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70화 (70/117)

〈 70화 〉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법(9)

* * *

우여곡절 끝에 저녁 식사를 마쳤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 모를 정도로 힘겨운 저녁이었다.

고작 어린애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파급력이 만만찮다.

나는 살짝 진이 빠져서 멍하게 의자 위에 늘어져있었다.

'…명절날 같다.'

한 때 철 없는 사촌 동생들을 돌볼 때가 생각났다.

내 방에 무단침입해서 마구잡이로 헤집던 악마 같은 자식들….

그 싸가지 없는 사촌들과 비교하면, 우리 애들은 뭘 하든 귀여워서 견딜만 했다.

그러나 막 다뤄도 되는 사촌 놈들과는 달리,

세 꼬마들을 챙기는 것은 그보다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하나같이 사연이 있는 애들이다 보니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다같이 친하게 지내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두 녀석은 아직 뉴페이스를 어색해 했다.

서로 초면이니까 충분히 그럴 만 하다. 하루 이틀 정도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엔 얼마나 걸리려나?'

바람꽃의 경우에는 얘가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성질머리로 데이지랑 투닥거리면서 금방 친해졌다.

그런데….

레일라의 경우에는 그런 기대를 하기 어려워 보였다.

'…다른 애들한테 영 관심이 없네.'

­지그시...

나만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무척 간지러웠다.

아가용이 보내오는 노골적인 집착에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우리 애들끼리 친해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벤트를 벌어야겠어.'

조만간 [친해지길 바래]를 찍어봐야겠다.

앞으로 얼굴을 맞대고 지낼 꼬마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게 보기 좋을테니까.

내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그래, 가보렴."

섭섭한 티가 풀풀 나는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용마망의 무릎 위에서 새하얀 꼬마가 폴짝하고 내려온다.

드디어 레일라가 엄마의 품에서 해방되었다.

녀석은 뭐가 그리 급한 지… 무릎에서 내려오자마자 이쪽으로 향했다.

­도도도!

'올 게 왔군.'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오는 모습이 뭔가 애틋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세 오른쪽에서 뿅하고 새하얀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내가 앉아있어서 그런지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그 덕분에 하얀 꼬마의 길다란 속눈썹이 훤하게 보였다.

­헤헹.

레일리가 배시시 웃었다.

방금 전까지 칭얼거리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구…."

세상에.

하마터면 심장마비 걸릴 뻔했다….

'…심장에 해로워.'

레베카의 미모에 간신히 적응했더니만,

그녀의 딸은 다른 종류로 견디기 힘들었다.

얘라면 장바구니에다가 과자를 몰래 집어넣어도 얼마든지 용서해줄 수 있다.

아니, 아예 마트카트에 실고 다니면서 매장 내의 까까를 다 사줄…….

"…피터."

문득. 내 옆에서 뿜어나오는 영압이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쓰담쓰담하고 있던 하얀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크흠."

비로소 레베카가 딸등신이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사과했다.

"아, 미안."

­??

레일라는 왜 그러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제 정수리를 나한테 쑤욱하고 들이밀었다.

'두피가 깨끗하네.'

아무래도 사양하지 말고 만져도 된다는 의사표시 같았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할 지….

나는 레일라의 작은 머리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 꼬꼬마의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았다.

"너, 저리가. 안 보이자나…."

때마침.

데이지가 뽀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레일라의 등을 흘겨보고 있었다.

여전히 레일라를 경계하는 듯했다.

­??

아가용은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데이지를 돌아봤다.

이윽고,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는 듯이 반응한다.

­누구?

"……!"

데이지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또래 아이(외관상으론…)에게 무시받아서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화났네.'

원래 애들 끼리는 싸우면서 큰다고 하지만.

…우리 애는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편이라서 좀 많이 걱정이다. 주먹도 겁나 맵고.

나는 불상사를 막고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도리도리.

레일라가 황급히 나를 붙잡았다.

그대로 있으라는 듯이.

­통통!

아가용은 '나만 믿어요!' 하듯이 조막한 주먹으로 제 명치를 두드린다.

왠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는걸까?

나는 레일라가 바라는 대로 도로 자리에 않았다.

그러자, 녀석이 내 무릎 앞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 설마?'

내가 아이의 의도를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는ㅡ

이미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내 시야에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영차.

맥 빠지는 몸짓과 함께.

가벼운 무게감이 내 허벅지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여리여리하고, 뜨뜻미지근한 느낌이 조금 익숙했다.

'이거 무릎냥이도 아니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살짝 실소했다.

과연, 아가용은 천재였다.이러면 데이지의 시야를 가릴 일도 없을테니까.

