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2)
* * *
저택 안의 사람들이 죄다 늦잠을 잤다.
덕분에 아침은 거르기로 하고, 조금 있다가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세면세족 등의 볼일을 해결할 여유가 생겼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나 같은 경우에는 침대에 늘어져서 부족한 잠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의 피로가 남아있는지 몸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 이번에는 편하게 잘까.'
나는 으슥한 곳에서 숨어서 눈을 붙일 계획을 세우며.
잠이 없는 레베카에게 밥 먹을 때가 되면 깨워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내게 꿀잠은 쉽게 허락되는 게 아니었다.
"레베카. 나중에 저 좀…."
나를 본 레베케가 무서운 기세로 성큼 다가왔다.
이윽고,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단호한 어투로 용건을 말했다.
"마침 잘 나타났구나. 그대를 찾고 있었단다! 자, 어서 가자꾸나."
"예? 어어…."
뭔가 흥분한 기색인 레베카가 문답무용으로 나를 질질 끌고갔다.
나는 다소 강압적인 그녀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
목덜미를 붙잡힌 고양이보다 무기력했다.
그도 그럴게,
'…맞붙으면 필패…!'
저항하기에는 레베카의 피지컬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용가리 통뼈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 눈나에겐 나는 갓난아기보다 손쉬운 먹잇감일 것이다.
…실제로도 못난 용가리는 어린애들한테나 등신이지, 나에게만큼은 얄짤없었다.
'나도 애기할래….'
어쨌든.
그런고로 일단 레베카가 하자는 대로 따르는 게 현명했다.
괜히 까불다가 한 대 맞으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으니까.
'뭐 때문이려나?'
나는 걱정반 기대반으로 제 발로 걸었다.
.
.
제법 너른 방 안.
그곳에 구성원은 조금 별났다.
먼저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온 나, 피터.
그런 내 무릎에 앉은 채로 배시시 웃고 있는 아가용, 레일라.
우리를 흘겨보며 똥 마려운 개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천년맘, 레베카.
그리고….
정체불명의 구속복을 입고 있는 백발의 변태남,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까지.
그렇게 총 4명이었다.
방 안에 놓인 네모난 테이블을 경계로 두고.
나와 레베카가 나란히 앉았고, 그 반대편에 구속당한 시어도어가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조합인고…?'
나는 아직 영문을 몰라서 가만히 레일라의 방석 노릇이나 했다.
한편, 이 인원을 모은 레베카는 나와 레일라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시어도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네 놈. 좋은 말로 권할 때, 우리 아가에 대한 걸 이실직고 하거라."
아무래도 레베카가 자신의 딸에게 어떠한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걸 제외하고도. 50년만에 되찾은 자식에 대해서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리라.
비록 서툴었지만, 레베카 또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제 기쁨도 미루어 둔 채, 제 자식의 안부만을 걱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묘한 모임은 자식을 걱정하는 애타는 부모의 마음으로 인해 열린 거다.
"만일 우리 아가에 대한 걸 조금이라도 숨긴다면, …그 때는 그 값은 톡톡히 치루게 될 것이다."
침대 위에서 애들한테 구박받은 게 거짓말인 것처럼.
레베카는 어른스럽고 엄숙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한편, 나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언제 들어도 '우리'라는 표현은 참 애매모호한 것 같다.
...괜히 부끄럽고 싱숭생숭해진다.
나는 눈앞에서 까닥까딱거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으로 가지고 놀며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헤헤.
손가락 빗질이 마음에 들었는지, 레일라가 앞뒤로 작게 발장구를 쳤다.
내 정강이를 톡톡 두드리는 리듬은 흥이 생길 정도로 신명났다.
"…솔직히 어떤 것부터 말씀해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보던 시어도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정중하고 진솔한 태도였다.
"하여, 위대한 분께서 우매한 제게 하문하여 주십시오. 성심성의껏 진실을 고하겠습니다."
대충 시험 범위가 너무 넓어서 힘들다는 하소연이었다.
하기야, 50년동안 있었던 썰을 전부 읊을 수도 없는 일이니 이해는 갔다.
시어도어의 말에, 레베카가 자비롭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 단, 묻지 않은 것은 추후 문서로 작성하여 제출하라. 기한은 이틀을 주마."
