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79화 (79/117)

〈 79화 〉 세남자(9)

* * *

그 누구보다도 태양에 가깝다고 칭송받던 남자.

만인이 그를 우러러 보았기에.

헬리오드 폰 임페리얼은 영원히 그러하리라 여겼다.

언젠가 군림하게 될 그의 앞길에는 찬란한 영광과 승리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재.

금발의 청년은 거대한 종이의 산 위에서 짓눌리듯이 고개를 쳐박고.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에 취한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이 흔들리는 듯 했다.

골방에 유폐되어 수기를 작성하는 죄인.

헬리오드는 자신의 모습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못할 지도 모른다.

적어도 감옥에 갇힌 죄인은 눈이 빠질 정도로 업무를 보지 않을테니.

"…지긋지긋하군."

끝이 보이지 않은 살인적인 업무에,

헬리오드는 드물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게.

이틀을 꼬박 새었음에도 오히려 일이 늘어나는 광경은 사람의 의지를 깎아 내버린다.

'어디론가 떠날까.'

당돌하게 휴가를 제출한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처럼.

헬리오드 또한 홀연히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을 피해서 따듯한 이국의 섬으로.

백사장에 드러누워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일광욕을 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으리라.

'……우습군.'

헬리오드는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그의 망상은 평소 누이가 소원하던 것과 비슷했다.

그는 연기처럼 사라진 누이 동생에 대해서 생각한다.

과연, 그녀가 제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떠오른다.

­똑똑.

활짝 열어둔 집무실 앞.

조금 지쳐 보이는 얼굴의 기사가 보였다.

헬리오드가 그에게 시선을 보내자, 기사가 예를 취하며 입을 연다.

"전하, 궁정 대신이 칙서를 가져왔습니다. 전하께 드리라 하셨습니다."

"……."

기어코 늙은 사자가 무언가를 보낸 듯했다.

헬리오드는 얼굴도 비추지 않고, 떠난 늙은 대신을 머릿속에 새겨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오라."

요한네스 폰 임페리얼.

형식상 자신의 아비되는 자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다.

그건 너무 장황하고 길었다.

그리고,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치곤 너무나도 삭막했다.

"……무단으로 군을 동원했다라."

헬리오드는 그 요점을 되뇌이듯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황제에 내린 칙서를 구기듯이 갈무리했다.

문득 어릴 적에 읽은 어느 이국의 신화를 떠올린다.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게 가까이 날아간 자가 있었다.

그러나, 가짜 날개를 달았기에 그는 아래로 곤두박질할 수 밖에 없었다.

'…추락할 운명이라는 건가.'

헬리오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두컴컴한 망막에 시름시름 앓아가는 여자의 말로가 또렷하다.

­헬리오드… 반드시… 황제가 되거라….

어느덧 그가 황금색 눈을 떴을 때는ㅡ

저물어가는 노을로 세상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헬리오드는 자신의 상황를 되새긴다.

성녀를 필두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항의서.

근위기사단 부단장의 갑작스러운 휴가.

독단으로 병력을 동원한 것에 대한 황제의 징계.

바닥까지 떨어진 혼란스러운 민심.

그 무엇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 뿐인 황족이라는 절대적인 입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헬리오드는 지금처럼 웅크리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ㅡ

'만에 하나, 누이가 돌아온다면….'

수심에 잠긴 청년는 어딘가를 바라본다.

황금색 눈동자가 비추는 것은 노을이 내려앉은 황궁. 그의 눈에는 피에 물든 것처럼 붉어 보였다.

**

노을이 진 언덕길.

남녀가 백마 위에서 한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볼 수 없는 거대한 성벽.

압도적인 위용만으로도 저 곳이 세상의 중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무너진 성문과 앞뒤를 다투는 분주한 행렬에 위화감이 들었다.

'무슨 변고가 있는 건가.'

가면을 쓴 수도사는 그 모습을 관찰한다.

그러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기사님?"

의아한 얼굴의 소녀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내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

이 여자와의 기묘한 여정이 어떻게 끝이 날 지를.

그는 여자를 신전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심문에 특화된 이가 그녀에게서 정보를 뽑아낼 것이다.

아마도 그 역할은ㅡ

'…아버지.'

그 분의 기이한 능력이라면, 이 여자의 기억을 살필 수 있다.

