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세남자(2)
* * *
빛을 머금은 것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새하얀 머리.
역사적으로 특출난 신성력을 지닌 자에게만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이는 크리스틴 벨이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다.
허나, 헬리오드는 그녀에게 일말의 경외를 품지 않는다.
그저 신기한 하얀 머리를 보며 자신을 배신한 부하의 얼굴이 떠올렸다.
그 연금술사 또한 푸석푸석한 백발을 가지고 있었다. 놈의 새어버린 머리칼은 크리스틴 벨와 달리 후천적인 것이었지만.
'쿼츠라는 자도 백발이었던가.'
공교로운 일이다.
흔치 않은 백발을 지닌 자들이 그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헬리오드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은 색을 지그시 보았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유명한 이번 대의 성녀.
그녀의 명성은 후자 쪽이 압도적이다.
크리스틴 벨이 단정한 얼굴을 꿈틀거리며 이죽거렸다.
"이틀 동안 얼굴을 한 번 비출 새도 없이 바쁘다고 하셨던 시몬 대주교는 어떨 것 같나요?"
"……무슨 말씀인지."
그녀는 탐색전을 벌일 요량은 없는지, 낯빛이 어두운 시몬을 쏘아붙인다.
"함께 온 안토니오 주교는 의식 불명. 면회도, 외출도 거절 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낡아빠진 신전에 갇혀 있다가 이제서야 바깥 공기를 마신 제 기분이 말이에요."
성녀의 혀는 워낙 날카로워서, 교황이 친히 묵언 수행을 시켰다는 게 그저 헛소문이 아닌 듯했다.
"……."
시몬 대주교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크리스틴 벨의 조롱에 입을 꾹 닫았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철저하게 가둬둔 성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참, 뭘 자꾸 흘끔흘끔 쳐보는 거예요? 제가 거지같은 감옥을 탈출한 게 그렇게 신기해요?"
"감옥이라뇨. 저는 단순히 성녀 님을 보호하고자…."
"그따위 헛소리는, 당신의 황자님께나 하시죠? 그렇지요, 헬리오드 전하?"
"……전하?"
헬리오드는 가차없이 자신을 지목한 크리스틴 벨과 노여움이 가득한 시몬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친개가 따로 없군.'
기껏 신전에서 꺼내주었더니….
성녀는 일말의 감사도 하지 않고, 자신과 대주교 사이를 이간질부터 시킨다.
헬리오드는 날뛰는 망아지와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시덥잖은 사담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시간 낭비다."
황태자의 단호한 말에, 목소리를 높이려던 남녀가 잠깐 침묵했다.
이윽고, 한결 기세가 꺾인 크리스틴 벨이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 낭비라… 네, 뭐 그렇네요. 저도 이런데서 낭비할 시간이 없긴 해요. 누구들 덕분에."
헬리오드는 이죽대는 아름다운 얼굴을 난도질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준비해둔 두루마리를 품 속에서 꺼내들었다.
"읽어보도록. 앞으로 그대에게 주어질 것들이다."
"…준비가 참 빠르시네. 다른 쪽도 이렇게 빨라요?"
크리스틴 벨은 황태자의 위아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결국 성녀는 두루마리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계시의 원본과 계시자부터 넘기세요. 제국에 대한 변호는 그 다음에 생각해보죠."
쾅!
수녀는 테이블 위에 소리나게 다리를 꼰 채로 걸쳤다.
이윽고, 허리를 쭉 빼고 드러눕듯이 앉는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서 도발하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 쪽 늙은이가 계시자일 리는 없겠고."
"이, 이, 무슨…."
불한당스러운 성녀의 태도에,
시몬 대주교는 혈압이 잔뜩 올라서 얼굴이 시뻘개졌다.
헬리오드는 망나니처럼 거침없는 크리스틴 벨을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시정잡배가 따로 없군."
"전 성녀니까요."
시정잡배와 성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하는 크리스틴 벨의 저의가 괴상했다.
허나 헬리오드는 비정상적인 자를 이해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본인이 참아주는 데 한계가 있다. 마지막 경고다. 태도를 바로 하라."
"전하께서 보기 불편하신다면야."
크리스틴 벨은 딱히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로 앉은 그녀는 이죽거림마저 지웠다.
"전하의 용건을 들어 드렸으니 이제 제 차례죠?"
"…허."
헬리오드의 허탈한 웃음을 뒤로 하고.
진지한 얼굴로 변모한 크리스틴 벨이 두 손을 모으고 읆조린다.
"순순히 계시자를 인도하세요. 그건 당신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로지 인류의 것입니다."
