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1)
* * *
동쪽 하늘에 샛별이 뜬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고, 길고 혼란스러웠던 밤이 지나갔다.
불안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에이미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눈을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에이미를 포함한 제국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강제로 광장에 불러 나가야했다.
거동이 불편한 자를 제외한 모든 제국민은 광장에 모이시오! 엄명이오! 명령을 무시한 자는 발각될 시 제국법으로 벌할 것이다!
투구를 눌러 쓴 건장한 병사들의 눈치를 흘끔 보며, 에이미와 마찬가지로 밤새 불안에 떨었던 하인리히가 아주 작게 분통을 터트린다.
"이게 무슨 난리예요? 이거 완전 인권 침략인데."
"조용히 해."
그들 외에도 억지로 불려나온 수많은 시민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초토화된 건물과 도시 곳곳에 새겨진 파괴의 흔적을 보며 불만을 삼켰다.
옹기종기 광장에 모인 제국민을 앞에 두고.
몹시 피곤에 보이는 귀족이 임시로 만든 연설대에 올라와 장황한 법식을 읊었다.
이윽고, 귀족은 표정을 근엄하게 고치며 힘껏 외친다.
지난밤, 거룩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여신의 행세를 하며 음모를 꾸며온 간악한 마녀를 징벌하셨다!
……하여 제국민들은 더이상 의심치도,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라! 황태자 전하 만세! 만세!
에이미는 오열하는 귀족을 따라서 입모양으로만 만세를 외치며 지난밤을 생각한다.
'…그게 마녀의 짓이라고?'
황태자가 마녀를 잡았다고 말했으나, 그녀는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거대하고,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건 분명 개를 닮은 무언가였다.
…13일 뒤, 이 자리에서 마녀에 대한 정화 의식을 거행 하겠다. 이상!
목이 쉬어버린 귀족의 연설이 끝나고.
지친 군중들은 저마다 옅은 미혹을 품고서 새끼 거미처럼 흩어졌다.
"세상 참 무섭네요. 마녀라니… 이러다가 마왕도 나오는 거 아니에요?"
동생들에게 돌아가는 하인리히가 떠나기 직전에 농담처럼 말했다.
이 소년의 나이대에는 용사나 마왕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였다.
"에효, 그런 말도 마."
에이미에게는 썩 유쾌하지도 와닿지도 않는 주제였다.
"아무튼 피터 씨 말대로 집에 있기 잘했다. 휘말렸으면 큰일날 뻔했어."
"아. 그러게요. 그런데… 피터 형은 어디 있을까요?"
하인리히가 반가운 이름에 반색하며 물었다.
에이미가 살짝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글쎄? 보나마나 애기들이랑 놀고 있을걸."
**
…나는 잦된 것 같다.
화성에 낙오된 우주인의 말씀처럼.
그것은 내가 심사숙고하지도 않아도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물론 생존이 걸려있거나 하는 거창한 상황은 아니었다.
허나, 그럼에도 내가 위기상황이라는 건 변함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오줌 마려워…!'
금방이라도 지려버릴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위기상황이냐고 반박할 지도 모르겠지만… 당사자에겐 급박한 상항이었다.
'…팔이 안 움직여.'
뭔가가 내 양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팔이 마비된 것처럼 저릿저릿한 것을 보아하니 밤새 그랬던 것 같다. …팔베개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데 참 속상한 일이다.
이 또한 제법 익숙한 일이었기에, 내 한쪽 팔을 앗아간 범인 하나는 알 거 같았다.
그런데, 나머지 한 녀석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눈만 굴려서 그 범인들을 흘겨봤다.
'…까맣군.'
일단 오른팔에는 내가 예상한 대로 털이 새까맣고 조그마한 게 있었다.
그러나, 앙증맞은 생김새에 비해서 하는 짓이 아주 흉악했다.
무려 제 몸을 발라당 뒤집고, 흉기나 다름없는 통통한 배를 내 팔 위에다가 얹고서 숙면을 취하고 계셨다.
'잘도 자네.'
이렇게 자면 불편하지 않나?
얘는 한번씩 잠버릇이 별났다.
어쨌든 오른팔은 제대로 봉인 당했다.
어깨를 크게 틀지 않고서는 데이지의 마복()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듯했다.
그러나.
몸을 틀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왼쪽 팔에도 오른쪽과 비슷할 정도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 범인을 확인한다.
'…하얗군.'
이게 뭔 음양의 이치도 아니고….
이쪽에는 새하얗고 조그만한 것이 내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그것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두 손으로 꼭 쥔 채로.
'…얘가 왜 여기 있대?'
엄마랑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할 애기용이 어째서…?
…영문을 모르겠다.
