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73화 (73/117)

〈 73화 〉 세남자(3)

* * *

수인족과의 작별 인사를 마치고.

어딘가 결연한 표정의 레베카가 레일라를 데리고 우리 곁으로 왔다.

그녀는 나와 자신의 딸을 아쉬운 눈으로 번갈아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동안, 우리 아가를 부탁하마."

조금 젖어있는 목소리였다.그 탓에 나도 모르게 레베카를 붙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가지말라고, 그냥 우리 곁에 있어 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레베카가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레일라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어쩐지 북받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레베카도 다치지 말고요."

"내가 누구니?"

레베카가 걱정말라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깊은 미소에 오히려 더 마음이 짠해졌다.

'착해 빠져가지고….'

이제야 사랑하는 딸을 되찾았는데 금방 떠나야한다.

나는 책임감 있는 레베카가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레베카는 수인족들과 북부로 떠난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안전한 곳까지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그게 그녀가 떠올린 절충책이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나도 확답은 못 하겠구나. 그래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돌아오마."

한동안 얼굴을 못 보는 만큼.

레베카에게 구구절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 말고도 예약한 손님이 있었다.

"아줌마, 조심히 다녀와."

"레베카 님. 고마워요…."

꼬맹이's가 배웅을 하러 나왔다.

평소에는 좀처럼 틈을 주지 않던 녀석들이 이번만큼은 선뜻 나서서 레베카를 안아주었다.

"얘들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스킨십에 그녀가 몹시 감격했다.

그 모습은 나름대로 훈훈해지는 광경이었지만.

…어째 장기 출장을 떠나는 기러기 아빠와 그 자녀를 보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역할이 바뀐 거 아니냐고….'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 손을 꼭 붙잡고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새하얀 꼬마를 쳐다봤다.

­;;

레일라는 아직 엄마가 익숙치 않은 듯이 어쩔 줄 몰라했다.

…얘는 나한테는 스스럼 없는데, 레베카에게만 신기할 정도로 쑥맥이었다.

'엄마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한편, 레베카는 데이지와 바람꽃에게 원대한 송별을 받으면서… 은근슬쩍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나참.'

나는 왠지 닮은 서툰 모녀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등을 밀어줘야할 것 같다. 작은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넌지시 말했다.

"레일라. 엄마 가신다는대? 엄마한테 전해줄 거 있지 않아?"

­…??

아가용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하고 엄마 꼭 안아줘야지."

…괜히 낯간지러워 지는 대사였다.

어쨌든 내 말을 듣고서, 고민하던 레일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엄마에게로 향했다.

­…….

쑥스러운 듯한 레일라까지 살짝 포옹하자,

기어이 꼬맹이 3신기를 모은 레베카가 울먹이며 승천하려고 했다.

"오늘이라면 백골이 되어도 좋을 것 같구나…!"

동서남북으로 날뛰는 추한 그녀의 퍼포먼스에, 조금 침울하던 분위기가 단박에 깨졌다. 덕분에 이별의 순간이 그렇게까지 우울하지 않았다.

"다녀오세요. 종종 연락할게요."

나는 간신히 진정한 레베카에게 내 왼손을 내보이며 안부를 전했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 멍한 눈으로 내 손가락을 빤히 바라봤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눈빛이었다.

"레베카?"

"…그, 그래, 다녀오마…!"

정신을 차린 레베카가 황급히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붉어보였다.

***

'…조용하네.'

들어온 사람은 몰라도 나간 사람은 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빠졌다.

그 탓에 집 안이 너무 조용해졌다.

고요함은 다른 의미로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분이 심숭샘숭한 것은, 내 곁에 있어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벌써부터 걱정이네.'

레베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막상 보내고 나니 강가에 아기를 두고 온 기분이었다.

이미 혼자 보냈다가 사고를 친 전적이 있는 그녀라서 더 걱정됐다.

'흠, 설마 또 뭔가를 주워오진 않겠지?'

나는 실없는 농담 같은 생각을 하며 애써 근심을 지웠다.

계속 감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레베카를 걱정할만한 깜냥이 아니거니와…

또, 나는 이곳의 유일한 어른이었기에 의연해야 했다.

어른이 불안해하면, 근처에 있는 아이에게도 그 영향을 미치는 법이므로.

"피터?"

­아빠?

내 양옆에 까만 꼬마와 하얀 꼬마가 포진해 있었다.

조금 불안한 듯이 보이는 그들은 각자 내 한 손을 붙잡고,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올 것처럼 굴었다.

'어째 포졸한테 잡힌 것 같네.'

뭔가 억울하다.

도망칠 생각은 없는데….

어차피 한동안은 얘네들이 불안하지 않게끔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레베카가 장기 출장을 가버렸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벌써부터 삐걱거림이 보였다.

'…여전히 사이가 안 좋네.'

내 양 사이드를 차지한,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흑백의 조합.

바로 앞에 있으면서 데이지와 레일라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에, 잠깐 화장실에 간 댕댕이까지 도착하면….

'서로 잘 지내겠지?'

……왠지 아닐 것 같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애기들이 두명일 때도 허구한 날 투닥거렸는데… 세 명이 더했으면 더했지 둘보다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레베카가 없는 만큼, 이제 그녀에게 떠넘길 수도 없다.

'…엄마, 빨리 돌아와 줘.'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레베카가 보고 싶어졌다.

곁에 있을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막상 없으니까 확실히 그녀의 필요성이 여실했다.

역시 둘이서 하던 걸 혼자서 하려니까 조금 부담이 된다.

