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69화 (69/117)

〈 69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8)

* * *

­꿀꺽…!

뭔가 긴장되는 순간이다.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어쩐지 내가 젓가락을 드는 것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눈빛이다.

'아니, 언제부터 내가 총대를 멨다고.'

좀 당황스럽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격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린 기분이어서….

또 억울했다.

평소의 나는 권위적이거나 딱히 격식을 따지지도 않았으니까.

아니, 애초에ㅡ

'…난 미혼인데스….'

굳이 이런 무게감을 선행 체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스스로 선택한 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악으로 깡으로….'

나는 어떻게든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다만, 이 분위기에 음식까지 집어 먹는게 좀 부담스러웠다.

기미 상궁의 심정이 이러할까 싶었다.

이대로 먹었다간 음식이 목구멍에 걸리겠다.

그러나, 이제와서 젓가락을 내려놓기도 뭐했다.

어쩔 수 없다.

찰나의 고민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

"뎃지야~"

나는 첫술을 떠넘기기로 했다.

내가 제 이름을 부르자, 데이지가 갸우뚱하며 대꾸했다.

"응, 왜에?"

나를 빤히 보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엿보였다.

제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제법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얘가 수줍게 헤실거리니,

덩달아 웃음이 새어나온 나는 조금 높아진 톤으로 말했다.

"낮에 고생했으니까 먼저 맛 볼래?"

데이지의 코 앞에 잘 익힌 고기 한 점을 내밀었다.

그러자, 꼬꼬마는 앙증 맞은 코를 킁킁 실룩이다가, 이내 침을 훔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

나는 곧장 비행기를 운행시켰다.

몇 번 해본 일이었기에 조종이 제법 능숙해졌다.

데이지는 휘우웅~ 하고 날아오는 고기를 보며 조금 부끄러워 하다가,

"…아~"

곧장 작은 입을 열고, 아기새처럼 기다렸다.

나는 입술에 스치지 않고, 새하얀 치아 사이를 절묘하게 통과했다.

이윽고, 애타게 기다렸을 그녀의 혀 위에 살며시 놓아주었다.

나는 우리 고객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

다행스럽게도 애써 운전한 보람이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반짝반짝거리며 소리 없는 탄성을 내비췄다.

­콩콩.

나는 발을 동동 구르는 몸짓에 만족스러워져서 피식 웃었다.

"맛있지?"

"...마시써…!"

데이지가 오물거리면서 대꾸했다.

다 먹고 말해야하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 배부르네.'

매번 느끼는 건데….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이상하게 중독적이다.

내친 김에 하나 더 먹여볼까?

"원 몰?"

"원, 모…?"

습관처럼 데이지가 내 말을 따라했다.

비록 발음이 똑같진 않지만, 꼬마가 노력하는 모습이 아주 기특했다.

고로 노력에는 보상이 있어야한다.

'배부를 때까지 먹여 봐야겠어…!'

…나중에 애 버릇이 나빠지면 어떠하리….

지금의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무지성으로 새 비행기를 띄우려고 했다. 그런데,

­지그시….

강렬한 열기가 담겨있는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출처를 슬그머니 쳐다보니… 두 쌍의 루비색 눈동자가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중 높은 쪽, 그러니까 레베카가 가증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말했다.

"내겐 그렇게 말해놓고. 그대야말로 아주 꿀이 떨어지는구나."

…아무래도 저녁식사 때의 그 이야기 같았다.

나는 레베카에게 다른 아이들 앞에서 모녀 간의 애정행각은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었다.

"…크흠."

"이쯤되면 정말로 그대가 나를 견제하고자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의심이 되는구나…."

그, 그딴 쓸모없는 짓을 누가해요!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째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아가용의 상태가 이상했다.

­힝, 아빠, 아빠…! 나도….

잔뜩 울상이 된 레일라가 나를 애타게 보며 낑낑거렸다.

한편, 딸랑구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용마망의 어둠이 점점 깊어졌다.

아, 삽됐다.

나는 다급하게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게."

"…역시 세상은 가진 자들이 더하구나. 그렇게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내 아가까지 탐내다니… 이 탐욕스런…!"

…제정신이 아니다.

레베카가 서러움과 질투에 눈이 돌아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돼도 안되는 헛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아무리 나라도 드래곤이 이렇게 추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뭔가 살 길이 필요했다.

…삐친 그녀를 달래줄 만한, 귀엽고 깜찍한 애들이 필요했다.

­옴뇸뇸.

이미 고기 맛을 본 데이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식사 중이었다.

……나는 차마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어린애의 그릇을 뺏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 꼬꼬마가 상처 입은 레베카를 달래줄 거란 기대은 접어두는 게 낫지만.

'그럼, 남은 건….'

본래 레베카 전용이었던 댕댕이…!

그녀는 그동안 쓸쓸하던 용마망에게 끼를 부려온 숙달된 조교였다.

녀석이라면 뿔이 난 레베카라도 얼마든지 달랠 수 있을 거다.

나는 부탁하면 들어주는, 은근히 착한 댕댕이에게 말을 걸었….

"람람아."

"…아니야."

어딘가 반응이 미지근했다.