이제 계시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화전민의 얼굴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남자가 범인일 테니.

[…….]

문득, 수도사는 가면 속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껏 품지 않았던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물이 밀려오듯이 드나들었다.

만일 심문이 끝난 뒤, 이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그녀의 사람에게 저지른 것처럼….

[…….]

사내는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복잡하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작은 여자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수도사는 자신이 무엇을 죽여온 건지 인지했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가족을….'

점점 무거워져서 호흡이 거칠어질 때ㅡ

흙먼지? 성문 쪽에서 피어오르는 흙구름이 보였다.

족히 수 십의 기마.

그건 이쪽으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가 여신의 계시를 받은 날.

그 때처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겨울 숲 속에는 귀뚜라미도 울지 않는다.

덕분에 새근거리는 아이들의 숨소리가 연거푸 선명하게 들린다.

'…신기하네.'

침대에서 꼬물거리는 세 꼬마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낮에는 체력이 넘쳐나서 뽈뽈거리는 녀석들이 밤만 되면 귀신같이 조용해진다.

이게 자연의 이치인가?

어쩌다 보모가 된 나로서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거 완전 낮이밤져….'

나는 헛소리가 나올 정도로 피곤했다.

마냥 귀엽다고 하지만… 세 꼬맹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심심한 것도, 궁금한 것도 많은 나이라서 그런 걸까?

쪼르르 달려와 병아리처럼 재잘거리는 앳된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근데 진짜루 신발도 튀기면 맛있어?

­…….

댕댕아, 제발….

그냥도 맛있는 거 많아. 내가 더 만들어 줄게.

­피터, 아줌마보다 마음이 커지려면 어떻게 해야해?

­??

아직도 그 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우유를 많이 마시라고 충고해 줬다.

'여기서 레일라가 말까지 하면….'

…모르긴 몰라도 적적한 날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잠깐 한숨을 돌리다가.

뒹굴거리다가 엉키기 시작한 세 꼬마를 발견하고 웃음을 흘렸다.

낮에는 서로 기싸움을 벌이던 주제에.

한 침대에서 나란히 잠든 모습은 사이가 좋… 지는 않은 자매처럼 보였다.

'의외로 대장은 데이지네.'

나는 이불을 독차지한 꼬꼬마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가용에게 복실복실한 제 꼬리까지 빼앗긴 댕댕이가 조금 처량해 보였다.

"으으… 추으어…."

그러고 보니 이불이 하나 뿐이었다.

겨울이니 감기에 걸릴 일이 없도록 이불을 좀 더 챙겨 와야겠다.

나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윽고, 주인이 없는 방으로 들어간다.

평소에 레베카가 지내던 곳이라서 그런지 옅은 장미향이 풍겼다.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막상 조용해지니 그녀의 빈자리가 크게 와닿았다.

고작 하루만에 그녀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 지 깨달았다.

애들한테 두들겨 맞는 게 레베카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나….

오늘 일로 남자 혼자서 여자아이들을 돌보는 데는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을 인지했다.

특히나 옷을 갈아입히거나 씻기는 게 좀 걸렸다.

그나마 다행히도, 데이지나 바람꽃은 어느정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아직 유아나 다름없는 레일라는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줘야했다.

'머리 정도는 감겨줄 수 있지만.'

…역시 그 이상은 영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런 점에서 여자가 있어야한다.

레베카 같은 어설픈 마망이라도 말이다.

곁에 없으니 아쉽고.

또 서로 떨어져 있는 만큼 안부가 자꾸 궁금했다.

"전화나 해볼까?"

나는 왼손 약지의 붉은 반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두드리 스펜서와의 일 이후로, 사용해본 적 없는 통신 마법이 담긴 반지였다.

'통화 시간이 얼마나 되려나.'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거리에 비례해서 충천된 마력이 소모된다.

그 전에는 걸어서 만날 수 있던 거리였으나.

제국과 북부와의 경계는 하루이틀 사이의 거리가 아니었다.

아마도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무척 짧으리라.

'…성능이 좀 아쉽네.'

의외로 불편한 전화기를 보며 혀를 찼다.

뭐,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밤잠이 없는 편인 그녀라면 지금도 깨어있을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반지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레베카. 들려요?"

투박하게 생긴 반지에서 영롱한 불빛이 들어왔다.