어쨌든 데이지랑 달리 다소곳하게 잠든 모습은 천사같긴 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럴싸할 뿐… 이쪽도 하는 짓이 흉악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팔을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끙."
이러다가 어른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생겼다.
방법을 찾아야했다. 이 나이를 먹고 누구누구처럼 오줌싸개가 될 수 없으니까.
'… 이건 공명의 함정인가?'
뭔가 그럴 싸하다.
이건… 불쌍한 댕댕이를 함정에 빠뜨렸던, 은근히 영악한 꼬꼬마의 모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데공명… 가증스럽군.'
왠지 생각하면 할수록 데이지에겐 동기가 명확했다.
그건 간밤에 있었던 충격 실화다.
나는 오줌싸…, 아니 응애들한테 밑도 끝도 없는 원망을 받아야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냥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세상에… 마른 하늘에서 비가 내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게 나무 위에는 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기특한 이유가 있는 듯한데.
결론만 말하자면, 불쌍한 댕댕이에게는 나무 트라우마가 생길만한 희극 그 자체였다.
'나중에 소금 받아오라고 해야하나.'
흠칫!
……나도 모르게 생각이 삼천포로 가버렸다.
지금 남의 얘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했다간, 내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걔네들보다 위험해!'
꼬맹이들은 옷이라도 멀쩡했지… 나는 존엄과 옷을 동시에 잃게 생겼다.
그리고. 걔들은 나이빨로 실드라도 칠 수 있다지만, 나 같은 어른에겐 마땅한 변명거리도 없었다.
'수치심 100배.'
가끔 내게도 응애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허나… 결코 이런 방식으로 이루고 싶진 않다.
잘 자는 애를 깨우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슬슬 깨워야할 것 같았다.
살고 싶었던 내가 몸을 뒤척이자ㅡ
"……일어났구나."
방구석에서 시무룩한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내가 황급히 그 쪽을 돌아보자… 시든 콩나물처럼 우울한 표정인 레베카가 보였다.
…이 사람은 왜 또 여기있어?
"왜, 왜 여깄어요…?"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내가 잠긴 목소리로 물어봤다.
그러자, 레베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 아가가… 그대만 밤새 찾더구나…."
어르신께선 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게도 잔뜩 삐진 얼굴로 꿍얼거리셨다.
.
.
히잉….
하고, 우는 듯한 레베카의 축 쳐진 눈썹을 보며ㅡ
나는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기억을 떠올린다.
별무리 아래서.
모닥불 옆에서.
슬픈 표정으로 웃던 용에게 건넸던 하나의 약속.
나는 그녀의 행복을 되찾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언젠가 네명이서 환하게 웃는 날을 기약했다.
비록 인원이 좀 늘어나 버렸지만,
어쨌든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그녀가 환하게 웃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됐지?'
몬가… 뭔가가 달랐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상상해온 그림과는 거리가 있다.
"그대의 곁에선… 편히 푹 잠들더구나…."
지금 나를 보는 레베카의 붉은 눈이 상당히 복잡미묘해 보였다.
뭐라고 해야할까?
호의와… 시기질투, 그리고 슬픔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그런 느낌이었다.
"…인기가 많아서 좋겠어, 아주…."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귀기어린 레베카의 눈빛을 보고서 침묵하기로 했다.
"……."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어느 쪽도 좋은 선택지가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한 시가 급한 상황이어서 레베카의 도움이 필요했다.
"레베카, 저… 팔이 아파서 일어나려고 하는데요. 저랑 교대할까요?"
…나도 모르게 내 위기상황을 숨겨버렸다.
어째서인지 지금의 그녀에겐 내 약점을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 그렇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눈이던 레베카는
내 제안을 듣더니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쉽다, 쉬워.'
세계관 최강의 존재인데, 공략 난이도는 슬라임이나 다름없다.
뭐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으니 개이득이다만.
한편….
제로에서 시작하는 용마망의 육아 생활이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조금은 엄격해야할 엄마가 이렇게 헤퍼서야, 그녀의 딸랑구가 앞으로 어떻게 자랄 지는….
'아, 근데 해츨링한테도 사춘기가 있을까?'
"……."
…가져서는 안될 몹쓸 궁금증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부디, 그런 일은 없어야한다.
하나만으로도 벅찰 존재가 둘이 된다니….
"헤헤, 말랑하고도 따뜻하구낭…."
한편, 나는 내 자리를 차지하고, 바보같이 웃는 모지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레베카를 보고 있으니….
확신에 가까운 안쓰러운 예감이 들었다.
'앞날이 깜깜하구만.'
언젠가 약속한 대로 우리가 넷이 되었음에도,
육아보초 용가리가 울먹이면서 나를 찾는 일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