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세남자(4)
* * *
나는 백지에다가 동그라미 하나에 작대기를 죽 그었다.
이윽고, 결코 잘 그렸다고 할 수 없는 졸라맨이 완성됐다.
이런 민망하기 짝이 없는 그림 솜씨에도ㅡ
"와아…."
아기자기한 꼬마들은 저마다의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내 그림을 바라봤다.
…이게 모나리자를 그려낸 천재의 기분일까?
저 순진무구한 시선에 나를 향한 선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훗….'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간다.
뭔가 쑥스러워서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쓱쓱 쓸었다.
나는 나보다 한참 어린 꼬마들의 신이 된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서만큼은 내가 안경 쓴 펭귄보다 한 수 위의 존재다.
'이 놈의 인기란….'
선망 어린 시선에 취했던 중ㅡ
애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편인 바람꽃이 크레용을 툭툭 건드렸다.
"헤에에."
어째 낯선 장난감과 마주친 뉘집 누렁이가 생각났다.
나는 예상 밖의 댕청미에 피식 웃으며, 어쩔 줄 몰라는 바람꽃의 손에 제대로 쥐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거 안 물어. 괜찮으니까 편하게 쥐면 돼."
"나, 나도 알거든…."
기껏 친절하게 알려줬더니 녀석이 괜히 틱틱거린다.
아까 토라진 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아~ 근데 이거 되게 딱딱해!"
역시 어린애는 적응이 빠르다.
바람꽃은 크레용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감상을 말했다.
'너 알고 있다며?'
나는 허세 부리는 것을 잊어버린 댕댕이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얘가 잘난 척하는 건 그냥 애교처럼 느껴져서 밉지 않았다.
내친김에 바람꽃에게 선 긋는 법을 알려주려는데ㅡ
"…피터. 나도 알려줘."
아직 진도가 느린 꼬꼬마가 나를 찾았다.
데이지는 주어진 크레용을 본체만체하고, 이쪽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떠먹여주기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보였다.
저도요, 저도!
그 옆에서는 나를 향한 소리없는 아우성이 들렸다.
레일라의 경우에는, 작고 하얀 손가락에 붉은 자국이 묻어있었다.
본격 이세계 크레용 쥐는법의 일타강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냥 손에 쥐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뭐라고 일대일 강의까지 해야하나 싶었으나.
어쨌든 인기 많은 선생님이 된 기분이어서 흔쾌히 알려주었다.
**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어린 학생들은 저마다의 고사리손으로 형형색색의 크레용이 들었다.
그 모습에 왠지 대견해서 가슴이 뿌듯해졌다.
"얘들아, 이제 그림 그려보자."
나는 박수를 몇 번 치고서,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말했다.
그리고 추가로 덧붙인다.
"크레용이 눈이나 입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 손으로 얼굴 만지는 것도 금지!"
이 크레용의 재질을 잘 모르는만큼 주의해야 했다.
전에 내 손등에 문질러봤을 때는 알레르기 반응이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안전을 중시하는 현대의 문물과 달리, 이세계의 문물은 그 부분까지 배려하지 않을테니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고 나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 시간이다.
…딱히 알려줄 게 없어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게 전부였지만.
"근데, 뭐 그려야 대?"
"…글쎄?"
데이지와 바람꽃은 백지를 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난생 처음 접하는 경험이라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한편, 레일라는 나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아 빠~
괜스레 불러보는 느낌이었다.
이유 없는 아가용의 애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응~~'하고 대꾸할 뻔했다.
"…크흠."
……고작 이틀 만에 호칭에 대한 위화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 식은땀이 난다.
'이대로는 끝도 없겠네.'
아무거나 그려도 상관이 없었지만.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으니, 구체적으로 주제를 정해줘야할 필요성이 보였다.
'하긴, 자유주제가 은근히 어렵지.'
나는 무엇을 그리도록 해야할까 고민했다.
나 때는 장래희망이었는데….
내가 초등학생 때는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래요?'라는 주제를 지겹도록 그렸다.
그런 점에서 정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 애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주제가 아닐 듯했다.
아무래도 미래를 꿈꾸기엔, 아이들의 과거가 각박했을테니까.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선 경험을 쌓을 여유가 없을 것이다.
'알려줘야할 게 많네.'
여유가 생기면 차곡차곡 쌓을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 이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그 때는 뭘 그리려나?'
나는 훗날을 상상하며 작게 웃었다.
그 때가 오면 각자 어떤 꿈들을 꾸고 있을 지 기대가 되었다.
