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6)
* * *
'아쉽네.'
마음 같아선 양념고기를 위한 자장가까지 불러주고 싶었다.
여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꼬마랑 함께.
그러나, 너무 짖궂게 놀렸다간 큰 코 다칠 수 있다.
…훗날 어른이 된 데이지에게 보복당할 지도 모르니까.
'업보는 적당히 쌓아야지.'
고로 장난 치는 것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나는 고생한 꼬꼬마를 치하하며, 이제 애들이랑 놀러가라고 권했다.
"수고했어. 어서 가. 친구들이 기다릴라."
이제 자연스럽게 데이지를 떼어낸 뒤,
2층에서 쓸쓸이 울고 있을 소년에게 가봐야겠다.
…존재감이 옅은 녀석이라서 다들 까먹고 챙겨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내가 죽을 끓일 준비를 하려는데ㅡ
"……?"
"??"
여전히 내 옆에 붙어있는 찰거머리가 신경 쓰였다.
왜 안 가니?
내가 빤히 쳐다보며 눈치를 주자, 데이지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무래도 얘가 또래 친구들보다, 나하고 놀고 싶은 모양이다.
꼬마들끼리 친해지길 바라고 있었기에 조금 곤란했다.
허나 한편으로, 어린애가 보내오는 간지러운 호의에 자꾸만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안 되긴 얼마든지 있어도 되지!
…라고, 허락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애가 잘 따른다고 해서, 언제까지 끼고 다녔다간 아이는 성장할 수 없으니까.
"람람이가 너 기다리는데? 걔도 너 없으면 심심해 할 거야."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어르고 달랬다.
그런데… 꼬꼬마의 반응이 내 예상과 달랐다.
"힉…."
어째서인지 데이지가 흠칫하고 움찔했다.
마치 죄 지은 다람쥐처럼 쭈글쭈글해 보였다.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니, 꼬마가 우물쭈물거리며 입술을 뗐다.
"털뭉치는, 나만 보면 자꾸 화내던데…? 나 걔한테 가면 또 혼나…."
얘가 왜 그러나 했더니….
어젯밤의 그 일 때문에 두 어린이 사이에 노란 앙금이 생긴 모양이었다.
데이지가 이렇게 잔뜩 쫄아있는 이유는,
어제 일을 담아두고 있던 바람꽃이 그녀를 박박 갈군 듯했다.
'음, 댕댕이가 화낼 만하지.'
이번만큼은 검은머리 꼬꼬마가 일방적으로 잘못했다.
바람꽃은 믿었던 땅콩이 때문에 봉변을 겪은 피해자니까.
"그니까, 오늘 피터랑 있을래."
얼씨구?
데이지는 이왕 털어놓은 김에 아예 드러누울 기세였다.
소심한 꼬꼬마치고는 제법 강경한 태도다.
'…얘나 댕댕이나.'
신기하게도 두 꼬맹이가 하는 짓이 좀 닮았다.
어려움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도망치려고 한다는 점이.
'누굴 닮았는지 현명하네.'
아무래도 내가 조금 착각했나보다.
우리 꼬꼬마가 내 옆에 남아 있으려는 의도가 마냥 순수하진 않은 모양이다.
어느정도 나를 피난처라고 여긴 게 아닐까?
"……."
한번 의구심이 싹트자, 데이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웠다.
저녁 준비를 도와했을 때… 녀석이 싱글벙글하며 따라온 것도 왠지 그런 이유인 것 같고.
"??"
한편, 데이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갸우뚱했다.
어쩐지… 이 순진무구한 얼굴이 오늘따라 잔망스러워 보였다.
'뭐, 그래도 별일은 아니네.'
그냥 댕댕이한테 혼나기 싫으니까 나랑 있겠다는 뜻이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만.
'괘씸하긴 하네?'
…왠지 모르게 배신감을 느꼈다.
앙큼하게 나를 이용하려고 한 꼬꼬마에게 살짝 매운맛을 보여줘야겠다.
"그럼. 이대로 애들 버릴거야? 버림받으면 걔들이 속상해서 울건데?"
"…엣? 으엣? 에엑!?"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냐는 듯이.
벙찐 데이지가 잔뜩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말을 잇는다.
"나라면 그럴 거야. 데이지랑 친해지고 싶을텐데, 데이지가 자꾸 피하면 속상할 거야…."
경험상 어린애들을 가르칠 때는 무엇보다 공감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어려운 말보다 쉬운 단어를 쓰고, 자신과 가까운 것을 기준으로 이해시켜야 한다.
'여기에 표정 연기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지.'
또한 애들은 의외로 어른이 흘리는 눈물에 굉장히 약하다.
이건 나보다 한참 어린 여동생을 상대로 충분히 검증해본 사실이었다.
게다가 나는 내 몸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눈물 정도는 얼마든지 짤 수 있는 남자였다.
