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5)
* * *
결국 나는 어제 주지 않았던 소원권을 팔아야했다.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간신히 우는 녀석을 달랠 수 있었다.
"나, 안 울었어…."
훌쩍.
…그래.
너는 안 울었다.
어쨌든 나는 코가 빨개진 바람꽃을 달래며 넌지시 말했다.
"코 풀래?"
녀석이 아직 물기가 남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아주 작게 끄덕거렸다.
한바탕 날뛰더니 기운을 다 쓴 모양인지 한풀 꺾여서 조신해졌다.
훌쩍*
어쨌든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손수건 좀 챙기고 다닐 걸.
이제와서 모양 빠지게 방을 뒤지고 다니기 뭐했다.
'어쩔 수 없네.'
나는 급한 김에 소매라도 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설마 여기에다가 코를 풀겠냐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패앵!
…풀더라.
한번 시원하게 팔뚝을 문 것도 모자라서… 시원하게 코도 풀어버렸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했으면, 얘도 나한테 쌓인 것도 다 풀어야한다. 진짜로.
나는 젖은 소매를 등 뒤에 숨기고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제 봐주라."
남은 한 손으로만 시무룩한 표정의 바람꽃을 토닥토닥했다.
의외로 녀석은 내 손길을 쳐내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내가 사방으로 뻗친 푸르스름한 머리칼을 쓱쓱 정리하는데, 그녀가 뚱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다음엔 안 봐줄거야."
이야~ 너무 무섭다.
나는 무시무시한 꼬마의 경고를 가슴 속에 새기기로 했다.
다 큰 어른이 유치하게 애를 너무 놀리기는 했으니까.
"알았어. 고맙다."
나는 금방 용서해준 바람꽃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는 수인족치고는 속이 넓은 아이였다.
'역시 은근 착하단 말이야.'
대견했기에 오늘 저녁은 얘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어야겠다.
댕댕이답게 기본적으로 고기를 선호하니 그쪽으로 메뉴를 정해야지.
보드라운 머리칼을 매만지며 딴 생각을 하던 중,
"흐응. 근데 왜 왔어어?"
바람꽃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웃을락 말락하는 녀석을 봤다.
'이건... 가능한가?'
본의 아니게 울려버려서 선뜻 도와달라고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었다.
헌데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 바람꽃의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겐 잘된 일이다.
나는 댕댕이가 기분이 좋은 틈을 타서 용건을 꺼내기로 했다.
"실은 부탁이 하나 있어서…."
**
내가 바람꽃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데이지와 레일라.
사회성이 부족한 두 꼬마가 친해지는 연결고리가 되어달라는 것!
원래 애들끼리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것이 제일 좋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두 아이가 쉽게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검은색이랑 하얀색이라서 그런걸까?'
두 꼬마의 생김새가 서로 대비적인 모습이긴 했다.
그 때문에 괜히 혼자서 지레 걱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가 중간다리를 해주는 편이 원활하게 친해지는 법이므로,
이 청탁은 마냥 나쁘지 않다고 확신했다.
"부탁 좀 할게."
내가 용건을 들려주자,
바람꽃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양이?"
…레일라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보면 얘도 별명을 짓는 것을 참 좋아한다.
수인족이 지니는 특징인가? 다른 수인족 누나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어쨌든 목적은 제대로 전달된 것 같다.
나는 끄덕하고 동의해주고, 본격적으로 댕댕이 꼬시기에 들어간다.
"응. 주위에 믿을만한 사람이 너 밖에 없네."
…근데 말하고 보니,
진짜로 믿을 게 바람꽃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ㅡ
10살짜리보다 말을 못하는 테오나,
애들과 연관성이 하나도 없는 수인족 누나들이나,
또 어떤 의미로 가장 못 미더운 레베카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애들끼리 해결하는 게 제일 낫지.'
~~
문득, 바람꽃은 귀가 쫑긋 세우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얀 얼굴에 자리잡은 작은 콧잔등을 실룩거리며 내게 되물었다.
"…나 밖에 없어? 진짜?"
전에 삐친 데이지를 맡겼을 때 느낀 건데….
얘는 은근히 기대받는 걸 좋아했다.
의외로 칭찬받는 걸 즐기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잘됐지.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그녀를 한껏 띄워주기로 했다.
"그럼. 역시 우리 람람이가 제일이지! 똑똑하고, 의리 있는 북부의 늑대잖아."
"흐흐흥."
칭찬을 고래도 웃게 한다던가?
그건 북부의 강아지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야, 꼬리 떨어지겠다.'
다소 신난 바람꽃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까까지의 울상은 어디가고, 기세등등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에효~ 내가 애기들 뒷바라지까지 해야하네."
"……."
무척 어이가 없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한 애기가 다른 애기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게 맞으니까.
문득 꼬맹이 셋이서 서로 챙겨주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뭔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웃긴 그림이었다.
'진짜 애가 애를 키우는 거네....'
나는 고생길이 훤한 바람꽃에게 왠지 모를 동료의식을 느꼈다.
역시 얘가 틱틱거려서 그렇지 심성이 곱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것도 댕냥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바람꽃은 시키면 잘하는 애다.
이걸로 사건 하나가 해결된 것 같아서 안심이 들었다.
'…나중에 결혼하면 애는 하나만 낳아야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잘 날 없다는 조상님 말씀이 맞았다.
