."
"……빚?"
"예. 제 기지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잖습니까. 당신들은 제게 빚이 있습니다."
시어도어는 자기가 채권자라도 되는 것마냥 말했다.
제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이 상당히 재수없었지만, 그리 납득하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에게는 나름대로 공로가 있었다.
그저 길 안내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 연옥 안에서 미련한 고민을 하고 있던 나를 대신해서 결단을 내렸다.
실험체들을 찾는 건 시간 낭비입니다. 이기적으로 당신의 양심이나 챙길 때입니까?
어차피 당신이 돕지 않아도 그들은 무사할 겁니다. 말미암아 헬리오드의 날개잖습니까?
시어도어는 사라진 아이들을 찾는 것과 이대로 탈출하는 중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내게 그리 말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그 신랄한 말에 떠밀려 후자를 선택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어쩔 수 없었다는 기제가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추하고 비겁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당신은 몰염치한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
5계층.
어린 용과 잊혀진 기사가 떠나간 방.
주인이 사라진 그곳을 차지한 어린 무리가 있었다.
"12호는 어때?"
한참동안 망을 보고 있다가 되돌아온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말했다.
그 소년의 목에는 숫자 4를 뜻하는 룬어가 적혀있었다.
"이제 십이호가 아니야 실비라고!"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소녀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그녀도 소년과 마찬가지로 11을 뜻하는 룬어가 목 언저리에 새겨져 있었다.
다소 날카로운 눈빛을 쏘인 소년이 우물쭈물했다.
"…우리한테 이름은 없다고 했잖아."
"좆같은 개소리야! 내가 이름이 없긴 왜 없어?! 지들이 뭔데!? 난… 나는…."
11은 말을 하다가 말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제 분에 못 이겨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자, 그 둘처럼 목에 숫자가 새겨진 아이들이 나서서 그녀를 뜯어말렸다.
"끄으으… 무거워어어…."
손쉽게 제압당해 바닥에 샌드위치처럼 깔린 11을 두고, 나머지들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얘는 맨날 이러네."
"여기 온 지 얼마 안됐잖아. 난 이해해."
4는 혼쭐이 나고 있는 11에게서 관심을 떼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십… 실비는 어때?"
"좀 전에 깨어났어."
"괜찮아? 여기로 와선 갑자기 쓰러지던데."
"괜찮대. 그냥 배가 고팠대. 지금 육포 먹고 있어."
…배고파서 쓰러진 거면 위험한 거 아닌가?
육포 같은 거 먹어도 괜찮을까….
4는 이래저래 할말이 많았지만 일단 끄덕거렸다.
어쨌든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이, 이제 앙 그럴게… 살려줘어어어….
뒤에서 조금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4는 잘 놀고 있는 애들을 흐뭇하게 보다가 목소리를 작게 낮추었다.
"…12호는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여기는 어디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돼?"
그는 묻고 싶은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무리들 중에서 눈치가 가장 빠른 4호는 지금까지 망을 보느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개인 훈련 때문에 잡혀갔던 12호가 3일만에 '혼자서' 돌아왔다.
그것도 감옥의 열쇠까지 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 미로 같은 곳의 복잡한 길까지 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12호는 많이 어려. 여기 온 것도 두 달 밖에 안됐어.'
가장 미숙한 애가 그들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다른 애들까지 구출하면서 이런 곳으로 이끌었다.
'…함정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은 일이었다.
허나, 이제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철창이 열렸을 때부터….
우리들은 12호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관성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묶은 2호가 '음~'하고 생각하다가 운을 뗀다.
"자세한 건 나도 못 들었어. 근데, 누가 실비한테 잠깐만 여기 숨어있으라고 했대."
"그, 그게 누군데?"
대체 어떤 사람이?
궁금해서 눈이 띄어나올 듯한 4호에게,
2호는 언제나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말한다.
"엄청 하얀 애라던데? 나중에 걔가 나가는 길도 알려준대!"
