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세남자(6)
* * *
어느덧 해가 중천에 도달했다.
성녀와 대주교는 그제서야 떠났다.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헬리오드는, 백사 같던 여자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린다.
나중에 제 친우를 찾으면 그 때 뵙지요. 그 때까지 전하께서 무탈하시기를 여신께 기도나 드려볼게요.
성녀라 불리우는 여자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성녀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을 듯 했다.
'성가신 계집.'
그가 막대한 대가를 약속 했음에도 크리스틴 벨은 단 한 가지만 원했다.
그건 들리는 소문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종의 집착처럼 비합리적이었다.
헬리오드는 크리스틴 벨의 집착이 떠올린다.
'성녀와 이단심판관이라….'
그 둘의 위치는 동전의 앞뒤와 같다.
서로 같은 집단에 속해 있으나, 마주 볼 수 없는 다른 영역에 자리했다.
크리스틴 벨과 쿼츠.
가장 높고 찬란한 여신의 대리자와 가장 낮고 은밀한 여신의 철퇴.
대척점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에게 어떤 연결점이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의 의문에 유일하게 답할 수 있는 시몬 대주교는 성녀에게 붙잡혀 가버렸기에.
'시몬과도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러고 보면… 크리스틴 벨은 처음부터 시몬을 적대했다.
아무래도 신탁을 은폐한 것 외에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녀와 이단심판관, 그리고 제국의 대주교.
그들 사이에 그가 알지 못한 무언가 있음은 분명했다.
"…일이 꼬였군."
헬리오드는 그들에게 휘말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몬과 상의를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리 엇갈리진 않았을 것이다. 후회스러웠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헬리오드가 짙은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을 때ㅡ
똑똑.
[전하, 시오네 경이 전하께 면담을 요청하십니다.]
한창 연옥을 수색 중하고 있어야할 기사가 그를 찾아왔다.
무언가 실마리라도 발견했을까 기대를 했지만.
'…보고가 아닌 면담이라?'
기사가 고른 단어에 원인 모를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과연, 이게 희소식일 지 아니면….
"안으로 들여라."
헬리오드는 거부감을 억지로 도려내고서 그의 기사를 불렀다.
문이 열리고 훤칠한 키의 여기사가 들어왔다.
무뚝뚝한 얼굴인 시오네는 곧장 헬리오드에게 경례를 했다.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그럭저럭이오."
헬리오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경이 어쩐 일인가? 시간은 많이 줄 수 없네."
"…전하께 아뢸 것이 있습니다."
여기사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청년은 그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평소의 재미없는 얼굴이 오늘따라 낯빛이 어두웠다.
헬리오드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말하게."
"5계층에서 외부인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족히 10명 이상의 무리들이 머물렀던 자취였습니다"
"뭔가 확보했는가?"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오네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것 외에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쯧."
면목 없다는 듯이 목례하는 여기사에게 헬리오드는 혀를 찼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으나… 면전에서 듣는 수하의 앓는소리가 퍽이나 불쾌했다.
"고작 이틀만에 그대의 무능을 실토하러 왔는가."
들끓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여성의 몸으로 초인이 된 기사를 담는다.
목덜미까지 오는 단발, 길고 유연한 팔다리, 허리춤에 차고 있었을 레이피어.
시오네 칼라일.
삼백여년 전 루비 팬드래건 이후로 탄생한 두번째 여성 소드마스터.
그녀는 유일무이한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태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허나, 제가 전하께 아뢸 것은 다른 것입니다."
"…다른 것?"
"예."
황태자의 분노 앞에서도 담담한 시오네는 품에서 빳빳한 종이를 꺼냈다.
그 위에 써진 검은 잉크를 읽은 헬리오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미쳤는가? 지금 이 시국에 휴가가 용납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여기사의 휴가신청서를 갈기갈기 찢으며 말했다.
평소 이지적이던 여기사의 개념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그대의 노고는 인정하나, 이번 휴가는 반려요. 다음으로 미루시오."
시오네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찢겨진 조각들을 살펴본다.
이윽고, 황금빛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 보다가 중얼거렸다.
"전하께선 빅토르가 요양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사의 입에선 헬리오드가 수 년간 잊고 있었던 이름을 나왔다.
순간 당황한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십니까? 그 미련한 곰의 꿈은 고향의 드넓은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자와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가."
헬리오드는 부쩍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시오네는 눈을 감으며 담담히 말한다.
"전하. 빅토르의 고향은 드워프도 살지 않을 구렁텅이가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오네는 품에서 꾸깃꾸깃하고 누런 편지를 꺼냈다.
봉투엔 사직이라는 표기만이 간소하게 적혀있었다.
"제가 사용하지 않은 휴가가 얼추 900일이었습니다. 그 중 제하여 739일, 2년의 휴가를 허락해주십시오. 정 허락할 수 없다면…."
"…그동안 무엇을 할 셈이오…."
헬리오드는 그늘이 드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시오네는 손에서 쥔 동전 두 닢을 매만지며 답한다.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을 찾아보려 합니다."
**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애들이랑 그림을 그리며 놀다가 깨달았다.
…이제 수인족 누나들이 없으니 식사 준비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좋은 날은 다 갔네.'
뭐, 그동안 푹 쉬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또 입이 대폭 줄어들어서 메뉴를 정하는 것도 쉬워졌다.
