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65화 (65/117)

〈 65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4)

* * *

허접하게 나무 뒤에 숨어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자연스럽게 말해본다.

"뎃지, 이리온~ 우리 밥 먹으러 가자."

­흠칫!

데이지는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시, 시러…."

이내 저항 의지를 다지며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먹을 거에 껄떡 넘어가던 얘가 거부하다니… 부쩍 성장한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칫, 아깝네.'

앞으로는 먹을 거로 간단히 넘어갈 수 없을 듯했다.

우리 애는 그렇게까지 바보가 아니었나보다. 뭔가 대견하면서도 아쉬웠다.

"…누구야?"

한편, 내 유혹을 이겨낸 데이지가 재차 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말해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시위할 것처럼 보였다.

"어, 그러니까."

대답해주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팔에 힘이 풀린 탓인지, 곤히 자던 레일라가 불편하다는 듯이 버둥거렸다.

­히잉...

내가 자세를 편하게 고쳐주자,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어깨죽지에 얼굴을 묻고 다시 졸았다.

­헤헤….

뭔가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얘가 입이 헤벌쭉하다. 이러다가 침 묻을 거 같은데… 이러면 쌤쌤이려나?

아무튼.

나는 레일라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데이지를 보며 말했다.

"얘는 레베카의 딸인… 데…."

그런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

눈앞에 있는 우리 꼬꼬마부터 달래야할 것 같아서.

"데이지?"

"……모."

아이고….

짤막한 대답에서 숨길 수 없는 토라짐이 묻어났다.

'텼네, 텼어.'

나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작게 저었다.

감정을 제대로 감출 줄 모르는 어린애다.

고로 얼굴만 봐도 데이지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찌푸린 가지런한 눈썹은 언짢음이 가득했고,

언제나 반짝반짝하고 빛나던 자색 눈동자에는 그림자가 깊었다.

아직 젖살이 통하던 볼따구는 뽀로퉁하게 부풀었고,

덩달아 튀어나온 입술은 심술궂은 오리처럼 보였다.

…누가봐도 진또배기 삐순이였다.

얘를 달래려면 제법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풉."

명백한 위기 상황임에도, 나는 토라진 아이를 보며 작게 웃었다.

날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데이지의 감정이 썩 기꺼웠다.

뭐, 그게 내 위기라는 말은 변함없지만….

"뭐가 웃겨?"

데이지가 내가 웃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순하던 눈꼬리를 살짝 치켜떴다. …어째 하는 꼴이 집에서 자고 있을 댕댕이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걔한테 배운 눈치였다.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하는데.'

물론 바람꽃이 나쁜 애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애 입에서 육두문자라도 나오는 날엔…… 걔는 나한테 탈탈 혼나야할 것이다.

"화났어?"

"화, 안 났어…!"

화난 애들 특징, 화났냐고 물으면 더 화냄.

삐진 애들 특징, 삐졌냐고 물으면 더 삐짐.

'완전 화났네.'

미안한 일이지만.

새빨개진 얼굴로 부정하는 데이지를 보는 건 좀 재밌었다.

한편으로, 조금 고민스러워졌다.

이번에는 어떻게 얘를 달래야할 지에 대해서….

'이제 어쩌지?'

비록 데이지가 나를 잘 따른다고는 하나,

내게 서운함을 드러낸 전적이 몇 번 있었다.

레베카랑 노닥거리고 있을 때.

귀족한테서 다친 바람꽃을 구해왔을 때.

그리고… 여관 댁의 딸이랑 수다를 떨 때.

'특히 에이미 때는….'

…그 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중성화 수술한 누렁이가 부러울 정도였으니까.

'어쩐지 역경이 심해지는 것 같은데?'

…아마도 그건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도 썩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단 집에 가자. 밖에 있으면 추워."

추우면 또 쉬야 마렵다구.

가뜩이나 삐져있는 애를 놀릴 수 없어서 그냥 무난하게 말했다.

"안 추운데."

헌데 데이지가 맨땅을 보며 툴툴거렸다.

쓸데없이 오기를 부리는 모양새였다.

어쩔 수 없군.

"너 올 때까지 숨 참을 거야."

나는 전에도 써먹었던 레퍼토리를 시전했다.

레일라를 안은 채로, 괴로운 척 연기를 시작해봤으나….

"몰, 몰라."

데이지가 아예 보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얼씨구. 급기야 귀까지 막는다.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방법도 이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먼저 공벌레처럼 수그린 녀석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캬오오!

… 꼬꼬마의 뒤에 하악질하는 다크시니의 스탠드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귀엽게 생긴 것치곤 제법 표독스웠다.

대체 무엇이 우리 꼬마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아.'

잠깐 잊고 있었는데… 아침에 내 자리를 차지했던 용모녀가 생각났다.