하루라도 빨리 애들 사이를 개선해야할 것 같았다.

내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예정을 앞당겨야겠어.'

그동안 기획한 친해지기 바래를 찍어야겠다.

어제 저녁에 전쟁 같았던 식사 시간이 계기였다.

그 때 나는 애들 간의 싸움도 무시할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하나같이 태생이 남다른 꼬마들이니 그럴만도 했다.

'어떤 10살짜리가 나무문을 맨주먹으로 부셔?'

우리 애지만 가공할만한 괴력이다.

그러니 절대로 서로 싸우게 하면 안된다.

아, 문득 드는 생각인데….

여기서 애들이 조금만 더 성장해도 내가 말릴 수나 있을려나?

"……."

…괜한 궁금증이었다.

어째 향후 1년만 지나도 내가 애들한테 압살 당할 것 같았다.

'나 존나 약하네.'

갑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나중에는 다 큰 애들한테 빌빌 기면서 잡혀사는 게 아닐까…?

'에이… 설마.'

말도 안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어쨌거나 나는 꼬맹이's의 친목을 도모할만한 것을 생각해봤다.

열살 터울인 여동생이 있던 탓에,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놀이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혜은이 때는 소꿉놀이였나?'

그 녀석은 나한테 맨날 인형놀이나 병원놀이를 하자고 졸라댔었다.

그 때는 걔도 좀 귀여웠는데… 아, 그러고보니… 고등학생이 되어서 여동생이랑 비비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엄마한테 녹화당한 적….

'…….'

…영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려 버렸다.

아무레도. 우리 애들이랑 하는 소꿉놀이를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했다.

'게다가, 왠지 싸울 것 같고.'

특히나 소꿉놀이에서 역할을 정하는 일이 전쟁의 불씨가 되곤 한다.

나는 서로 예쁜 아내를 하겠다면서, 싸워대던 혜은이와 혜은이의 친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제발로 지옥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

플랜 1을 영원히 봉인하고, 플랜 2로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언젠가 레베케에게 빚까지 져가면서, 제공받은 아공간을 뒤적거렸다.

'그게 어디 있더라?'

레베카의 아공간은 별의별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호기심 많은 그녀가 이것저것 아무거나 주워담은 탓이리라.

비록 금은보화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찾았다.'

나는 히히 웃으며 점찍어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동심으로 돌아가기에 적당한 날이었다.

**

"자, 애들아. 우리 재밌는 놀이 하자. 자리에 앉아봐."

바람꽃이 돌아온 뒤,

나는 애들을 데리고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이 있는 곳에 앉혔다.

"놀이?"

논다는 말에, 꼬맹이들이 순순히 자리에 앉는다.

덕분에 녀석들의 작고 앙증맞은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와, 엄청 쪼그맣네….'

새삼스럽게 얘네들이 작다는 게 실감이 되었다.

특히나, 저 조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이목구비가 들어가 있는 게 신기했다.

'이런 건 찍어놔야 하는데.'

내 손에 사진기가 없다는 게 심히 유감스러웠다.

이로써 인류는 보물을 남길 기회를 잃었다.

"피터, 이제 모해?"

많이 궁금한 모양인지 데이지가 나를 보챘다.

우리 꼬꼬마 외에도 두 쌍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나만 빤히 보고 있었다.

언제 침울했다는 듯이.

똘망똘망한 눈망울은 마치 보석을 보는 것 같았다.

그 형형색색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기자기한 꼬마들이 나란히 앉은 채 보내는 눈빛은, 왠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 맛에 선생님을 하는 건가….'

뭔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반짝이는 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즐거운 웃음을 주고 싶었다.

"한 번 맞춰볼까?"

나는 상당히 업된 기분으로 챙겨온 백지와 손가락 크기의 형형색색의 막대를 꺼냈다. 색깔은 총 다섯가지로 검정, 빨강, 초록, 파랑, 노랑이었다.

애들은 내가 꺼낸 것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살펴봤다.

꼬맹이들 중 키가 가장 큰 바람꽃이 킁킁거리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킁, 먹을 거야?"

…얘한테는 먹을 게 재밌는 건가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땡. 다음은 데이지."

"엑… 으, 색깔, 있는… 막대기…?"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데이지가 보이는 그대로 잘 설명했다.

그라나, 역시 정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헤헤.

…얘한테 물어보는 건 좀 그렇다.

레일라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머리를 쓱쓱 헝클여 주었다.

역시 아무도 못 맞출 거 같았다.

흥이 찬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막대기를 들어올리며ㅡ

"짜잔~! 만 능 크 레 용!"

파란색 너구리를 닮은 로봇 고양이 톤으로 말했다.

""??""

두 꼬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갈고리를 띄웠다.

…여기서는 안 먹히는 성대묘사였나보다. 나름 자신 있던 건데 조금 섭섭했다.

­짝짝짝!

…아무것도 모르지만 박수부터 쳐주는 애가 있어서 살았다.

나는 물타기하듯이 박수를 유도했다. 그러자, 데이지도 바람꽃도 엉겁결에 박수를 쳤다.

"근데, 그게 머야?"

좋은 질문이다, 댕댕이.

얘네들은 전부 시골떼기나 다름 없기에, 이러한 신문물을 모를 수 밖에 없었다.

"잘 봐."

나는 붉은색 크레용을 쥐고, 백지에다가 붉은선을 크게 그었다.

그러자, 꼬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로 그림 그리자."

나는 우쭐한 느낌으로 말했다.

...어쩐지 현대인 천재론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