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71화 (71/117)

〈 71화 〉 세남자(1)

* * *

어느 겨울의 새벽.

아직 동이 트지 않은 하늘은 거무스름하다.

반면에, 밤하늘 아래의 잠들지 못한 도시를 창백한 백광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황도는 대낮처럼 밝았으나 그 누구도 소리내지 않는다.

새벽이 다가옴에도 수탉마저도 숨을 죽이고 울지 않는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다.

태양이라고 칭송받던 이들이 땅으로 추락한 날로부터.

"전하, 강녕…."

피곤해보이는 늙수그레한 얼굴의 사제가 목례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는 않겠군요."

"대주교 또한."

칼로 베어낸 듯한 단답이었다.

다소 무례해 보일 수 있는 언행이지만,

금발의 청년에겐 예의를 갖추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우고 있는 동안,

지금도 문제들이 산사태처럼 쇄도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 길게 이야기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피차 바쁠 것이니 겉치레는 생략하겠네."

그건 중년의 사제, 시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틀 사이에 눈그늘이 짙게 드리운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상황은?"

"무지한 자들 때문에 정신없이 바쁩니다. 민심이 썩 좋지 않습니다."

"…우민들은 되었다. 내부는 어떠한가."

내부.

연옥으로 수색하고 있는 기사들.

헬리오드는 질문을 내뱉으면서도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의 생각대로 시몬 대주교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시오네 경이 6층까지 내려갔습니다만.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이도, 시체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라."

"허나 곧 발견되겠지요. 그곳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을 터이니."

"……."

그리 말하는 대주교의 표정은 확신에 찬 것처럼 태연했다.

그와 반대로 헬리오드는 점점 얼굴이 굳어서 무미건조해졌다.

'…빠져나올 길이라.'

유감스럽게도, 대주교의 말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시몬의 믿음과는 달리 연옥에는 쥐가 빠져나올 구멍이 존재했다.

자신과 연옥 안에 있던 연금술사만 아는 비밀통로.

시몬 대주교는 그 통로를 모른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안심하고 있는 거다.

'이미 늦은 게로군.'

그 연금술사는 순순히 자백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시어도어 폰 히텐슈탄인이기에 반드시 그럴 터였다.

시어도어는 배신했다.

더이상의 수색은 시간 낭비다. 조만간 인원을 복귀시켜야한다.

"알았네. 그 쪽은 좀 더 기다리기로 하지."

허나 헬리오드는 비밀을 시몬에게 알리지 않는다.

비록 한 배를 탔다고 하나… 굳이 자신의 흠집을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쪽은 어떻게 되었나. 그 수녀, 아니 마녀와 안토니오 주교의 심문은?"

"…안토니오는 아직 의식불명입니다만."

시몬의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인다.

그는 몰라볼 정도로 흉악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럼 여자 쪽은."

"털어놨습니다. 다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네."

"……가면을 쓴 심문관이 그들을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가면을 쓴 심문관, 시몬의 급변한 태도.

헬리오드는 곧장 떠오르는 것을 입에 담았다.

"설마 그대의 아들인가?"

"…양아들입니다."

시몬의 얼굴은 여전히 구겨진 채였다.

헬리오드는 뜻밖의 정보을 듣고서 그를 노려본다.

"안 그래도 그대의 양아들에 대해 할 말이 있었거늘…. 어째서 그 자가 그 곳에 있던 건가?"

"수녀가 봤다곤 하나, 아직 쿼츠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주교는 번들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제가 완성시킨 겁니다! 제 아들은 절대로 여신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게 녀석의 전부이니까요."

그건 일찍이 보아온, 광기에 물든 자의 눈이었다.

헬리오드는 황좌에서 내려오지 않는 늙은 망령을 떠올렸다.

어딜가도 추레한 노인네의 아집을 부러뜨리기란 쉽지 않다.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그런 거로 치지. 다만ㅡ"

안 그래도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촉박하다.