그러고 나선 레베카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데이지를 살피지도 못했다.

…이건 내가 잘못한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사과부터 하기로 했다.

애한테 져주는 게 뭐 대수라고. 난 원래 머리가 가벼웠다.

"미아내."

내가 사과하자, 쪼그려 앉은 데이지가 나를 흘끔봤다.

이윽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더니 작게 꿍얼거렸다.

"…모가 미안한데?"

아.

이건 예상치 못한 건데…?

얘한테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

그 탓에 잠깐 당황해버렸다.

나는 당황한 채로 생각나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전부?"

"아닌데."

"잘 챙겨주지 못해서?"

"…나 애기 아닌데."

너 애기 맞거든.

그래도 따지지는 않았다.

따져봐야 본전도 못 뽑으니까.

이 상황을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일단정답을 넌지시 던졌다.

"…다른 애랑 놀아서?"

그런데.

세상은 참 불합리하게도.

이런 경우에는 답을 못 맞춰도 화내고,

"아, 아니거든…!"

…진실을 말하면 더 화낸다.

**

어찌저찌해서 애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허나, 결과만 말하자면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잔뜩 뿔이 난 데이지는 여전히 레일라를 경계했고.

아가용은 끝까지 꿈나라행이라서 둘이 친해질 계기가 없었다.

'차라리 자고 있어서 다행인가?'

생각해보니, 레일라가 깨어있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사회성이 모자란 우리 꼬꼬마에게 적극성을 바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한쪽은 이제 막 세상에 나왔고…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난제로군.'

이 상태로는 검정과 하양이 친해지길 바라는 건 어려워보였다.

아무래도 둘 사이를 원활하게 이어줄만한 연결점이 필요했다.

일단 애들 사이가 틀어진 문제의 발단인…… 아무튼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로, 남은 건 그 녀석 뿐이다.

항상 틱틱거리지만 은근히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니 그 역할로 제격이다.

"레베카… 애들 좀 봐줘요."

"응! 얼마든지 맡겨만 주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뻐하는 눈나에게 애들을 떠넘겼다.

곧 있으면 레베카가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난 몰랑.'

이건 대의를 위한 용의 희생이다. 애도하도록 하자.

걔는 어젯밤의 해프닝으로 하루종일 나를 피하려고 할 게 뻔했다.

그러므로, 작정하고 숨을 녀석을 찾으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했다.

나는 지체없이 조리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그곳에는,

"응, 피터잖아? 어서와, 무슨 일이야?"

"후후, 또 도와주려고 왔나봐."

그동안 먹는 걸로 길들인… 아니, 친해진 수인족 누나들이 있었다.

.

.

한 달은 제법 긴 시간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추스렸고,

나 또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솔 누님은 날이 갈수록 젊어지네요!"

"나참, 누님은 무슨… 그리고, 다 늙은 아줌마가 젊어지면 얼마나 젊어져?"

"글쎄요? 누가봐도 20대 초반인데요."

"그, 그런다고… 뭐라도 나올 거 같아? 크흠, 얘, 이거 먹어볼래?"

날카로운 눈매가 매력적인 솔이 살짝 발그레진 얼굴로 구운 고기 한 점을 내밀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솔솔~ 또 넘어간다, 또."

"우리 솔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인간, 이것도 먹어봐."

나는 강아지 귀가 달린 미녀들한테 이것저것 받아먹었다.

그동안 억센 북부의 여자들이 던지는 짖궂은 장난은 제법 면역이 되었다.

'사실 평범한 아줌마들이랑 똑같지.'

외모만 조금 다를 뿐이다.

이들 또한 젊어보인다는 말에 기뻐하고 웃는, 그런 동네 누나 내지는 아줌마였다.

"릴리 누나. 뭐 도와드려요?"

"헿. 나중에 어깨 좀 주물러줄래? 요즘 걸려서…."

이 세계에는 존대 문화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누나나 형, 언니와 오빠 같은 표현은 가족 간에만 쓰는 편이었다.

'하인리히나 테오도 내가 시켜서 형이라고 불렀고.'

이상하게 남자애들이 내 이름을 막 부르니까 좀 그랬다.

어쨌든 아줌마는 아줌마고, 아저씨는 아저씨였다.

그 때문인지 수인족 여자들은 '누나'라는 호칭을 어색해하면서도 은근히 즐겼다.

'그 때문에 쉽게 친해진 걸지도?'

뭔가 인기인이 된 것 같았지만….

가끔, 주변에 여자들만 있어서 곤혹스럽긴 했다.

감옥에서 구해온 20명이 넘은 인원의 성별이 전부 젊은 여자였다.

두드리 스펜서는 수인 중 비교적 다루기 쉬운 여자를 취급하는 노예상이었다.