오전에 나를 방석으로 쓰던 것을 잊지 않고 잘도 써먹는다.

나를 깔고 앉은 레일라는

고개를 뒤로 쭉 젖히더니, 나를 거꾸로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헤헹~!

마치 똑똑한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밉지 않고 마냥 애교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칭찬 대신에 하얀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졸지에 방석이 된 입장으로선 조금 괘씸하긴 했으니까.

­엥?

마빡을 맞은 레일라가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 좀 웃겼다.

나는 반쯤 포기해 버리고, 아무렇게나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자, 그녀가 소리없이 꺅꺅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신났네.'

레일리가 원체 가벼워서 무릎을 빌려줘도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이제 겨우 기분이 좋아진 꼬마를 냉정하게 밀어내기도 뭐했고.

그런데.

"……."

"……."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따가웠다….

**

눈치가 보인다.

그런데, 아가용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이 나서 방방거렸다.

덕분에 내 머리만 바쁘게 굴러간다. 위기의 순간에는 유머가 빛을 발하는 법…!

나는 긴장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입을 달싹인다.

"애, 애들아. 용이 놀라면 뭐게?"

"용?"

어째 반응이 좀 시원찮았다.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나보다.

나는 그들의 흥미를 복돋울 만한 것을 추가했다.

"정답을 맞추면 상품 줄게. 레베카도요."

"으음."

상품을 내걸었니, 그제서야 참여할 의사가 생긴 듯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각자 내가 내민 수수께끼에 집중하며 골머리를 썼다.

"드래곤이 놀랄 일은 없지 않니?"

답답한 지 레베카가 은근슬쩍 나를 떠봤다.

의외로 그녀는 창의성이 좀 부족한 편이었다. 하기야,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당연할지도….

"…왠지 불경한 눈빛인데…."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빠르다니까.

나는 아닌 척하며 잡아뗐다.

"허어! 기분 탓입니다.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해 보세요."

레베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정답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꼬마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데이지."

"나, 모르겠어. 힌트…?"

…그럼 그렇지.

그래도 애가 솔직해서 좋다.

"넌센스… 그러니까 말장난이야."

데이지의 노력이 가상해서 결정적인 힌트를 알려줬다.

수수께끼란 너무 난해하면 흥미가 없어지는 법이니까.

­나도요!

"나, 나!"

레일라는 뭣도 모르면서 자꾸 손을 들었다.

데이지도 그에 질세라 자꾸 손을 번쩍 들었다. 이상한 승부욕이 생긴 듯했다.

'아니. 애들아, 정답은 맞춰야지….'

그게 뭐라고 경쟁하는 거야.

쓸데없는 자강두천을 보는 것 같다.

"후후, 사이가 좋구나."

멍청한 용가리는 아예 입이 찢어질 듯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 누구도 정답을 맞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때였다.

"바, 바람꽃!"

댕댕이가 자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번쩍 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어쨌든 바람꽃이라면 기대해 볼만했다.

은근히 약삭빠른 녀석이라서.

"답은?"

"…깜짝이용?"

제법 깜찍한 답안이었다.

그리고 정답에 거의 근접했다. 결국 정답은 아니었지만.

"아깝다. 그래도 노력했네."

"칫."

기대한 모양인지 바람꽃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더이상 정답이 나올 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대충 답안을 공개했다.

"정답은, 띠용!"

"……?"

…이상하다.

내 예상보다도 반응이 초라했다.

"띠용?"

데이지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레일라도 그저 헤헤 웃으며 박수만 쳤다.

얘네 둘은 내 유머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아."

한편, 레베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경멸어린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내 농담이 끔찍했던 모양이다.

"…풉."

귀엽고 착한 바람꽃만이 킥킥 웃으려다가…

주위의 싸늘한 반응을 눈치채고, 억지로 웃음기를 숨겼다. 가엾게도 동조현상에 휩쓸려버렸다.

결국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됐다.

"피터. 용이 놀라면, 왜 띠용이야?"

문득 데이지가 갸우뚱하며 내게 물었다.

언제나처럼 지적호기심이 가득했다.

헌데, 나는 그 순진무구한 눈이 오늘따라 부담스러웠다.

원래 개그라는 것이… 이게 왜 웃긴 지 해설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었다.

"그, 그게 말이야…."

덕분에 드립을 설명하는 내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광대는 익숙하니까….'

어쨌든 분위기만 풀렸으면 된 거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

겨울이란 계절의 장점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 나는 밤이 빨리 찾아온다는 점이 좋았다.

아직 잠들기에는 너무 이른 밤.

은은하고 따스한 램프의 불빛이 퍼지는 방.