게다가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그저 납득할 수 있는 것이면 된다.

본디 가라앉는 배를 띄우려면,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여야한다.

그러나.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은 자신의 짐을 줄일 생각이 없었다.

"그대의 양아들을 지명수배할 것이오."

"그, 그게 무슨…."

시몬은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헬리오드가 거듭 말했다.

"쿼츠라는 이단심문관이 신탁을 빼돌려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과 결탁한 걸세."

"…전하! 제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습니까? 그 아이는 저를 위한ㅡ"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대주교가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전하, 크리스틴 벨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방문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시몬 대주교는 멍한 눈으로 방문과 무표정한 헬리오드를 번갈아 봤다.

"왜 성녀가…."

"이제 본인과 말을 잘 맞추시오. 대주교."

떨어진 태양은 늙은 욕망을 꿰뚫어보며 웃었다.

[오래 살려면 그 자리를 보전해야 하지 않겠나.]

**

겨울은 게으름뱅이를 만드는 계절이다.

오죽하면 근면한 해님마저도 겨울에는 늦장을 부렸다.

평소라면 눈을 떴을 시각이지만.

아직 태양이 출근하지 않은 터라 세상이 어두캄캄했다.

'…일해라 햇산.'

사실 일해야하는 건,

자전하고 있을 지구라는 녀석인데.

뭐, 졸린 와중에 굳이 그런 것까지 따져야할까?

아무튼 결론은 그거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내가 태양보다 부지런할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대충 좀 더 자겠다는 헛소리다.

내가 완벽한 논리를 내세워가며 다시 눈을 감았을 때ㅡ

­스르륵.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침대가 한쪽이 움푹하고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은은한 장미향이 내 코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먼저 일어났나…?'

침대에서 잠들었던 이들 중에서.

가장 부지런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간 잠이 없다니까.'

그녀가 노인네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주위에 있는 아무거나를 안고 돌아누웠다.

­우웅….

아담한 크기에, 뭔가 보들보들했다.

그리고 베이비파우더 같은 냄새가 났다. 기분좋은 느낌의 쿠션 같았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ㅡ

"일어나렴."

내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파고들어 온다.

속삼임과 함께 새어나온 달달한 숨결이, 나를 더이상 잠 못 이루게끔 만들었다.

"나참. 일어나아."

살짝 토라진 목소리에 왠지 기분좋은 소름이 돋아났다.

타인에 의해서 억지로 잠을 깨야하는 상황에도, 상쾌해지는 느낌을 무어라고 설명하기 벅찼다.

'이, 이게 ASMR…?'

너튜브에서 볼 때는 그딴 게 뭐가 좋은 건지 몰랐는데….

나는 항거할 수 없는 마력에 홀린 것처럼 눈을 뜬다.

그리고… 아직까지 해가 뜨지 않은 것에 감사함과 동시에 원망해야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루비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깨어난 나를 발견하고서.

조금 흐트러진 차림의 레베카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잘 잤니?"

뭔가 뇌정지가 올 것 같았다.

잠에서 깬 직후라서,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후우."

나는 이불을 고쳐 덮고서 속으로 반야심경을 외웠다.

아침의 나는 비교적 저혈압인 편인데….

두근두근. 오늘만큼은 고혈압이 의심될 정도로 귓가에 심장소리가 훤히 들렸다.

나는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겨있는 입을 놀린다.

"조은 아침…."

"키킥, 그래."

오늘 아침의 레베카가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신해 보였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배려하는 건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런데… 내 귀에는 그 웃음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건 너무,

아무튼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무서울 정도였다.

'맙소사….'

나는 전생하고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지우고 새로 작성했다.

…아침마다 깨워주는 옆집 미소녀 소꿉친구는 저리가라.

이제부터 모닝콜은 아름답고 상냥한 마망이 제일이다.