짝짝! 나는 박수로 이목을 모은 다음에 말한다.
"얘들아! 그러면, 각자 좋아하는 거 그려보자."
그 날이 오기까지.
지금 이 순간도 즐겁기를 바라며.
**
쓱쓱.
대충 주제를 던져주자,
그제서야 꼬마들이 분주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삐뚤삐뚤한 선을 긋는 모습이 마냥 서툴지만.
집중한 듯이 입술을 쏘옥 내밀고,
동그란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너튜브 올리면 조회수 대박일텐데.'
나 혼자서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광경이었다.
하다못해 출장 나간 용마망에게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아기자기한 모습을 뇌리에라도 담아두고자 열심히 지켜봤다.
'키킥, 뭘 그리는 거야?'
애들의 그림은 빈말로도 잘 그렸다고 못하겠지만.
그래도… 얘네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다.
내가 슬쩍 훔쳐보고 있을 때ㅡ
"잇, 피터! 지금 웃으면 안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얼굴인 데이지 화백께서, 자수정 같은 눈을 가늘어 뜨고 있었다.
…그거 너무 어려운 주문인데?
나는 나를 꾸짖는 꼬꼬마를 보며, 멋쩍어서 뺨을 긁적였다.
그러자,
"윽, 움직이면 안되는데…."
데이지가 울상을 지으며 소심하게 항의했다.
나는 나를 야속한 듯이 흘겨보는 앳된 얼굴에, 왠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지는 나 어떻게 생각해?]
…오글거려서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
오늘날, 뜻하지 않게 그에 대한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아우, 얘를 어떻게 하면 좋냐?''
난 우리 꼬꼬마가 뭘 그리고 있었는지 정말 정말로 모르겠다~
아무래도.
웃지 말라던, 데이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이런 걸로 기뻐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나보다.
"흐흐흐."
이게 엔돌핀이 도는건지 뭔지… 아무튼 기분이 high했다.
"…피터, 왜 그래? 어디 아파?"
"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광대뼈가 뻐근했다.
꼴사납게 올라가려는 주둥이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게 잘 안됐다. …이러는 내 모습이 누군가랑 비슷한 것 같았다.
'…레베카랑 내가 동급이라고…?'
…그건 인정할 수 없다.
난 용마망처럼 못난 딸천재가 아니란 말이야….
들뜬 기분을 조금 환기해야할 것 같았다.
잠깐 나갔다가 오는 게 좋을 듯 했다.
게다가 내겐 꼬맹이's를 돌보는 일 외에, 해야할 일도 있었으니까.
나는 애들이 집중한 틈을 타,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드라~ 나 화장실 좀…."
그런데,
내가 일어나기가 무섭게ㅡ
?!
지금까지 도화지에 코를 박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서로 짠 것처럼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
"……."
지그시.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어쩐지 내가 눈치 없이 분위기를 깬 것 같다.
"가, 갔다올게…?"
왠지 모를 압박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끝마쳤다.
주섬주섬…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려는데ㅡ
"지금은 안 대!"
"이 씨, 가만히 좀 있어!"
끄덕끄덕!
사방에서 항의가 빗발친다.
…꼬마들이 처음으로 대동단결하는 모습이었다.
**
어쩌다보니.
움직이는 피터는 범인이 되어버렸다.
'…너무하네.'
결백한 나로선 상당히 억울한 부분이지만.
나를 구박하던 꼬맹이's의 모습을 보는 건 제법 유쾌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금방 친해질 것 같았다.
원래 친목을 다지는 데는 다른 사람을 패는 것만한 게 없으니까.
…그 샌드백이 나라는 게 조금 유감스럽지만.
'후, 겨우 빠져나왔네.'
그나마 꼬마들이 한창 먹는 걸 좋아할 나이라서 살았다.
간식을 만들어 오겠다는 달콤한 말로, 나를 속박하려던 꼬마들을 구슬릴 수 있었다.
간식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해놨고.
녀석들도 크레용에 익숙해졌으니, 내가 없는 동안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놀 것이다.
"……."
닫힌 방문 너머에서 다툼의 기색은 없었다.
나는 잠깐 방문 앞에 서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 하양이. 너 좀 그린다?
…있지? 쟨 왜 하양이야?
응? 머가? 머리가 하얗잖아.
그, 나한텐 땅콩이라며… 근데, 내가 쟤보다 크자나.
아아~ 그럼 넌 검정 땅콩이, 얘는 하얀 땅콩이. 이제 됐어?
시러어…! 나 이제 땅콩이 안 할래, 나 안 작아…! 얘 그치?