그 곳에, 성인 셋이 넉넉하게 누울만한 너른 침대가 놓여있다.

그 위에서,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재잘재잘 떠올랐다.

나는 겨울밤의 어두움과 밝음, 고요함과 소란스러움을 모두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피터! 다음은, 다음은 있지… 용사 파티의 탈주닌자…!"

"아니, 그거 말고 아기돼지 삼인분! …츄릅."

어젯밤에 휴재했던 탓인지.

피터 할배의 옛날이야기 시간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비글 같은 꼬맹이들….'

"아냐! 아기돼지… '삼형제'야. 그리구, 그거 재미없어."

"흥, 땅콩이가 뭘 알겠어? 넌 맨날 용사니 소드마스터니 하는 것만 좋아하잖아. 그런 거 유치하거든?"

"그, 그게 어디가? 털뭉치가 더 유치해."

"으응. 아니야~ 땅콩이 나보다 더 작음."

…어디를 가든 장르 가지고 싸우는 애들이 있나보다.

얘네들은 웹소설을 입문한 지 고작 두 달이 된 애기 독자였지만.

데이지는 내가 물들인 탓인지, 내 취향의 사이다패스 웹소설을 좋아했고.

반면에 바람꽃은 의외로 동화나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선호했다.

'신기하단 말이야.'

두 꼬마의 성격이나 외모만 보면 서로 취향이 바뀐 거 같아서.

뭐,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두 녀석 모두 불만을 내지 않고 들어 주었지만.

"이제 겨울이 되었으니 겨울망국은 어떠니?"

애들끼리 떠들고 있을 때, 레베카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디즈니 계열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특히나 공주님이 나오는 쪽으로….

'…은근히 소녀 취향.'

생각해보면, 이 눈나도 좀 미묘하다.

이래서 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줌마. 새치기 나빠."

"…미안하구나…."

어부지리를 노리던 용가리는 금방 저지당했다.

딸을 되찾았음에도 레베카는 여전히 꼬마들에게 약했다.

한결 같이 못난 모습이라서 왠지 안심이 되어 웃음이 나왔다.

허나, 이대로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넌 어때?"

­??

레일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좋아하는 얘기 있어?"

­으음~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

배려가 부족했다.

지금껏 세상에 갇혀있던 아이다. 아는 것이 많지 않으리라.

이번에는… 세상 이곳저곳을 모험하는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자, 어느 마을에선 잘 익은 보리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늑대가……."

**

'…졸려.'

의외로 떠드는 일은 체력 소비가 심하다.

그래도 어른인 내가 피곤한 만큼, 기운차던 응애들은 기절 직전이었다.

­zz….

잠이 많은 레일라는 제법 버텼지만 이미 그로기였다.

게다가 잠은 전염성이 있다. 한 명이 아웃 당하자, 나머지 두 녀석도 꾸벅꾸벅 졸거나 하품하며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인가.'

드디어 해방이다!

나는 조그마한 행복을 느끼며, 흐느적거리는 꼬마들을 추스린다.

서로 얽히고설킨 채 누워있는 애들을 하나하나 풀어야했다.

우선 내 허벅지를 멋대로 베개삼은 새하얀 녀석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자러 가야지."

­…으으.

레일라는 조금 찡그리더니,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내 바지자락을 쥐고 있던 작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자, 엄마랑 같이 자러 가요."

­도리도리…

"착하지? 엄마가 기다리시는…."

­도리도리….

"그, 그럴수가…!"

이런….

불쌍한 애엄마가 충격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 서로 못 볼 걸 봐버렸다.

"…피터…."

레베카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를 봤다.

내게 바라는 게 있는 듯한 애원의 눈빛이었다.

'아니, 그건 좀.'

나는 그 의도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굉장히 부담스러웠으나… 너무 불쌍해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같이 주무실래요?"

"응!"

시무룩해 하던 레베카가 금세 방긋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왠지 모르게 낚인 기분이 든다.

"나도 여기서 잘래…."

문득, 용케 정신을 차리고 있던 바람꽃이 칭얼거렸다.

제 방으로 돌아가기 귀찮은 건지,

아니면 혼자서 왕따 당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몰라. 이제 나도 몰라….'

그냥 다 같이 자던가.

솔직히 피곤하고 졸려서 일일이 달래기도 귀찮았다.

결론적으로.

처음 그대로 다섯명이 한 침대 위에 옹기종기 눕게 됐다.

'…좁아.'

제법 넓은 침대였으나,

역시 다섯명이나 부대껴서 자기엔 조금 좁았다.

그럼에도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잘 자…."

"킥, 그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어쩐지 누군가가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는 비록 좁았으나,

겨울 임에도 포근하고 따뜻해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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