이윽고, 그 속에서 가느다란 속삭임이 새어 나온다. 작았으나 여전히 듣기 좋은 음성이다.

­무슨 일이 있니?

어쩐지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왠지 걱정하는 것 같아서, 여긴 아무 일도 없다고 안심부터 시켰다.

헌데 그것만으로도 반지의 빛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사한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만족해야할 것 같았다.

­그러니? 그럼 왜 연락했니?

따진다기보다는 그저 궁금해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빛이 꺼지기 직전인 반지를 보며 황급히 말했다.

"보고 싶어서요."

­…….

아무리 기다려도 되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때마침 반지의 배터리가 다 됐나보다. 예상한 대로 제대로 대화하지 못헀다.

감질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들었네. 발이나 닦고 자야겠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이불을 챙겨서 레베카의 방에서 나선다.

그런데.

"……??"

방문을 열자, 오히려 짙어진 장미향을 맡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이게 뭐지?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에….

레베카가 있다.

'귀신인가? 아니면, 공명의 함정?'

그것도 아니면…….

내가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ㅡ

그녀가 멋쩍은 듯이 웃더니,

손에 든 와인병을 내보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한잔 하겠니?"

**

어쩌다보니 그 자리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나는 점심 때 남겨둔 닭튀김을 안주 대신에 방에 가져왔다.

의자가 없었기에,

우리는 침대에 걸텨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깜짝 놀랐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텔레포트란다. 냠."

레베카는 닭튀김이 하나 집어먹으며 대꾸했다.

이윽고, 입맛에 맞는 모양인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무슨 마실 나온 것처럼 말하네….'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레베카가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황급히 빼내며 우물쭈물거렸다.

"…그, 그리고, 그대가 보고 싶다고…."

"아."

…마법은 레알 전설이다.

아까 불편하다는 거 취소다. 이렇게 편리한 게 어디 있나 싶다.

그리고.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머나먼 북부에서 곧장 돌아온 레베카를 보며, 뭔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 집에 늦게 오는 엄마한테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부르면 달려 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 돌겠네.'

그런데도,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모르긴 몰라도 내 낯짝이 엄청 빨개졌을 것 같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레베카가 무지 시원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분명 북부 출신 댕댕이가 자기네 고향은 춥다고 엄청 뻗댔었는데….

'…눈을 둘 곳이 없네.'

나는 어떻게든 시선을 바로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 안 추우세요?"

"음, 나는 더위를 많이 탄단다."

흠, 내가 아는 파충류는 추위에 약한데….

'어쩌면 불도마뱀이라서 예외일수도?'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레베카의 손을 잡아봤다.

오! 진짜로 따뜻하긴 했다. 아니, 이걸 뜨겁다고 해야할까?

"진짠가 보네."

"……."

와, 손난로가 따로 없네?

한겨울에 종종 애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끄, 끄만 만지렴…."

아차. 난로가 도망갔다.

너무 조물딱거렸나보다.

나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오신 김에 애들 볼래요? 자고 있긴 한데."

"으음."

순간, 레베카가 혹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고개를 작게 저었다.

"돌아갈 때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지금은…."

레베카는 말을 하다가 말고.

와인을 반쯤 채운 글라스를 들어 올린다. 붉은 액체가 유난히 영롱하게 보였다.

­짠.

나는 잔을 들어 그녀에게 호응한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에 유쾌한 기분이 든다.

'마음 놓고 마시는 술인가.'

나는 와인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허나 어쩐지 오늘은 제법 감미롭게 느껴졌다.

이 와인이 맛있는 걸까.

아니면…….

"진짜 놀랐다니까요. 레베카, 레일라가 뭘 그렸다면요! 애들이 다 울어버릴 정도로…."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그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했다.

"키킥."

레베카는 초승달을 그린 눈으로 깔깔 웃었다.

그건 근심 하나 없이 풀어진 아름다운 미소였다.

한 때,

달을 보며 쓸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그녀가,

이제는 달님조차 질투할 정도로 밝게 웃고 있다.

"에이, 너무 허풍이 심하구나."

"아니 진짜라니까요!?"

나는 그 사실이 기꺼워서….

자꾸만 높아지는 목소리로 주체할 수 없었다.

영원히 밤이 즐겁기를 바라며,

누구처럼 배시시 웃는 용과 술잔을 기울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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