**
축제가 끝났다.
우리가 황궁을 빠져나왔을 때는, 도시의 분위기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살벌했다
황명이다! 지금부터 거리로 나서는 자는 척결하겠다!
마녀가 나타났다! 협조에 따르지 않는 자는 마녀의 추종자로 간주하겠다!
칼을 빼어든 기사들이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거리를 통제하고.
우악스러운 병사들이 민가를 강제로 열고 들어가 집안을 들쑤셨다.
횃불과 날붙이를 든 병력들이 검문소처럼 도처로 뻗어가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 만행에 분노했으나, 무력했기에 두려움에 떨면서 자세를 낮출 수 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어지간히도 급하셨던 모양입니다."
시어도어가 작게 휘파람을 불며 이죽거렸다.
이후에 있을 헬리오드의 곤경이 썩 유쾌한 듯 보였다.
"수도 전역에 쳐져있던 마력장이 강화되어 있구나."
한편, 전에 레베카가 말한 결계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나는 텔레포트를 선택지에서 지우고, 그녀에게 물었다.
"본체로 날아가는 건 안될까요?"
"음…."
레베카는 드물게도 꺼려하는 기색이었다.
"캐스팅을 마친 수백의 마법사들 앞에서 표적이 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준비된 마법사는 방심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쪽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의미였다.
시어도어가 지나가는 투로 슬쩍 말한다.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러고 앉아있을 시간은 없다.
손가락 물고 기다리고 있는 꼬맹이들이 성문 너머에 있으므로.
게다가, 오늘 안에 온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못 지키면 걔네들한테 무슨 소원이든 전부 다 들어줘야한다.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여신님의 이름을 팔아야할 것 같았다.
그동안 준비해온 것도 있고.
"테오."
지금껏 조용하던 흑발의 수인족 소년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용사의 후예에겐 저마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
신체가 재생된다거나 오감이 발달하는 등의 초능력.
데이지 같은 경우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테오는 그 능력의 스케일이 남다르다.
상황만 갖추어지면, 그 무엇보다 거대하고 빠르다.
"달릴 시간이야."
때마침 보름달이다.
오늘은 그를 위한 날이었다.
**
에이미는 여관의 대문을 걸어잠그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도시의 정경을 살폈다.
술렁거리는 불씨를 들고 있는 군대가 도시를 헤집고 있었다.
멀리서도 쇠붙이가 튀는 소리와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비명과 고함소리가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마녀가 나타났다!
음모를 퍼트리는 자는 목을 내어놔야할 것이다!
황녀의 성년식을 축복하던 호화스러운 낮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뒤숭숭했다.
"마녀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
여관에 놀러왔다가 오도가도 못하게 된 하인리히가 말했다.
에이미 또한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다만, 그들도 이게 심상치않다는 정도는 확신했다.
마가 끼인 것처럼 흉흉한 일들이 제국에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눈부신 빛줄기와 함께 거대한 황궁이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황태자가 기사들을 이끌고 황급히 도시를 질주했으며.
지금은 군대가 마녀가 나타났다고 경고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붉은 보름이 뜨는 날, 죄악으로 이루어진 자리에 여신의 개가 나타나 죄인을 심판하리라.]
그리고.
며칠 전부터 들려온 불온한 예언까지.
그건 말도 안되는 헛소문일 게 분명하지만….
하필 오늘은 붉은 보름달이었다.
문득 하인리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붉은 보름달은 여신님이 노하신 거랬어요. 분노로 새빨갛게 물든 눈으로 세상을 지켜보는 거라고."
"그게 뭐니. 난 처음 듣는 얘긴데. 방금 지어낸 거 아니야?"
살짝 겁이 난 에이미가 하인리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꾸한다.
"돌아가신 엄마한테 들었어요."
"어어… 그, 그럴싸하다!"
에이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동안 그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슬슬 내려갈까?"
에이미가 창문을 닫고 다락방에서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아우우우우….
