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어느 아침의 초상
* * *
언제부턴가 밤이 가장 좋아졌다.
낮에는 그 사람이 무척 바빠서.
그래서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하지만 밤에는 그가 온전히 제 곁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온기가 있어서 마음이 들었다.
또ㅡ
모든 사람들이 잠이 드는 그 시간에는…
그녀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맘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데이지는 낮보다도 밤을 더 좋아한다.
태양을 쫓는 꽃이라는 그녀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도.
아직 아침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각.
'데이지. 어서 도망가!'
'피터, 안돼…!'
갑자기 피터가 거대 도마뱀에게 습격당했다.
잡아먹히기 직전인 그를 보며, 데이지는 애타는 심정으로 손을 뻗었다.
"자… 밨…."
그녀의 손이 닿을 듯 말듯한 절묘한 순간이었다.
그 때.
번쩍! 하고 눈이 뜨였다.
"……."
눈을 뜨자마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데이지는 자신이 누운 상태로 손을 뻗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부 꿈이었다.
"휴."
데이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온 몸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위쪽이 뭔가 묵직했다.
'더워….'
어째서인지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이 많았다.
그대로 잠들기에는 너무 답답했다. 곧장 이불을 걷어낸다.
"히힛."
촉촉한 피부가 선선한 공기와 맞닿는다.
차가워서 기분 좋아…. 데이지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상쾌함을 즐겼다.
그러다가 점점 의식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일어났지…?'
무언가 잊은 듯한 아리송한 느낌이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끼잉."
문득 어디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주변을 살펴본 데이지는, 바로 곁에서 끙끙거리는 얼굴로 자고 있는 또래 아이를 발견했다.
푸르스름한 풍성한 머리털.
만져보고 싶은 복슬복슬한 귀와 꼬리.
그리고 맨날 눈을 치켜올리고 있어서 조금 심술궂어 보이는 아이였다.
"털뭉치?"
데이지는 조금 의아했으나,
보라색 눈은 평소에 손도 못대게 하는 복슬복슬한 귀에 꽂혔다.
응, 지금이라면…….
"…안, 돼."
잘 자고 있던 바람꽃이 대뜸 말했다.
화들짝 놀란 데이지가 내민 손을 황급히 등 뒤에 숨겼다. 이윽고, 말을 더듬으며 변명한다.
"아, 아직 안 만졌는데."
"……."
"…자?"
"……."
몇 번 더 조심스럽게 물어봤으나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잠꼬대였나봐.'
데이지는 작게 한숨을 쉬며 콩당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복슬복슬한 귀를 조물조물 만지다가… 문득 털뭉치가 낑낑거리는 게 신경 쓰였다.
'악몽을 꾸는걸까?'
일순간 깨워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데이지가 바람꽃을 괴롭게 만드는 원흉을 발견할 수 있었다.
"??"
Zzz….
그 범인은 그저께 온 새하얀 꼬마였다.
곤히 잠든 그녀가 바람꽃의 풍성한 꼬리를 안고 자는 인형처럼 쓰고 있었다.
"…으윽."
헤헤….
끙끙 괴로워보이는 바람꽃과 달리, 레일라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데이지는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신기한 광경을 흥미로운 얼굴로 직관했다.
어느덧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슬슬 동이 트고 있었다.
"아."
데이지는 그 은은한 빛을 바라보다가,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분명 어떤 꿈을 꾸었다.
그건… 어떤 남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꿈이었다!
"피터?"
흠칫 놀란 데이지가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없다! 길다란 형체는 온데간데 없고… 그녀의 곁에는 짜리몽땅한 둘 뿐이었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아니면,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러 간 걸지도 몰라.
'응, 피터는 부지런하니까.'
하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거대한 도마뱀이….
…피터를….
데이지는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 꿈이 무척이나 신경쓰였다.
**
찰싹! 찰싹!
"아야…!"
난데없이 뺨이 따끔했던 바람꽃이 눈꺼풀을 가늘게 떴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 보는 영롱한 보랏빛을 발견했다.
