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64화 (64/117)

〈 64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3)

* * *

겨울을 맞이한 숲은 적막했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고스란히 벗어둔 옷가지가 둘러본다.

은행잎처럼 빛나는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위를 걸었다.

사박사박.

소복하게 쌓인 낙엽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좋다.

그리고, 그건 숲의 배려처럼 느껴졌다.

낙엽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아이가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폭신했다.

파스락..

그녀가 내 옆에서 뛰엄뛰엄 걷고 있다.

작은 체구에 비해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니었으나, 한 발자국을 떼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

이 모든 것을 처음으로 마주했기에.

아이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잠깐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봐야했다.

단풍잎보다 붉은 눈으로 세상를 보고.

오밀조밀한 콧잔등을 살짝 찌푸려가면서 향기를 맡고.

겨울을 닮은 작고 새하얀 손을 뻗어 그 끝자락을 매만져야 했다.

­와아…!

나머지 한 손으로는 나를 꼭 쥐고서 이러저리로 이끌었다.

내 손을 가득 채우기에는 아직 작은 손이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익숙한 느낌이라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생각나네.'

꿈 속에도 이 아이가 나를 이끌고 다녔다.

그러고는 석벽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세계를 알려주었다. 허나 너무 삭막해서 썩 마음에 드는 곳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 때랑 똑같았다.

그녀가 나를 이끌고 내가 뒤따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

그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슉하고 쪼그려 앉았다.

조그만한 녀석이 더 작아진 바람에, 나도 삐걱하고 자세를 낮추어야 했다.

이윽고, 레일라가 나를 돌아보더니 한쪽을 가리킨다.

낙엽 위에 하얗고 귀여운 꽃이 두 개나 피어있었다.

­빠, 이게 모예요…?

새하얀 볼이 조금 상기되어 보기좋게 발그레 했고,

루비처럼 빛나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더욱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이 너무 예쁘고 부담스러워서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는 내가 알지 모르는 낯선 꽃이었다.

허나 모른다고 고백하기에는... 다른 한 쪽을 실망시킬 것 같아서 그나마 생각나는 것을 말했다.

"코스모스…?"

­코, 스모스.

레일라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나는 무심코 손을 세게 쥐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목소리도 예쁜 앤데.'

꿈 속에서 재잘거리는 아이가 생각났다.

제법 수다스럽고 쾌활한 편이었다. 또 오목조목 말하는 게 아주 야무졌다.

­헤헤..

한편, 레일라는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참 다행이다. 꼭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어서.

"데려갈까?"

­!!

정말 그래도 돼요?

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꺾여야하는 꽃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얘가 웃는다면 그걸로 충분히 값진 희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겨울이니까.'

나는 합리화하며 꽃을 꺾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귀밑머리에다가 꽂아주었다.

…서로 흰색이라서 그런가?

내가 예상한 것보다 조합이 썩 어울리진 않았다.

­……?

한편, 레일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리고 활짝 펴놓은 작은 손바닥이 조금 민망해 보였다.

나는 더 민망해지기 전에, 꽃을 빼내어 그 손 위에 올려놓았다.

"…원래 꽃은 머리에 꽂거든."

당연하지만 그런 문화는 없다.

허나, 순진한 아가용은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를 거짓말로 속였다.

아무래도 양심이 찔리는 일이었기에 다시 제대로 알려줬다.

다행히도 레일라는 화내는 일 없이 용서해주었다.

대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귀 위에다가 꽃을 꽂아주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예뻐요!

그렇단다.

조금 지친 나는 그루터기에 앉았다.

거기서 아가용이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도도도.

…지치지도 않는지, 짧은 다리로 쉬지 않고 쫑쫑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녀는 이따금 도토리나 예쁘게 생긴 돌, 그리고 웬 벌레까지 주워와서 내게 물어봤다.

몇 가지 기겁할만 한 게 섞여 있었지만, 어쨌든 보람찬 일이었다.

레일라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아이였다.

그리고, 이건 자신의 손으로 색을 채워넣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 미력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에 감흥이 생겼다.

어른으로의 역할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흠!"

나는 레일라가 내미는, 모자이크가 필요해보이는 거대한 것을 보며 숨을 삼켰다.

…이건 좀.

언젠가 뉘집 고양이가 사냥해온 전리품을 내게 자랑하던 일이 생각났다.

"…지지야."

그 때도 다리가 몹시 많은 절지동물이었다….