"감, 감사합니다."
잔꾀를 부리다가 난데없이 과제를 받아버린 연금술사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자료 하나 없이 여백을 채워 넣으려면 고생 깨나 해야할 것 같았다.
.
.
"우선 우리 아가의 잦은 수면주기에 대해서다."
"예. 경청하겠습니다."
레베카가 묻고, 시어도어가 답하는 심문이 시작됐다.
이쪽은 느와르 영화가 연상될 정도로 진지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 쪽은 그런 분위기와 정반대였다.
웬 꼬마가 소리없이 꺄륵거리며 내 손이랑 놀고 있었다.
보리, 보리~ 보리... 싸알! 헤헤!
이건 뭐랄까...?
정숙한 카페에서 지루해하는 어린애랑 놀아주는 느낌이었다.
아앗! 손 딱 대! · o ·
쪼그만한 게 잘도 뽀작거리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게 괴로웠다.
지금 당장, 마카롱이든 파르페든… 매장 안에 있는 간식거리를 다 사주고 싶었다.
'볼이 빵빵하게 먹인 다음에 빵빵한 볼따구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아주 혹독한 망상을 하던 중ㅡ
문득, 나는 나와 레일라를 향한 뚜렷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왜들 그렇게 보세요?"
"아니, 잘 노는구나 싶어서."
반짝거리는 루비색 초승달이었다.
그걸 추한 질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순수했다.
"단란하시군요."
나를 보는 썩은 동태눈깔은 그저 음흉해보였다.
…갑자기 레일라를 데리고 탈주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몹시 불편해.'
그리고 부담스러워….
나는 이러한 심문 과정에 천진난만한 아가용이 끼어있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본인의 일이니 어린애라도 알 건 알아야 한다고, 용마망이 판단한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레베카는 상당히 깨어있는 자녀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니면 잠깐이라도 애랑 떨어지기 싫다거나.'
사실 그럴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았다.
아무튼.
여기서 내 역할은 이 귀염뽀작이를 돌보기인 듯했다.
물론, 얘랑 놀아주는 건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다만….
'…어쩌다가 내 포지션이 이렇게 됐지?'
빙의자로서의 번뜩이던 통찰력 같은 건 어디 갔냐?
이러다가 내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 같다…. 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잠깐의 해프닝이 끝나고.
시어도어에 대한 심문은 재개되었다.
"…비록 우리가 적지 않은 세월을 몽중으로 보낸다고는 하나. 나와 내 동족들의 유년기에 비해서, 우리 아가에게 들러붙은 수마는 미숙함을 감안하더라도 비정상이었다."
레베카는 유희 중인 해츨링은 폴리모프한 대상들과 유사하게 생활리듬을 조절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반해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 중인 레일라는 시도 때도 없이 잠들어버리곤 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레일라는 보통의 해츨링과 다르다.
레베카로서는 걱정스러울 만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해결방법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시어도어는 어쩐지 전문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레베카는 반색하며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인다. 자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어머니 그 자체였다.
"그게 무엇이냐? 어서 말해보거라."
갑자기 분위기가 요상해진다.
…이건 심문이라기 보단….
"우선 따님에게 나타난 증상은 40여년 전의 어리석은 자들이 따님의 부화를 강제로 앞당긴 탓입니다. 그 때의 후유증으로, 몸의 균형이 어긋난 것이지요. 불규칙적인 수면은 그 불완전함을 보충하려는…."
"무어라…!"
인간들의 만행을 듣다못한 레베카가 나지막하게 분노했다.
그나마 옆에 레일라가 있어서 이 정도로 참은 듯 보였다. …그런데,
꾸우욱.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은 듯이.
애꿎은 내 오른손에다가 분노의 꾹꾹이를 실전하고 난리셨다.
'아니, 왜 나한테 그래….'
그래도 나름대로 힘조절을 하는 모양이었다.
영 못 견딜 정도로 괴로운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만 수틀리면 내 손이 아작날 거 같아 겁이 났다.
눈나, 나 진짜 죽어….
나는 제발 진정하길 바라며 레베카의 손을 토닥토닥했다.