이따위 멍청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ㅡ

어째서인지 보기좋게 상기된 그녀가 달뜬 숨을 내뱉는다.

"하아, 더이상은 못 참겠구나…!"

"그, 그러면 애들이…."

레베카가 천천히 다가온다.

도저히 말릴 새도 없이, 가까워진 그녀는 길고 하얀 손을 뻗는다.

이윽고…

내 주변에서 경이로운 자세로 뻗어있는 꼬맹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터피터…! 애들 좀 보렴. 사이좋은 삼자매 같지 않니? 하아아~."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일단 겉보기엔 확실히 귀엽고 뭉클한 그림이긴 했다.

'너네는 용케 안 깨고 잘도 자는구나….'

세상물정 모르고 잘 자는 애들이 조금 부러웠다.

한편, 레베카는 자신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을 싱글벙글한 얼굴로 감상했다.

"흐흥~"

…실로 악취미 같았다.

뭐, 이는 평소의 레베카라는 소리였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게 뭔 일이야.'

나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상황을 관망했다.

나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런데,

"이제 슬슬 일어나지 그러니?"

…참견쟁이 용마망께서 타깃을 나로 바꾸었다.

선뜻 다가온 레베카에게서 짙은 장미향과 옅은 우유 냄새가 났다.

"아, 아니, 잠, 잠만요."

나는 이불을 걷어가려는 엄마의 손길을 다급히 막으며 말했다.

헌데 레베카의 악력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궤가 아니었다.

미친, 시간을 벌어야한다.

"왜, 저만 깨워요? 오늘 저 아침 담당 아닌데요…."

급해진 내가 당당히 태만해도 되는 이유를 읊었다.

레베카는 그런 나를 묘한 눈빛으로 보며 대꾸한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대와 상의할 게 있단다."

무슨 일이지?

물론 레베카가 내게 볼일이 있다면.

시간 같은 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이불을 되찾으려 시도한다.

"조금만 시간을 주심 안될까요"

"얼마나?"

"한 3분… 아니, 5분만."

"흐응, 게으름은 좋지 않단다."

아니, 이건 게으른 게 아니라!

내가 기겁하며 발악하자,

철딱서니 없는 레베카는 뭔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표정을 지었다.

이 눈나는 뭘 알고 이러는 건가?

만약에 알고 이러는 거면, 진짜 개악질이다….

결국 나와 레베카는 천쪼가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 법이란다."

그나마 다행히도 용마망은 좋은 엄마에 속했다.

바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말 안 듣는 아들내미를 설득으로만 깨우치려 했으니.

"일찍 일어나는 새는 사냥꾼에게 잡히는뎁쇼."

그러나, 물러설 곳이 없었던 나는 반박해야만 했다.

다시 레베카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재차 설득한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단다."

"구르는 돌이 만신창이로 깨져버려요."

"…제일 먼저 청소하는 사람이 잃어버린 돈을 줍는 법이지."

"청소는 어차피 제가 하잖아요."

"…잠, 잠들어있는 거인보다 일하고 있는 난쟁이가 더 낫지."

"일어나 있는 거인이 소비하는 식량을 생각해본다면…."

­뿌득.

"이익."

레베카가 분한듯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제 입싸움은 관두려는 모양이다. 대신, 수단을 다른 쪽으로 바꾸었다.

'…너무 까불었다.'

속이 좁은 사람 특징.

키배질에서 지면 무력을 행사한다.

'끼아악! 하지마! 망할 용가리야!'

애들이 깰까봐 소리도 못 지르고….

피지컬이 딸려서 저항하지도 못했다.

­펄럭~

레베카는 기어이 이불을 채갔다.

그러고는 내 한쪽을 보며 멍한 얼굴로 갸우뚱했다.

"으응…?"

너어는 정말… ;ㅅ;

때마침 해님이 출근했는지,

어두웠던 방 안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노을처럼 붉어지는 하얀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수치스러운 아침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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