"람람이가 불쌍해…."
침대 위에서 배를 벅벅 긁고 있을 댕댕이를 떠올리며,
내가 꺼이꺼이 슬퍼하는 시늉을 선보였다. 이는 '선즙 필승'이라는 이름의 전략이다.
몰래 눈가에 침을 바르자,
"그, 그그……."
데이지가 고장난 것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하얀 얼굴에 식은 땀이 삐질삐질 새어나왔고, 대굴대굴 굴러가는 보랏빛 눈동자에 습기가 꼈다.
'여기까지인가.'
나는 슬슬 멈춰야하는 순간임을 직감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완급 조절이다.
괜히 애가 울어버리면, 오히려 내가 독박을 쓰게 되는 수가 있다. 세상은 시커먼 성인남자의 눈물보다, 귀여운 여자애의 눈물이 훨씬 무거우니까.
아무튼 데이지의 얼굴를 살펴봤다.
…제대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얼굴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크흐응…. 그, 그래도 데이지는 착하니까. 친구들을 챙겨줄 거야. 그치?"
"으, 으응. 그치이…."
이거 말 그대로 울며 겨자 먹기다.
데이지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로 끄덕였다.
'아, 얘를 어쩌지?'
몬가 불쌍한데….
뭔가 놀리는 맛이 쏠쏠하다.
**
"나, 나 털뭉치한테 갈래…."
"응. 잘하고 와."
꼬꼬마의 어줍잖은 계략을 침몰시켰다.
데이지는 본전도 못 찾고, 다급하게 또래 애들에게로 돌아갔다.
'이렇게 어른이 되는거지.'
바람꽃이 잘 달래줄 거라고 믿는다.
걔는 슬픈 땅콩이한테 화낼 수 있을 정도로 독하지 못하니까.
나는 여유롭게 죽을 만들었다.
이윽고, 외톨이의 점심을 챙겨주고자 이층으로 올라갔다.
혼자서 서럽게 굶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좀 짠했다.
'불쌍한 놈.'
남자를 챙겨주는 건 남자 밖에 없지.
이 곳에 유일한 동료였기에, 앞으로는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줘야겠다.
게다가…
녀석은 내가 시킨 일 때문에 몸져 누워있는 것이기도 했고.
나는 복도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했다.
"잘 있냐?"
"아! …형이네요."
테오가 기쁘지만, 동시에 실망했다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는 드러누운 채 목만 까닥거리는 녀석을 보며 못내 미안해 졌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테오의 몸은 다소 만신창이였다.
온몸이 근육 파열이 온 상태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했다.
"몸은 좀 어때? 움직일만 해?"
"아뇨. 제 몸이 아닌 거 같아요."
성룡인 레베카의 피로 각성시킨 탓에 테오에게 부담이 심했다.
또 강력한 능력인 만큼 그 반동도 큰 것 같았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그래도 버틸만 해요, 흐."
그럼에도 테오는 뭐가 좋은 지 실실 웃었다.
나는 그런 녀석이 고맙고 미안해져서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착한 녀석.'
능력은 손오공처럼 무지막지하지만 심성은 그대로였다.
테오가 하루라도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얘도 고생한 주인공이니 휴식을 만끽 해야지.
"배고프지? 죽 먹을래?"
"와아, 고마워요."
역시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해서 한참 낑낑거렸다.
보다못한 내가 테오를 일으켜 주었다.
간신히 기대어 앉혔으나, 왠지 녀석이 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먹여줄까?"
"괜,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먹을 게요."
부끄러운 모양인지 기를 쓰고 사양했다.
그렇게 내 권유를 거절하고, 힘겹게 죽을 떠먹기 시작한 테오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역시 나라서 그런가?'
문득 내가 방문하자, 살짝 실망스러워하던 테오의 반응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린 모양인데…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저녁에는 데이지를 달래주고 있을 댕댕이랑 같이 병문안을 와야겠다.
'청춘이구만'
이건 내가 알던 원작의 러브라인과 다르긴 한데.
뭐, 우리 댕댕이 정도면 사춘기 소년이 충분히 빠질 만했다.
'…이거 재미는 장난감을 찾았구만.'
세상에 남의 로맨스만큼 재밌는 구경거리가 따로 없는 법!
나는 죽을 허겁지겁 먹는 풋풋한 소년이 바라보며, 참견쟁이 아저씨처럼 히죽거렸다.
그나저나….
뭔가를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음, 모르겠네.'
원래 생각이 나지 않으면,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거다.
그냥 기분 탓인 걸로 넘어가자.
**
"흐흥~♪"
점심을 먹기 전.
바람꽃은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다소 들뜬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꿀꿀한 기분이 거짓말인 것처럼.
거기에 이럴다할 이유가 있진 않았다.
그냥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 사실은 조금 있어.'