눈치껏 입을 다물고 있던 시어도어가 이 때다 싶었는지 다시 입을 연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말씀했다시피 이 점에 관하여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약장수 같은 연금술사의 말에 레베카가 미간을 모았다.
"네깟 놈이 무얼 할 수 있다는 게냐."
"이래봬도 저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연금술사이옵니다. 약재를 다루는 것에도 조예가 깊지요. 또한, 저는 그 누구보다도 자녀 분이 지닌 문제들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녀 분의 안정을 돕는 비약은 진작에 만들어 냈습니다. 제 자작입니다만…."
"…크흠, 어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예. 일단, 일각수의 뿔을 곱게 갈아……."
…기분 탓인가?
뭔가 심문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이건 뭐랄까… 애 엄마가 아픈 애를 병원에 데리고 와서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합니다. 만일 제 처방전이 들지 않는다면,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 휘황찬란한 주둥이, 담백한 태도와 전문적인 지식, 그리고 그럴듯한 면상 때문인지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 묘한 신뢰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하여간 사기꾼 같은 새끼.'
참으로 간사하기 짝이 없는 뱀의 혓바닥이다.
고작 주둥이를 털어서, 딸천재 용마망을 홀리려고 하다니…!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야, 뺀질이, 나도 하나 물어볼게."
나는 적당히 끼어들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말했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이었다.
"레일라… 우리 애는 왜 이렇게 하얀 건데?"
.
.
"음."
내 질문을 들은 레베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한 눈치였다.
저 불렀어요?
한편, 아가용은 제 이름을 불렀던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모노크롬처럼 하얀 단색 뿐인 레일라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색채로 나를 본다.
유독 선명해보이는 루비색 눈동자는 누군가와 빼닮아있었다.
분명하다.
이 아이는 레베카의 딸이다.
이 어린용의 어머니는 장미와 불꽃보다 붉은 용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레일라 또한 레베카처럼 레드 드래곤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랐다. 레일라에게는 그 편린이 잘 보이지 않았다.
루비색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전부 새하얬으니까. 레드 드래곤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외형이었다.
'이건 편견인가?'
하필 내가 드래곤의 태생에 대해선 알고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건 원작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이었다.
'혹시 아빠 쪽의 유전일까?'
문득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가설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러고보면.
나는 레일라의 부친, 그러니까 레베카의 남편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일단 레베카가 개인사를 먼저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거니와, 내가 대뜸 물어볼만한 소재도 아니었다.
'좀 민감한 주제 같았으니까.'
원작에서도 레베카의 남편이라는 자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거기에 어떠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그 주제를 피해왔다.
'그런데….'
…남편이 있기는 한가?
애당초 드래곤이 가정을 만들던가?
"흠."
…이제와서 생각하면 수상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럴 때는… 그 아이를 대하듯이 다독여 주었어야지.
저, 저저저게 무무무슨…!
문득, 지난 날에 있었던 의미심장한 회상과 묘하게 순진했던 반응이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의식하고 나니, 억제할 수 없는 지적호기심이 솟아났다.
특히나….
드래곤이라는 판타지 종족은 어떤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왔는 지에 대해서…!
'…궁금해…!'
결국 드래곤도 생물이므로 여타의 생물과 다를 것 같지는 않다만….
역시나 원작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이라서 무지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게 정답을 알려줄 만한 인재를 흘끔보았다.
레베카는 다소 진지한 얼굴로 고뇌에 잠겨있었다.
'대놓고 애아빠 물어보면 실례일까?'
나와 레베카 사이에 그 정도는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차마 진실을 물어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딱히 이렇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아무래도 내 무릎 위에 앉아있는 애가 신경쓰였다.
왜요, 아빠?
……뻐끔거리는 입모양이 딱 그거였다.
어째서 얘는 나를 아빠라고 착각하는 거지…?
호의가 가득한 눈망울이 너무 예뻐서 숨이 턱 막혔다.
'…돌겠네.'
차마 이런 아이 앞에서 진짜 아빠가 누구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 양심이 너무 삼각형이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일로 곤란에 빠져야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더욱 곤란했다….
'혼란하다, 혼란해.'
그 때였다.
머저리 같은 연금술사가 말했다.
"저기, 아버님?"
…누가 아버님이야?!