허나, 문제는 애들이다.
'…나 없이도 잘 놀 수 있으려나.'
제법 친해져서 서먹서먹한 건 다소 없어졌는데.
아무래도 계속 그림만 그리게 하면 금방 질려야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애들용 샌드백인 레베카도 없으니,
내가 요리를 하는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불안함이 없잖아 있었다.
'그냥 애들이랑 같이 점심 준비나 할까?'
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하나도 아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꼬맹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요리하는 건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분명 내가 죽어나갈 거야….'
나는 어린이 셋이서 할만한 놀이를 생각해봤다.
막상 떠오르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단 숨바꼭질이라도 시키는 게 무난해보였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데 레일라가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술래에서 깍뚜기를 시키면 잘 놀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생각을 마치고.
슬슬 점심을 준비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람람아."
"왜?"
어릴 때는 덩치가 큰 녀석이 대장노릇을 하는 법.
나는 세 명 중에서 그나마 키가 큰 바람꽃을 콕 짚어서 임무를 하달했다.
"나 이제 점심 만들러 갈 건데. 애들이랑 숨바꼭질이라도 있을래?"
"엑. 그거 셋이서 하면 재미없는데."
역시 까칠한 댕댕이답게 한 번에 승낙하는 법이 없다.
한번 튕기고 보는 게 습관화 되어있다. 참 맹랑한 꼬맹이야.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며 녀석을 달랬다.
"왜~ 셋이서도 재밌을 거야.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줘."
"에효, 내가 언제까지 애들이랑 놀아줘야 해?"
"……."
이불에 지도도 안 마른 댕댕이 주제에….
우쭐거리는 바람꽃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아쉬운 건 나였기에 대충 둥가둥가 해줬다.
"…에이, 멋진 북부의 늑대가 친구들을 이끌어 줘야지."
"나참~ 어쩔 수 없다니까. 역시 나밖에 없지~"
바람꽃이 아닌 척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너 꼬리 떨어지겠다.
이러고도 자기가 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니 코웃음만 나올 지경이다.
어쨌거나 뒷일은 바람꽃에게 맡기고.
나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땅콩이들. 이리와서 모여봐!
떠나온 방에서 신이 난 골목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나게 놀다가 돌아올 꼬맹이들을 위해서, 음식을 든든하게 준비해 놔야겠다.
**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던 중.
하나, 두울, 세엣….
어디서 또박또박하게 숫자를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애 특유의 높은 목소리에 맞춰서 야채를 탁탁하고 썰었다.
일곱, 으음, 아홉…?
뭔가 긴가민가한 지 멈칫거렸다.
앳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킥킥 웃어버렸다.
'좀 귀엽네.'
바람꽃은 아직 내가 알려준 숫자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숫자를 떠올리느라 낑낑거리고 있을 댕댕이를 상상하며 소리쳤다.
"여덟!!"
아! 아, 알거든! 여덟…!
왠지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애들이랑 저렇게 같이 노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아홉, 여얼! 이제 찾는다~! 이제 잡히면 죽는거야!
아따, 살벌하기도 해라.
꼬맹이들이랑 노는 것은 한 번 더 생각해봐야겠다.
내가 흥얼거리며 기름을 끓이고 있을 때였다.
"피터피터."
"엥?"
한창 숨어 있어야할 데이지가 다급하게 주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곧장 주위를 살피는 그녀를 보며 작게 감탄했다.
'얘가 주방에 숨을 생각인가 보네.'
하기야, 후각이 발달한 댕댕이에게서 숨으려면 평범한 장소로는 어림도 없다. 데이지는 그 사실을 용케 캐치하고서 온갖 냄새가 뒤섞인 주방으로 도달한 듯 보였다.
'와, 준비성 뭐야?'
나는 어디서 내 코트까지 들고 온 꼬꼬마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냄새를 숨기려고 하다니…!
'서, 설마… 지금까지의 바보는 연기였나…?'
뭐, 그럴 거 같진 않은데….
사실은 데이지가 똑똑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로 치밀하긴 했다.
내가 신선한 충격으로 정신을 못 차릴 때,
아직도 숨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는 꼬꼬마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피터, 나 좀 도와줘! 잡히면 클나…!"
이게 뭐라고 큰일 날 것까지야….
절박한 표정까지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데이지가 웃겼지만.
어쨌든 제딴에는 정말로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술래가 물어보면 없는 척해주면 되려나?'
조금 비겁한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착하고 귀여운 애한테 떡 하나를 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래. 뭐 해줄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이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내 코트를 내밀었다.
"헷, 이거 입어줘."
"??"
…갑자기?
나는 들이밀어진 롱코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걸 왜 내가 입어야하는 걸까?
...너가 덮으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영문을 모르겠네.'
물론 내가 옷빨이 좋긴 한데….
나는 엉겹결에 받아버린 코트를 든 채로 뺨을 긁적였다.
"뎃지야, 여기 불 앞이라서 좀 더운데…."
"안돼! 빨리빨리."
…얘가 왜 이러실까?
어쩔 수 없지.
어떤 앙큼한 술수인지 한 번 지켜보자.
나는 데이지가 바라는 대로 코트를 입어 주었다.
예상대로 무척 더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