어쩌다가 소원권을 얻어서 그런 건 아니고,
머리를 쓱쓱 만져진 정도로 기분이 풀리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그녀 밖에 없다는 말은 코웃음이 날 뿐이었고,
그녀가 똑똑하고 멋지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흐흥. 별로야~♪"
게다가, 바람꽃을 진정 기쁘게 한 것은 따로 있다.
아까부터 그녀의 귓가에 맴도는 나른한 목소리….
너희 아버님 만나러 가자.
'아빠…!'
여기서도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지만.
바람꽃은 역시 고향이 그리웠다. 언제나 보고 싶고, 걱정되는 것이 가족이었으니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
바람꽃은 그 소식에 무척 기쁘고 기대되었다.
지금이라면 자신이 자랑하는 꼬리까지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나중에 이 은혜를 갚을 수 있게끔 가슴에 깊이 새겨두었다.
그러나,
"내, 내가 미아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아무리 은인이 부탁한 것이지만…
그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게 있었다.
"잘못해써…."
숨어다니던 땅콩이가 갑자기 나타나 사과했다.
바람꽃은 서슬퍼런 눈빛으로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데이지를 흘겨봤다.
'이제와서 사과하면 용서해줄 줄 알고?'
아직 그 때의 수모가 풀리지 않았다.
북부의 늑대는 원한과 은혜를 반드시 갚아주어야하니까.
그런데,
"흐, 미아내애…."
땅콩이, 얘가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색이 없지 않아보였다.
"……흥."
마음의 가시인 줄 알고 세워둔 것이 알고보니 부드러운 갈대였다.
바람꽃은 울먹이는 데이지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머, 뭐가 미안해? 나 괜찮거든? 자, 뚝해."
그 때문인지 본인도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한편… 바람꽃의 상냥한 목소리에, 여러모로 서러워진 데이지는 눈시울이 뜨근뜨근해졌다.
"힝…."
데이지의 눈물에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또래 친구의 이해심이, 위로가 필요했던 꼬마의 심금을 울린 것 뿐이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데이지는 친구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 이제… 안… 그, 럴게…."
감정이 격해진 데이지가 입술을 앙다물고 끅끅거렸다.
덕분에 바람꽃은 당황스럽고 난감해졌다.
"으겍, 아, 아니, 왜, 왜그래?!"
"흐읏, 내, 내가 잘하께에에……."
'뭘 잘한다고는 거야?!'
얘가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바람꽃은 끝까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껏 축축해진 꼬마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그 얼굴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착, 착한 내가 잘해야지.'
바람꽃은 황급히 생각을 지우고.
울먹이는 땅콩이를 살짝 안아주며 작은 등을 토닥토닥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해줬듯이.
.
.
이윽고.
조용해진 방 안.
그곳에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문득, 눈시울이 붉어진 소녀가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아내."
"아악! 이제 그거 그만! 미안하다는 말 금지야!"
바람꽃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털을 부르르 털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놀란 데이지가 순순히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런데 둘이 동시에 닫아버리자, 또 다시 침묵이 방문하려고 했다.
침묵이 싫었던 바람꽃이 급하게 화제를 꺼냈다.
"땅콩, 너 새로 온 애 봤지? 어땠어?"
어젯밤에 되찾았다는,
레베카 님의 딸이라는 여자애.
'되게 하얗던데.'
그 애를 옆에서 챙겨달라고 피터가 부탁했다.
바람꽃은 하양이와 땅콩이가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얼핏 보았을 뿐, 그 애와 제대로 만나볼 수 없었다. 오전 중엔 레베카가 그 애를 계속 끼고 다녔기 때문에.
'말을 못한다고 했지?'
피터가 그 애에 대해서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그 분의 딸답게 평범한 애는 아니고,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땅콩이랑 사이가 안 좋다고 했는데.'
바람꽃은 왜 그런 지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데이지를 재촉하듯이 쳐다봤다.
"둘이 싸운거야? 말 좀 해봐. 너 나한테 잘한다며. 벌써 이러기야?"
데이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뽀로퉁한 입술로 웅얼거렸다.
"…쪽 했어."
"뭐가?"
"피터가, 걔 머리에… 쪽 했어."
"??"
…이게 뭔 소리야?
바람꽃은 잠깐 벙쪄 있다가 데이지의 표정을 살폈다.
빵빵하게 부푼 얼굴이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뭐 대수인가...?'
으음, 잘 모르겠어.
뭔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바람꽃은 일단 땅콩이의 얘기를 제대로 들어보기로 했다.
"…진짜?"
"웅."
잔뜩 심통난 목소리. 땅콩이가 뭔가 보긴 본 모양이다.
바람꽃은 몸을 들썩이며, 귀를 기울일 준비를 했다.
"자세히 말해봐."
두 꼬마는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