…대화 수준 뭐지…?
억울한 땅콩이의 진심어린 호소를 엿듣고 말았다.
나중에 간식을 가져갈 때 우유도 잔뜩 챙겨야겠다.
으, 털뭉치…! 얘가 나 놀려써… 고개 저어써….
…너 바보야?
비록 들려오는 목소리는 둘 뿐이지만.
방 안의 분위기가 제법 괜찮아 보였다.
나는 조금씩 들려오는 재잘거림에 안심하고 돌아섰다.
**
나는 곧장 주방으로 가지 않았다.
애들이 없을 때만 가야하는 곳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 자리잡은 으슥한 방.
자물쇠를 따고, 그곳으로 들어간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며 녀석이 대뜸 입을 연다.
"커다란 마력의 흐름을 느꼈습니다. 안주인께서 떠나셨는지요."
구속복을 입은 시어도어는 어김없이 개소리를 지껄였다.
뭐, 완전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이 새끼가 말하면 괜히 꼴 받는다.
"너, 회복약 같은 거 만들 수 있냐?"
나는 애써 무시하며, 놈에게 내 용건부터 말했다.
태연한 얼굴의 연금술사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상처 치료, 흉터재생, 혈액보충, 기력보충 등… 회복이란 범위가 제법 넓습니다만. 자세히 어떤 것을 찾으십니까?"
…세계관이 판타지인 주제에 뭔가 까다롭다.
붓거나 마시면 낫는 포션 같은 개념이 아니었나보다.
나는 축 늘어지고, 근육통을 호소하던 테오를 떠올리며 말한다.
"음… 뼈랑 근육을 재생을 돕는 쪽으로."
"가능합니다. 재료만 준비하신다면야."
시어도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인다.
"직접 진단한 뒤, 약을 만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 새끼가 은근슬쩍 수작을 부리네?
그건 레베카가 돌아왔을 때의 고려해 봐야겠다.
"재료나 말해."
근데 재료가 더럽게 많아서 머리로만 암기하기 버거웠다.
나는 시어도어가 불러주는 약재를 하나하나 적었다.
"흐흐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놈이 기분 나쁘게 실실 웃었다.
내가 악필이라고 까보는 건가? 불쾌해진 내가 눈을 부라렸다.
"시발아, 뭘 쪼개."
시어도어가 가늘어진 푸른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연다.
"처음에는 드래곤인 줄 알았습니다만…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셨습니까?"
"그럼, 개나 소나 전부 다 드래곤이게? 병신새끼."
딱히 숨기고 있던 게 아니었기에 그대로 쏘아붙였다.
또 놈에겐 기이한 재주가 있는 탓에, 뻔한 거짓말을 해봐야 금방 탄로날테니까.
'대체 무슨 재주인지 모르겠네.'
원래부터 이 연금술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한다는 점이 껄끄러웠다.
이런 놈과 같이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
대충 목적을 들은 나는 그대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암튼, 나 간다. 착하게 있으면…."
"그동안 제가 연구했던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백발을 눈가에 드리운 채로 시어도어가 중얼거렸다.
"……?"
내가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든다.
지금까지의 태연함이 온데간데 없고, 삐뚤어진 날 것의 얼굴이 보였다.
"이 쓸모없는 몸뚱이를 쓸만하게 탈바꿈하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들을 뛰어 넘기 위해서요."
나는 원작에 나왔던 놈의 두가지 숙원을 떠올린다.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은 그 누구보다도 재능을 선망하고 증오한다.
검이 세상의 전부라며 세뇌받아온 20년의 세월.
그동안 그를 속이고 핍박해온 가문에 대한 원망.
연금술사는 진실을 깨달은 뒤에도 그것에 매달려 왔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굴욕적인 복수를 계산해왔다.
재능과 태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금기의 비술.
그건 일평생 축적된 열등감이 만들어낸 광기의 일종이었다.
"제 연구가 당신에게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마치 자신의 동반자를 만난 것처럼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이 웃었다.
"드래곤과 인간의 간극은 어마어마합니다. 육체도, 수명도, 정신도 그 무엇도 닿지 않지요."
"앞으로 세월에 의해 당신은 쇠약해지고 볼품없이 추레해질 겁니다. 반면, 그녀는 영원토록 아름답고 강인할 겁니다."
"당신은 그 끔찍한 운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이의 곁도 지킬 수 없는, 잔인하고, 부조리한…! 나약한 인간의 숙명을…!"
"……."