어디선가 소름이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건 평범한 늑대의 하울링이라기엔 너무 커다랗고 선명했다.
그들이 다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을 때ㅡ
"저게 뭐야…!"
성벽만한 크기의 시커먼 무언가가 도시를 활주하고 있었다.
**
인적이 드문 숲속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나무 위에서 짜증이 가득 담긴 앳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기 때문이다.
"꼬, 꼬리 잡지마아아!! 나, 나 갈거야!! 내려갈 거라고오…."
제법 높은 나무에 올라간 바람꽃이 악을 쓰고 있었다.
한편, 그녀의 탐스러운 꼬리를 꼬옥 쥐고 있는 데이지가 수줍게 말한다.
"…나랑 있으면 안돼?"
표현이 서툰 아이의 진심이 담긴 고백이었다.
허나, 진실을 알고 있는 바람꽃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냥 내려가면 돼잖아….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에?"
아마도 세네 시간은 넘게 여기 있었던 것 같다.
굳이 힘들게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었음에도….
바람꽃의 당연한 말에,
데이지는 흠칫하며 웅얼거린다.
"그, 그치만 무서운 걸…."
높은 곳이 무섭다는 땅콩이의 양심 선언이었다.
제 꼬리가 볼모로 잡힌 바람꽃은 할 말이 무척 많았다.
'그럼 처음부터 올라오지 말던가…!!'
그러나, 이미 바람꽃이 한바탕 쏟아냈음에도, 궁지에 몰린 데이지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데이지라는 이름의 진드기는 콩알만한 주제에 대화보다는 힘을 선호하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도 힘까지 좋았다. 고향에서 또래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했던 바람꽃이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할 정도로….
"…이제 나도 몰라. 나 갈래. 땅콩이는 여기서 살던가."
"가지마…."
"아윽, 꼬, 꼬리… 세게 잡지 말라니까아!!"
"미안. 살살 잡으면 괜찮아?"
"응… 아? 아, 아니! 그냥 놓으래도!?"
유감스럽게도,
데이지가 바람꽃의 꼬리를 놓아주는 일은 없었다. 역시 혼자는 외로우니까.
'쟤네 저기서 뭐하냐?'
나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티격태격거리는 목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왜 저런 곳에 올라가 있어?
나무 위에다가 새살림이라도 차린 거야?
'영문을 모르겠네.'
원래 애들은 예측불허한 행동을 하는 법이니 그럴려니 했다.
뭐, 그래도… 내 생각보다 별 탈 없이 잘 놀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뭔가 섭섭하긴 했지만.
'조금만 놀게 내버려둘까."
어차피 지금 내려와도 주위가 어수선해서 챙겨주기 힘들었다.
그런고로 쟤네들은 조금만 있다가 불러야겠다.
"레베카. 어서 들어가요. 고생했어요."
"…그대야말로."
나와 레베카는 기절한 테오와 기절시킨 시어도어…
그리고,
곤히 잠든 레일라를 챙겨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길고 길었던 밤이 끝이 났다.
.
.
한편, 애타게 기다렸던 이들이 지나간 것을 모르는 두 소녀는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땅콩! 나 화내기 전에 적당해 해! …그으, 나, …마렵단 말이야…."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이제 놓아주겠지?
바람꽃은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상당히 급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ㅡ
"있지…."
데이지가 우물쭈물하며 다리를 베베 꼬았다.
바람꽃은 터무니 없이 불길한 예감에 오들오들 떨었다.
"실은, 나…."
이윽고, 데이지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렸다.
그녀가 나무에서 내려가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데이지는 일찌감치 한계였던 거다.
"서, 설마!"
바람꽃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땅콩이가 그녀보다 먼저 나무 위에 올라와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극악무도한 녀석이 길동무를 원한다는 사실을…!
"시, 시러어어!! 족제비이! 나 살려줘어어…!!"
절박한 소녀의 비명은 무척애달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