다리 8개까지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만,

이딴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놈들은 생리적으로 무리였다.

나는 그 흉측한 것을 앙증맞은 손에서 치워버렸다.

­에에!

레일라가 텅 비어버린 제 손을 보며 시무룩해했다.

그 모습은 마냥 귀여워 보였으나… 어쩐지 그녀의 손이 좀 찜찜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부터 씻겨야겠다.

­하아아움...

문득, 아가용은 크게 하품을 했다.

한바탕 쏘다녔더니 이제 졸린 모양이었다.

"어허."

하필 레일라가 그 손으로 눈을 비비려고 했다.

나는 황급히 레일라의 두 손목을 잡고 강제로 만세를 시켰다.

그러자, 치즈마냥 쭈~욱하고 축 쳐져서 늘어나버렸다.

나는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에 실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어깨를 다치게 할 것 같아서, 그냥 편하게 안아 들었다.

"밥은 먹고 자야지."

­끄… 덕.

아이고,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나는 실소하며 레일라를 부등부등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재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거의 기면증 수준이네.'

천사처럼 곤히 자는 모습이지만….

이는 건강상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기에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는 레일라가 잠든 김에 미루어 두었던 상념을 떠올렸다.

이 아이와 마주했던 신비로운 꿈에 대해서.

그리고 지하에서 그녀가 그렸던 기괴한 그림까지.

'모르겠군.'

나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비록 이 세계의 일부를 활자로 엿봤으나, 이 세계의 전부는 활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렇기에 모르는 것이 있다면 새로이 알아가야 한다.

이 아이처럼.

내 품에서 얌전히 잠든 레일라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이 또한 내가 모르는 미지의 존재였기에 조금씩 배워 나가리라.

'나중에 말을 하게 되면 물어봐야겠어.'

그 때는 꿈이 아닌 이곳에서 서로를 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

픽 잠들어버린 레일라를 데리고 복귀하던 중.

새하얀 눈밭 위에 내려앉은 낙엽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숲 속을 돌아다니다가 칠칠맞게 달고 온 모양이다.

"후우우."

남는 손이 없어서, 입바람으로 호~ 불어서 떼어내려고 했다.

헌데 머리칼에 조금 엉겨붙은 모양인지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면서 느낀 건데 그냥 손으로 떼어낼 걸 그랬다.

효율적이지도 않고, 머리카락에 침이라도 튀면 미안하니까.

그런데,

'조금만 하면 될 거 같은데?'

괜한 오기가 발동됐다.

그리고 쓸모 없는 건 알지만… 남자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이 그때였다.

"후우우!"

나는 무아지경으로 새하얀 머리카락이 날리도록 바람을 불었다.

헛짓거리인 건 알지만, 이걸 성공하면 무척 뿌듯할 것 같았다.

'…머리를 감겨주면 모르겠지.'

다행히도 피해자가 잠들어있으니 완전 범죄다.

내 얼빠진 기행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라…!

그 때였다.

"모, 모해…!"

어디서 어린아이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어느 10살배기가 떠오르고, 상당히 익숙한 혀 짧은 말투였다.

"…흡."

이윽고, 숨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가늘 게 뜨고서 주변을 둘러본다.

굵다란 참나무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게 분명하다.

'환청…?'

만약 그게 아니라면, 여기있는 참나무가 내게 말을 걸었나보다.

하긴, 판타지 세계에서 나무가 말하는 것 정도는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

…그럴 리가 있나.

이래봬도 내가 소싯적에 코난이랑 김전일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봤다.

고로 나는 목격자를 처리해야할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

"순순히 나온다면 옥수수를 삶아주지."

"……."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권유했어도 반응이 없었다.

옥수수 맛있는데….

"열 채소 안에 나오지 않으면, 오늘 식단이 초록초록해질 겁니다. 자. 해초, 상추, 오이…."

"아, 안돼!"

숫자 대신에 채소를 읊조리자,

새까만 녀석이 삐약하고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좋은 말보다는 협박이 잘 먹히나보다.

나는 약간 탄식하며, 나무 뒤에 숨어있는 꼬꼬마를 쳐다봤다.

­지이이….

어쩐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가 안고있는 새하얀 애를 보고 있었다.

'데자뷰…!'

지난날, 바람꽃을 데려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새로 데려온 고양이를 발견한 우리집 고양이의 반응이 생각났다.

"…걔 누구야?"

데이지가 잔뜩 심통난 표정으로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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