창백하게 타오르는 푸른눈을 보며,
나는 놈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몰라서 침묵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상념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시어도어의 말처럼, 지금도 나는 휘청거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복잡하게 많은 것을 고민할 수 없었다.
고로, 나는 스스로에게 한가지만 물어본다.
'언젠가 내게도 힘이 필요한 때가 올까?'
…아마도 힘이 있어서 나쁘지 않으리라.
초라하게 그들 뒤에서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나도 앞장 서서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못났더라도, 나약하더라도.
떳떳하고 싶은 남자이기에 품을 수 밖에 없는 갈망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악마에게 홀린 기분으로 시어도어에게 묻는다.
"…조건은?"
"용사의 후예와 드래곤의…."
빡!
"꺼져, 시팔아."
**
나는 씩씩거리며 방을 나선다.
정수리를 후려친 주먹이 조금 욱신거렸다.
'그 새끼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잠깐 혹해버려서 짜증났다.
그 탓에 기분이 더 불쾌했다.
나는 부엌에서 과일을 깎으면 화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좀처럼 성이 풀리지 않는다.
"후우…."
…이대로는 안되겠다.
어서 힐링이나 받으러 가야겠다.
나는 접시에 과일을 가득 담고.
깜찍한 꼬마들을 떠올리며 한달음에 달려간다.
저리….
으에으….
약간 소란스러운 방문 앞에 서자,
작은 기대감으로 들뜨는 기분이었다.
'어떤 그림을 그렸으려나~'
애들 솜씨는 별로 기대는 되진 않지만.
그래도 그림을 보며, 기쁘게 웃어줄 수 있게끔 시뮬레이션을 한다.
"문이 열리네요~♪"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자마자ㅡ
"그대가 들어오…."
"흐에에, 피티어어어…!"
…노랫말처럼 내게로 도도도 뛰어드는 까만 머리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엥, 뭔데?"
나는 바지춤에 엉겨붙는 데이지를 보며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나를 반긴다고 하기에는, 우리 꼬꼬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히으, 피터, 쟤가, 쟤가…!"
뭐가 그리도 무서운 건지….
이슬로 촉촉해진 보랏빛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왜 울고 있는거야?'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한 손으로 토닥토닥 달래며 주위를 살폈다.
방 한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푸른 털뭉치가 보였다.
"…람람아?"
"조, 족제비이이…."
북부의 아가늑대는 황급히 내게로 왔다.
데이지랑 마찬가지로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넌 또 왜 그러는데."
"쟤 무서워…."
바람꽃이 충격받은 눈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새하얀 꼬마가 있었다.
얼마나 기분 좋게 그림을 그리는지.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날 정도로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그냥 귀여운데.'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갸우뚱하자ㅡ
울상인 데이지와 바람꽃이 삐약거리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림! 그림!"
"괴물, 괴물…!"
…애들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대체 쟤가 뭘 그렸길래….'
나는 내가 돌아온 것도 모를 정도로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레일라에게 다가갔다.
몰래 그 그림을 훔쳐보는데….
검은색과 붉은색 크레용만 사용했는지, 전체적으로 검붉은 그림이었다.
'뭐야, 별거 아니….'
…진 않네?
시벌, 이게 뭐야?
"맙소사…."
?!
나는 충격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한편, 그제서야 나를 눈치챈 레일라가 맑은 미소를 보냈다.
아빠!
나는 그 하얀 웃음에 약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게… 이 귀엽고 깜찍한 꼬마가… 3번 보면 죽을 것 같은 그림 같은 걸 그려놨다.
어때요…?
레일라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그린 작품을 슬며시 내보였다.
붉고 호러블한 살뭉텅이처럼 생긴 기괴한 그림.
어디서 본 것 같다. 곧 생각해냈다.
이건, 레일라가 있던 방의 '살아있는 마물로 이뤄진 벽'이었다.
…얘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그런 건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정이 쌓인 건가….
"자, 잘 그렸네. 그런데…."
그래도 이 정도면 끔찍하게 잘 그렸다고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레일라의 그림에는 너무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특히나 데이지가 겁을 집어먹을 만한 부분….
"…이 검은 건 누구니?"
그건 사람처럼 보였다.
어쩐지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붉은벽에 잡아먹히는 듯한 그림이었다….
으응~
모두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 레일라 화백.
그녀는 내 물음에 잠깐 고민하더니, 아! 하고 데이지를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히이익...!"
헤헤.
뭔가 칭찬해달라는 듯한…
악의 하나도 없는 해맑은 미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동심리상담사 자격증 따놀걸….'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잔뜩 쫄아버린 데이지를 한참동안 달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