창창한 총각의 혼삿길 막으려고 작정했어!
나는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았지만ㅡ
헤헤.
"……."
좋다고 배시시 웃는 아기 앞에선 입이 달린 벙어리가 되어야했다.
…그리고 기분 탓인가?
깃털처럼 가벼웠던 레일라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았다.
'레베카, 따님의 호적이 이상합니다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 레베카를 슬쩍 쳐다봤다.
어쩐지… 자기 딸랑구랑 비슷한 얼굴인 그녀가 보였다.
"…….."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와중에, 시어도어가 이어서 말했다.
"이건 제 가설입니다만. 갓 태어난 드래곤의 색, 그러니까 속성은 부모의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후전적으로 노출된 자연의 마나에 따라 결정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해츨링이 부화했을 때, 곁에 그린 드래곤이 있다면, 그에게서 흘러나온 마나에 노출되어 그린 드래곤이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부모용의 유전보다는, 주위의 마나에 따라 자녀용의 속성이 바뀐다는 뜻이었다.
인간들의 손에 부화된 레일라는 다른 해츨링과 달리 부모용에게서 마나를 얻지 못한 셈이었고.
'비록 가설이긴 한데….'
제법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물론 시어도어의 말을 온전히 믿을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이건 가설에 불과하니까.
"과연 이치에는 맞도다."
레베카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별다른 반론없이 들어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진짜 드래곤이 인간에게 드래곤의 생리에 대해서 듣고 있는 모습이 좀 우스워 보였다.
'자기 일은 의외로 본인이 모른다는 걸까?'
어쩌면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대하기에 생긴 허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한 드래곤은 의외로 불완전한 존재였다.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만큼, 서로의 삶을 공유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드래곤이란 존재 자체가 극히 희소했으니까.
'…얘네들 서로 만나기는 하나?'
생각할수록 드래곤이란 종족은 독고다이 그 자체 같았다.
레일라의 부친에 대한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다.
'나중에 한 번 떠봐야겠어.'
꾹꾹
한편, 내 무릎 위의 아가용이 내 허벅지에다가 꾹꾹이를 했다.
슬쩍 내려다보니 지루한 듯 축쳐진 눈썹이 보였다.
'뭐가 불만이실까?'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이 그녀에게 막 재밌지 않은 모양이었다.
본인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데… 정작 당사자는 거기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하긴.'
세상에 나온 첫날부터 관심 없는 상담이나 듣고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실 만하지.
그것도 지하에서 지긋지긋하게 봐왔을 변태가 있다면 더욱 끔찍할 것이다.
나는 지루해보이는 레일라를 보며 물었다.
"심심해?"
끄덕끄덕!
알아줘서 기쁜 모양인지,
아주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드래곤이라도 애는 애라는 건가?'
얘가 문을 흘끔 보는 것을 보니.
바깥 나들이라도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것 참 공교롭게 되었다.
"너두?"
나도 똑같았거든.
그대로 레일라는 안아들고 그 자리에 일어났다.
"어디가니?"
내가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향하자, 레베카가 우리를 붙잡았다.
나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대꾸했다.
"얘가 화장실 가고 싶대요, 그치?"
도리도리.
얌마….
이럴 때는 고개를 끄덕여야지.
나는 당황을 드러내지 않고, 황급히 대사를 고친다.
"…제가요."
"그래, 바람 좀 쐬고 오려무나."
다행히도 레베카가 순순히 놓아줬다.
아무래도 그녀는 우리가 자리를 비운 틈에, 본격적으로 시어도어를 심문할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곧 있으면 레베카도 레일라에게 걸려있는 저주를 알아낼 것이다.
'뭐, 죽이지는 않겠지.'
녀석은 나름대로 레일라의 주치의 포지션이 된 것 같으니 목숨만은 건지겠지.
.
.
"다녀올게요."
헤….
종 잡을 수 없는 갈색머리의 청년이 평소처럼 웃으며 말한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새하얀 아이는 아직 낯설다는 듯이 수줍게 웃는다.
잠들지 않음에도.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오랜 용은 가늘고 길다란 속눈썹을 작게 떨며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다녀오렴.
왠지 입술을 열었다가는,
또 놀림을 받을 것 같았기에….
"……."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배웅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