얘가 어디가 안 좋나?

내가 그녀를 슬쩍 살펴보며 재차 물었다.

"람람…."

"나 람람이 아니야! 유치해!"

갑자기 바람꽃이 나한테 땡깡을 부렸다.

덕분에 내게 달라붙은 시선이 떼쓰는 꼬맹이한테로 옮겨갔다.

"…족제비는 짜증나…."

주목을 받게 된 바람꽃이 빨개진 얼굴로 꿍얼거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지, 내 옆구리살을 꾸욱하고 꼬집었다.

'딱히 아프진 않다만.'

그 대신에 마음이 쓰라렸다.

람람아, 우리 좋았잖아.

분명 점심 때까지만해도 서로 웃고 떠들었잖아.

그리고.

나, 도와준다며?

믿는 댕댕이에게 옆구리를 꼬집힌 기분이 씁쓸했다.

'안 그러던 애가 왜 이러는걸까?'

레일라에게 제 자리를 빼앗긴 게 자존심이 상한 걸까?

아니면, 뜬금없이 나한테 섭섭한 게 생긴 걸까?

설마….

'얘도 고기가 먹고 싶었던 걸까?'

아니, 그러면.

그냥 먹으면 되는 거잖아…?

'나도 모르겠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고로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테오야… 형 너무 힘들다….'

사내 새끼가 보고 싶은 순간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이라면, 십탱도어까지도 환영해줄 수 있을 것 같다….

**

"자자, 애들아!"

반쯤 취한 느낌으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윽고. 회식 자리에서 건배사를 외치듯이 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이 음식은 레베카가 고생해서 만들었으니까. 다 같이 고맙습니다~! 하고 맛있게 먹자!"

"허…."

레베카는 그런 나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어이가 없어 보였고.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짠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이걸 동정받네.'

아무튼 레베카에게 공을 물려주자, 그녀도 조금 기분이 풀린 듯 보였다.

아직도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는 하양이는 제쳐둔다.

일단 가까이 있는 애부터 달래보기로 했다.

나는 턱을 삐딱하게 괴고 있는 바람꽃을 살펴본다.

심통난 얼굴이 어딘가 복잡해보였다. 대충 무슨 생각인지 짐작해봤다.

그동안 레베카에게 이쁨받는 것을 불편해 하더니,

사실 바람꽃은 그걸 즐겼던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얜 겉으로만 싫은 척하니까.'

은근히 응석쟁이 같은 녀석.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내가 레베카 몫까지 댕댕이도 챙겨줘야 겠다.

뭐, 결론은 난이도가 올라갔다는 의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인 법이다.

나는 지성을 내려놓고, 이 시련마저도 즐기기로 했다.

"이거 맛있다. 자, 아~ 해봐."

"애, 애 취급하지마."

제 아무리 바람꽃이 틱틱거렸어도.

고기 몇점을 들이밀자, 댕댕이 아니랄까봐 금방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애라서 주는 게 아니라, 람람이가 이뻐서 주는 거야 이뻐서."

"라, 람람이 아니라니까…."

나는 실룩거리는 강아지귀를 관찰하며 계속 집착했다.

이미 망한 거 용모녀의 눈칫밥은 가뿐하게 넘기기로 하고.

"피터. 그럼 나 줘!"

어...

선생님은 충분히 드신 거 같은데요?

얼마나 덕지덕지 먹었으면.

데이지의 입술이 기름으로 반질반질했다. 여기서 저 혼자서만.

'이러다가 굶게 생겼네.'

슬슬 나도 챙겨 먹어야겠다.

위장이 블랙홀 같은 아기새가 다 먹어버리기 전에.

보는 것만으로 배부르다는 말은 과장이니까.

어떻게든 식사를 시작하자,

다소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역시 먹이고 보는 게 답이야.'

배가 고플수록 사람이 예민해진다.

그러니, 밥을 먹이고 나면 어떻게든 해결된다.

나락까지 떨어질 뻔했다가 잘도 기어올라온 스스로가 대견했다.

­맛있어요….

한편, 아가용은 음식이 입맛에 맞는 모양인지 굉장히 잘 받아 먹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려는 저항도 포기할 정도로.

허나, 입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에 괜히 내가 다 미안해졌다.

오후 내내 얼굴을 비추지 않은 탓에 보채는 것 같아서….

'다 음 에.'

나는 입모양으로나마 레일라를 달랬다.

내 옆에 있는 꼬맹이들이 쟤를 신경쓰는 눈치라서 조용히 신호만 보냈다.

­아!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된 건지 모르겠지만….

새하얀 꼬마는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밥 먹을 떄는 웃어야지.

"흐응."

레베카가 그런 나와 레일라를 묘한 눈으로 번갈아 봤다.

…잘은 몰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눈나는 머리가 이상하니까.

'저녁 먹고 난 다음이 두려워….'

오히려 밥을 먹고 있는 지금이 낫다.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얘네들 식탁에 묶어둘 수 있으니까.

허나, 그 밧줄이 사라진다면?

'…몰라레후….'

지금의 나는 무지성이다.

머리 아프게 미래 따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줄어드는 접시 위의 음식을 보며, 다가올 운명을 기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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