나지막한 경고와 함께.
성녀의 등 뒤에 날개 형태의 은은한 후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으음."
시몬은 그 모습을 시기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한편, 헬리오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계시자는 줄 수 없다."
"정녕 제국은 대륙 전체와 척을 지려고…!"
"그런 의미가 아니다. 지난 밤, 계시를 받은 신자가 행방불명이다."
"…뭐?"
크리스틴 벨이 미간을 모았다.
헬리오드는 담담히 말을 잇는다.
"계시자는 제국 지부 소속의 이단심문관 쿼츠."
"그는 음모를 획책한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과 함께 도주했다."
**
날이 밝았다.
외딴 숲속에 있던 토굴에서 한쌍의 남녀가 기어나왔다.
"후아~!"
그들 중 한쪽 다리를 절뚝이는 소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답답한 속이 뻥 뚫린 것처럼 개운한 표정이었다.
"이제 살 것 같아!"
소녀는 상쾌해진 얼굴로 기쁜 비명을 질렀다.
한편, 그녀의 곁에 선 수도사 복장의 가면을 쓴 남자는 고요하기만 했다.
사내가 조용한 만큼, 여자 쪽에서 수다스러운 목소리가 따박따박 새어나온다.
"어젯밤엔 썩은내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요! 기껏 따뜻하게 잘 곳을 찾았나 했더니…."
비로소 건강해진 소녀는 여전히 호기심이 많고 시끄러웠다.
수도사는 아플 때의 조용하던 모습이 조금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 아래에서 한숨을 쉬던 때ㅡ
부쩍 다가온 여자가 그를 올려다 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기사님, 기사님. 안 쪽에 곰이 먹다만 고라니라도 있었나요?"
아침부터 무엇이 그리도 궁금할까.
이 작은 여자는 언제나 쓸데없는 질문으로 자신을 성가시게 한다.
평소대로라면 그는 귀찮아 하면서도,
활달한 소녀에게 성실하게 대꾸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는 굳이 알려줄 것이 아니었다.
산 채로 파묻힌 채로 썩어버린 인간의 잔해 따위, 알아봐야 도움되지 않으리라.
"에에~."
갈색머리 소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수도사는 수다스럽고 옅은 입술을 바라보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만하고. 하인커스를 데려와라.]
"아, 하인커스!"
소녀는 활짝 웃으며 그의 애마에게로 한달음에 다가갔다.
사내는 절뚝거리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짐을 챙겼다.
착하다, 착해. 밤새 외로웠지~ 누나가 보고 싶었엉?
푸르르릉.
자신의 애마와 놀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도사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가면 밑으로 옅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얀 백마에게 당근을 먹여주고 있는 여자를 보며 넌지시 훈수를 뒀다.
[너무 많이 먹이지마라. 무거워진다.]
"아니, 이렇게 예쁜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예쁘고, 착하니까 자꾸 주고 싶은 거예요. 뭘 모르세요."
…사내는 가끔 이 어린 여자와의 대화가 버거웠다.
"하인커스도 내가 더 좋지?"
푸르릉~!
"꺄, 너무 귀여워. 너무 이뻐."
[…….]
수도사는 계집애에게 애교를 부리는 자신의 애마를 흘겨봤다.
누가 유니콘의 핏줄이 아니랄까봐…. 여자에게 정신을 못 차린다.
'10년을 함께 했거늘.'
그는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영물이라고 하더라도 짐승은 짐승이었다.
조용해진 그를 알아차린 소녀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한다.
"혹시 삐졌어요?"
[…삐져?]
수도사는 난생 처음 듣는 단어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으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더이상의 대화는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말을 돌리기로 한다.
[잔말 말고 출발하기로 하지. 이제 곧 수도다.]
"아…."
그의 말에 여자는 어딘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하는 듯하면서도, 아쉬워하는 듯 보였다.
"…드디어 왔네요."
가면을 쓴 사내는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수도와 가까워 질수록 자꾸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
"…짜증."
나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레베카에게 아침에 수치플을 당한 것도 한몫 했으나ㅡ
"지금 상황을 고려하고, 결과를 돌출해 봤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구속복을 입은 변태의 얼굴을 보게 되어 짜증이 왈칵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속복을 입은 시어도어가 태평한 얼굴로 말했다.
"빠른 시일 내로 이 곳을 떠야합니다."
"네가?"
나는 괜히 짜증이 나서 트집을 잡았다.
"아뇨. 아버님께 권장하는 사항입니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서 자녀 분의 저주를 해주하면, 그 시전자가 눈치챌 겁니다. 괜히 빌미를 줄 필요는 없지요."