이번 일 덕분에 뼈 저린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
후아암….
안심이 되었더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바람꽃이 앉아있는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자.
"끼약!"
몸무게가 가벼운 꼬마가 통하고 살짝 튀어올랐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녀석이 제 자리에 드러누운 나를 노려보며 구시렁거렸다.
"이거, 내 침댄데."
"미안. 자리 좀 빌릴 게."
"…씨, 그전에 누웠자나."
"에이~ 잠깐만 빌리자. 밥 먹을 때 같이 가게."
어차피 곧 있으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여기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떼우다가, 밖에서 밥 먹으라고 부르면 얘랑 같이 나갈 셈이었다.
내가 슬쩍 자리를 만들어주자,
바람꽃이 툴툴거리면서 그쪽으로 이동했다.
졸렸던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들 뻔했다.
꾸욱.
뭔가가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
별로 아프지는 않고, 애교로 누른 느낌이었다.
슬쩍 눈꺼풀을 떠보니,
새초롬한 코발트색 눈동자가 보였다.
"히, 근데 이번에는 뭐 줄거야?"
…영악한 댕댕이 같으니.
은근슬쩍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했는데 어림없는 모양이었다.
'소원권을 또 팔아 먹어야하나.'
그건 너무 남발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 대신 적당한 보상이 뭐가 있을 지 한 번 고민해본다.
'아, 그러고보니…'
보상은 아니고.
얘한테 알려줘야할 게 하나 있었다.
"댕, 댕아…."
"??"
나는 렘수면에 빠져 흐리멍텅한 상태로 말했다.
잘 안 들린 모양인지, 바람꽃이 제 귀를 내 쪽으로 가까이 댔다.
"뭐라고 했어?"
"…나중에…."
"응응."
"너네, 아버님… 만나러 가자…."
이제 우리들이 갈 곳은 바람꽃의 고향.
설풍이 불어오는 북부였다.
**
그럭저럭 즐거웠던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는 곧바로 저녁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왔다.
최근에 바쁘기도 했고 인원이 많아진 탓에, 내가 식사를 차릴 일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가끔씩 시간이 나면 식칼을 들곤 했다.
내 음식을 그리워하는 손님이 몇몇 계셔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도 그런 날이었다.
나는 옆에서 내 일을 거들어줄 일일 조수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나를 셰프라 부르도록."
"세, 프?"
"셰프!"
"쎄에프…!"
아아, 혀가 짧아서 슬픈 짐승이여.
나는 더이상의 미련을 버리고.
데이지의 머리칼를 가지런하게 모아서 한데 묶어 주었다.
뭐든 어울리는 애답게 포니테일도 썩 잘 어울렸다.
"헤, 목이 차가."
데이지는 제 머리스타일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개운해진 뒷덜미가 마음에 드는지 표정이 밝았다.
'화는 조금 풀려나보네.'
점심 때 바람꽃이 전담 케어해준 덕분인지,
아니면… 그 사이 까먹은 건지 몰라도 평소처럼 귀여운 꼬꼬마였다.
"우리 이제 뭐해?"
보랏빛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반짝거렸다.
화를 풀어줄 겸해서 주방에 데려온 보람이 있나보다.
"잠깐만."
나는 피식 웃으며, 내가 쌓아둔 발판 위에 데이지를 올려다 주었다.
준비해둔 널찍한 볼을 하나 꺼내고.
그 안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둔 돼지고기를 차곡차곡 담았다.
"이제 네 차례."
이 다음은 우리 꼬꼬마가 솜씨를 발휘할 차례다.
아마 이 정도라면 어린애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해 보이는 녀석에게 볼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으로 잼잼."
소스는 미리 만들어 두었으니,
악력이 센 우리 꼬꼬마는 고기와 양념을 버무리기 하면 된다.
"흐익."
데이지는 익숙치 않은 형체와 촉감에 조금 주저했다.
"괜찮아. 천천히 해봐. 얘 안 물어."
"아, 알았어…."
옆에서 계속 용기를 복돋아주자,
앙증맞은 손으로 그럭저럭 양념을 잘도 버무렸다.
"이제 됐어. 잘했어!"
"헤헤."
데이지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나는 볼에 천을 둘러서 감싸놓았다. 이제 기다렸다가 저녁에 굽기만 하면 된다.
"이게 모하는 거야?"
그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데이지가 내게 물었다.
하기야, 고기만 주물럭하고 끝났으니 어리둥절할 만했다.
'오늘은 금방 넘어가기도 했고.'
나중에 좀 더 크면 제대로 요리를 가르쳐 줘야겠다.
뭐, 얘가 원한다면 말이지.
"고기를 재워두는 거야."
"???"
뭐지?
갑자기 데이지가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 경악성이 담긴 눈이었다. 얘를 지켜보고 있는 내가 다 궁금해 질 정도였다.
"왜 그래?"
조바심이 나서 내가 물어봤다.
그러자, 데이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있지, 고기도… 자?"
"……?"
순간,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얘를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졌다.
'미치겠네.'
그래… 바보라도 좋아.
귀여우면 됐어.
"으응… 자, 잘수록 맛있져."
나는 입을 틀어막고 개소리를 지껄였다.
"아, 그렇구나…!"
데이지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아무래도, 그게 고기가 깨지 말라는 작은 배려인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