놈에게 테오만이 예외였다.

'남자가 너무 없으니 괜히 불안해….'

괜한 실수할까봐 조마조마할 때가 있었다.

그 때문에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해야했다.

"너 왜 왔니?"

놀고 있던 내게 물어본 것은 솔이었다.

오해를 살만한 거친 말투였지만, 그녀는 표현을 잘못할 뿐 착한 사람이었다.

그 탓에 틱틱거리면서도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은 솔이었다.

참고로, 누나라고 놀리면 반응이 참 재밌는 분이다.

나는 슬슬 용건을 말했다.

"우리 까칠이 어디있는지 봤어요?"

"키킥, 우리 까칠이래."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모르겠지만….

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누님들이 깔깔 웃었다.

심지어 듣고 있던 솔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여긴 부담스러워….'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여자들의 시선은 뭔가 다른 의미도 부담스럽다.

게다가 나보다 힘쎈 여자밖에 없다….

"걔 내방에 있어. 오늘은 안 나올 거라던데… 그게 너랑 싸워서 그런 거구나?"

손쉽게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정보원에게 감사를 보내고,

그 이상 시달리기 전에 부엌을 나섰다.

**

­끼이익.

역시 숨어있었다.

그것도 배짱 좋게 침대 위에 있었다.

"솔 아줌…? …힉!"

나를 발견한 녀석이 잽싸게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런데 미처 집어넣지 못한 꼬리가 삐죽하고 튀어나와 있었다.

'그게 숨은거니.'

그렇게 완성된 게 동그랗게 말린 이불귀신이다.

이것도 언제 어디서 본 것 같다.

내가 손가락으로 이불을 콕 찔러본다.

­건, 건들지마….

흠칫, 하더니 이불 너머에서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쭈? 비협조적인 태도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지금 아쉬운 건 나였다.

건드리지 말라니까, 그건 봐주기로 하고 말로 했다.

"람람아, 나 좀 봐봐."

­말걸지마…! 저리가!

세상에.

이게 아주 앙칼졌다.

어제 일이 그렇게 수치스러운가?

사람이 가끔 급하면 나무 위에서 실례할 수도 있지….

'이러면 곤란한데.'

나는 정말로 곤란했다.

좋게좋게 어르고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얘는 착한 데이지랑 다르게 골려주고 싶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나는 참아야할 때 참지 못하는 편이었다.

내 주둥이는 손쉽게 열렸다.

"매미라고 알아? 7년 동안 땅에서 세월을 보내는 곤충인데."

­……?

대답은 없었다.

대신 복슬복슬한 귀가 쫑긋! 하고 튀어나왔다.

추운 지방 출신인 바람꽃은 매미를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매미는 말이야. 7년 동안 땅속에서 살다가 여름철 단 1달만 지상으로 나와. 그리고 그 짧은 생애 동안, 제 짝을 찾기 위해서 울다가 죽어."

나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교훈이 담긴 옛이야기처럼 말했다.

그 덕분인지, 굼벵이처럼 이불에 숨어있던 녀석에게도 조금 흥미가 생겼나보다.

"…그래서?"

역시나 슬쩍 내민 코발트색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담겨있었다.

상당히 뜬금없는 곤충 이야기지만, 그런 만큼이나 궁금할 것이다.

'낚았네.'

내 옛조상님들은 매미를 5덕이니 뭐니하며 교훈으로 삼았지만.

나는 여름철 해충을 교훈으로 쓸 생각이 없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오줌싸개들에게좀 짓궂었다.

"그런데, 얘네가 놀라거나, 천적에게 잡히면 말이야. 막 울어대~ 맴매! 맴~! 하고. 신기하지?"

"별, 별로?"

"흠... 그래? 근데 그것 말고도 하는 일이 있어!"

"응? 몬데?"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되묻는 댕댕이를 보며 실실 웃었다.

"막 놀라서 꽁무니에서 물을 발사해!"

"??"

바람꽃이 의아한 기색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 마냥 깜찍했다.

혹시… 내가 감동적인 일화라도 말할 줄 알았니?

"근데 여긴 겨울인데도 나무 위에 매미가 있더라고. 그것도 두 마리나……."

아...

...너무 나댔다.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인 모양이었다.

놀림의 정도를 조절하지 못했다.

­펄럭~!

이불이 스스륵 흘러내린다.

그러자, 그 밑에 숨겨져있던 것이 드러났다.

푸르스름한 머리칼과 풍성한 꼬리가 바짝 솟아있었다.

그리고.

서슬퍼런 눈동자가 무척 축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를 잘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다.

또, 잘 안 우는 애가 울어버리면…… 엄청 곤란해진다.

덕분에.

'아. 치열이 가지런하네.'

나는 바람꽃의 치아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몸뚱이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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