사로잡힌 연금술사는 고개를 절레 젓더니 줄줄 읆조렸다.
뺀질거리는 놈에게 왠지 뭐라도 태클을 걸고 싶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연금술사의 말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의 말은 정론이긴 했으니까.
"…아버님 아니라고."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반항이었다.
그런 내 소심한 반항은 레베카의 엄숙한 목소리에 의해 묻혔다.
"저주의 해주는 무척 복잡한 일이지. 차라리 시전자를 죽이는 게 훨씬 간단명료하다. 그것 또한 강구해 보아라."
레베카가 상담하고자 한 것은 그녀의 딸에게 걸려있는 침묵의 저주에 대해서였다.
내 예상과 달리 저주를 푸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절차대로 저주를 해제하는 일에는 적절한 장소와 시간이 필요했다.
허나, 당장이라도 레일라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주고 싶은 레베카에겐 그건 불쾌한 사실이었다.
지름길을 원하는 그녀를 보며 시어도어가 쓴웃음을 짓는다.
"유감스럽지만. 불가능할 겁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프래드레이크는 겁쟁이니까요. 그는 20년 간 황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대마법사 주제에 방구석 폐인 같은 녀석이다.
나는 혀를 쯧차며 되물었다.
"그럼 여기서 저주를 해주해도 되는 거 아니냐?"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을 찾아올 겁니다. 귀찮아지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이 새끼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뺀질거리는 시어도어를 노려보다가,
레베카가 손등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움켜쥔 것을 눈치챘다.
나는 그녀의 주먹을 억지로 편 다음에 손을 맞잡으며 살살 달랬다.
"진정하세요. 이제 곁에 있잖아요.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해봐요."
"……!!"
그러자.
레베카가 흠칫! 하더니,
이내 목덜미를 잡힌 고양이처럼 얌전해졌다.
"…히, 으응…."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만… 일단 잘된 걸로 치자.
손바닥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 나으니까.
나는 그대로 레베카에게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북부로 가죠?"
"…그럼, 눈이 오기전에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시어도어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는 드물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나는 띠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충고했다.
"얌마, 얼굴 좀 펴라. 갑자기 왜 죽상이야?"
"…대화나 마무리 지읍시다. 길게 보기 싫지 않습니까."
그건 맞지.
시어도어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름대로 보기 좋았지만.
역시 아예 안 보는 게 제일 속이 편하다.
'그나저나….'
막상 북부로 이동하려니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20명이 넘는 인원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우리 구성원 자체가 상당히 눈에 띄는 편이라서 더 걱정됐다.
'대부분 여성에다가 미인…. 거기에다가 어린아이, 하물며 수인족….'
아무런 대책없이 걸어가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뻔했다.
그렇다고 단체로 후드를 쓰고 다녀도 수상쩍기는 매한가지일테고.
'마차는… 무리겠네.'
레베카의 아공간에는 별의별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마차도 있었으나… 우리에게 마차를 이끌어줄 말이 없었다.
나와 레베카가 고민하던 중,
시어도어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중얼거렸다.
"텔레포트하면 되지 않습니까? 위대한 분이시니,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만."
"어렵지는 않지. 하지만…."
레베카가 말꼬리를 흐리며 내 눈치를 슬쩍 봤다.
'텔레포트라.'
편리한 마법은 당연히 고려했다.
허나, 공간계열 마법이 육체에 주는 부하가 상당했다. 그건 내 경험해봐서 잘 안다.
한 때 부상자였다가, 이제 어느정도 회복된 수인족 여자들은 괜찮을 지 모른다.
그들은 생존력이 뛰어난 종족이니까. 그러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테오.'
나 때문에 앓아누운 테오를 두고 갈 수 없는 일이다.
텔레포트틀 이용하려면 그가 회복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얼마나 걸릴 지 모른다는 거.'
아직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벌써 완쾌를 기대하는 건 너무 성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안돼."
"그럼."
시어도어는 내 반론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수인족을 먼저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뭐?"
"나머지 일행만 도보나 마차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을 택배처럼 보낸다는 발상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물며 여자들만 있는 수인족 무리를 따로 보낸다는 게 꺼림칙했다.
"…여자들만 먼저 보내자는 거냐?"
"안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들도 일일이 챙겨줘야합니까?"
뭔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 이런 이기적인 새끼가….'
효율만 따지면 그리 나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수인족만 따로 보내는 것이 걱정됐다.
내가 고민하자,
시어도어가 수상쩍은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설마 그들도 돌봐줄 수 생각입니까? 혹시 그쪽에도 애인이…."
"아가리 닥쳐!"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야….
나는 왠지 모르게 눈치를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레베카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되었다. 이제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결하마."
…내 손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는 것처럼.
아침을 먹자마자, 수인들에게 한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먼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뜻밖의 희소식.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덕분에 수인족 누나들은 대부분 얼떨떨해 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기뻐하기도 했지만.
마법진 앞에 불러놓은 수인족에게 레베카가 말씀하시길….
"쇳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용마망은 요즘 격언을 쓰는데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레베카의 묘한 고집 때문에 송별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곧 헤어질 수인족 누나들과 간단한 인사만 나눌 수밖에 없었다.
"피터…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보고 싶을 거야."
"릴리 누나도 조심히 가세요. 곧 보러 갈거예요."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다보니…
드디어 마지막 한사람이 남았다.
나는 절대로 울지 않을 것 같던 그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그녀가 과자를 뺏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물을 손수건으로 콕콕 찍어주었다.
"왜 자꾸 울어요. 솔 누나. 좋은 일이잖아요."
"그, 그치만…."
솔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정이 많이 쌓였던 모양이었다.
비록 서툴고 틱틱거리긴 했어도, 역시 이런 사람이 은근히 잔정이 많았다.
나 또한 가장 친해진 솔이 기꺼워서 토닥토닥 달래주었다.
"도착하면 누나 집에 놀러 갈게요. 맛있는 거 해줘요."
"…으응, 기다릴게. 꼭 기다릴 거야. 너, 안 오면 죽어… 흐으…."
이거 어제 빨래한 옷인데… 금방 못 쓰게 돼버렸다.
나는 반쯤 내려놓고 솔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그리고, 바람꽃 아버님한테 안부 부탁드려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솔을 달래며…
나는 그녀에게 바람꽃의 아버님을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왜냐하면,
"족제비…! 저리가! 솔 아줌마한테서 떨어져!"
…바람꽃은 우리와 함께 간다고 고집을 부렸다.
"악! 야, 발로 차지마. 자국 생기잖아."
"…흥, 바보, 바보!"
이제 곧 친한 동족들이 떠나고 혼자만 남는다고 생각한 탓일까?
댕댕이 녀석이 오늘따라 더 까탈스럽게 굴었다.
"솔 아줌마도 이제 그만 뚝하고 집에 가. 사람들 아줌마만 기다리잖아!"
'아줌마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데.'
솔은 이제 30대 초반이고, 외모도 20대…….
아… 10대 초반인 댕댕이 보기에는 아줌마가 맞을 지도…?
"잠, 잠시만…."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솔이 바람꽃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잔뜩 당황한 그녀는 내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아직도 할 말 있어?"
나는 까칠한 댕댕이가 두려워서 슬며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솔이 비에 젖은 슬픈 강아지처럼 굴었다. …작별인사는 마무리 해야겠다.
"누나 먼저 가서 푹 쉬세요. 막상 제가 갔는데 냉대하면 섭섭해요?"
내가 농담 삼아 전하자,
솔이 발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만 와. …네 방은 잘 뎁혀 놓을게."
뭔가 묘한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솔은 호다닥 도망치듯이 떠나갔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간 방 안에서,
나와 같이 남겨진 바람꽃이 괜히 툴툴 걸렸다.
"솔 아줌마. 별로야."
…얘가 아무리 속상해도 그렇지.
뒷담화까지 하네? 혼낼 건 혼내려고 했다.
"야, 솔누나한테 버릇없게..."
"솔 아줌마가 땅콩이랑 놀지 말라고 했어. 불길하댔어."
얼씨구?
이젠 고자질까지 한다.
"먼저 가서 서운한거야? 너가 우리랑 남겠다며. 그리고 헤어지는 데 인사는 잘해야지."
"별, 별로 안 서운하거든… 글구, 그건 족제비가 잘못한 거야…."
…눈물이나 닦고 얘기하자.
"그래, 내가 나빴다."
너가 그렇다는 데 그런 거겠지.
나는 여러모로 심란할 바람꽃에게 맞춰주었다.
"진짜로 누나들이랑 같이 안 가도 돼? 아직 안 늦었을 거야."
나를 올려다보는 코발트색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빠와 고향마저 미루어 두고, 우리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아이에게.
바람꽃은 약간의 눈물을 머금고, 조금 토라진 입술을 달싹인다.
"됐어, 나 은혜 갚을거야."
…제딴에는 그렇다고 한다.
나는 북부의 어린 늑대를 보며 작게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