"모, 야?"
…뭔가 익숙한 상황이었다.
눈치 빠른 바람꽃은 곧장 사태를 파악하고, 미간을 팍 찌푸렸다.
"느어, 쥬그래? 그거 흐지 마랬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어눌한 목소리였다.
데이지는 그런 바람꽃의 어깨를 흔들며 자기 할 말을 전했다.
"털뭉치이… 피터가 없어…."
"으, 어쩌라는 거야…."
땅콩이, 성가셔!
자다 깨어난 바람꽃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녀는 찡찡거리는 땅콩이를 무시하고 돌아 누으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데이지가 바람꽃의 복부에 올라탄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이 땅콩이가 미쳤나?
영문 모를 행동에 당황한 바람꽃이 빼애액 소리를 질렀다.
"끼아악, 존말로 할 때 내려와아아!"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바람꽃을 내려다보며,
데이지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응, 같이 찾아주면."
"아니… 내가 왜…. 이 씨, 내려가아아!"
북부의 늑대는 악당과 협상하지 않는다.
바람꽃은 굴욕적인 자세에서 벗어나고자 새빨개진 얼굴로 저항했다.
허나 입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땅콩이의 피지컬이 너무 뛰어났다.
…생긴 건 쥐방울인 주제에.
데이지는 무슨 돌덩어리를 얹어둔 것처럼 굳건했다.
"헥, 헥…."
지친 바람꽃이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자,
데이지가 찔끔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있지. 괜차나?"
"…너 두고보자…."
…압도적으로 져버렸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엔 안 져…."
바람꽃은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했다.
한편, 그들의 소란 때문에 곤히 자던 나머지 한 명도 깨어나 버렸다.
??
자다 깬 레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서로 얹혀있는 데이지와 바람꽃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내 꼬리가 쟤한테 있지…?
바람꽃은 저 천진난만한 얼굴이 조금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땅콩. 쟤도 데려가자."
"응?"
이왕이면 고생은 나누는 게 낫다.
바람꽃은 마을 최고의 사냥꾼인 아빠의 말을 잊지 않았다.
**
해님이 막 떠오른 이른 아침.
엇비슷한 크기의 세 꼬마가 일렬로 복도를 거닐고 있다.
"땅콩이 때문에 아침부터 무슨 난리야?"
그들 중 선두에 선 바람꽃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살랑거리는 꼬리를 뒤따르던 데이지가 억울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치만. 피터가 위험한 걸…?"
"흥, 그거 개꿈이거든!"
바람꽃이 홱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뜨악한 데이지가 귀를 틀어막으며 몹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귀 아파… 그리고, 개꿈 아닌데…."
개 꿈. 헤헷.
가장 후미에 있는 레일라가 뭔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는 삐죽 솟아난 바람꽃의 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쟨 어딜 보는 거야.'
바람꽃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꼬마의 눈빛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레베카님의 딸이라더니….
본능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너네들 잘 따라와."
바람꽃의 안내를 따라서 도달한 곳은 복도 끝방이었다.
의외의 장소였기에 데이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긴 아줌마 방인데."
"여기서 냄새가 나. 글구…."
갑자기 바람꽃이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자신의 코를 틀어막으며 덧붙인다.
"…술내새 나. 만이"
술냄새?
데이지는 코맹맹이 소리를 듣고서, 자기도 덩달아 킁킁하고 냄새를 맡아봤다.
…아! 진짜로 알싸하고 달달한 냄새가 났다.
킁킁!
레일라 또한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코를 울리고 있었다.
두 꼬마가 열심히 술냄새를 맡고 있을 때ㅡ
"에휴, 내가 못 살아. 남자들은 술이 웬수라니까아?"
바람꽃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보다 높아진 목소리였다.
데이지는 털뭉치의 어깨가 조금 올라간 것을 알아차렸다.
"맛도 없는 걸 왜 좋아하는 지 모르겠어~ 아, 너네들은 잘 모르지?"
"……."
바람꽃은 어쩔 수 없네, 하고 고개를 절레 저었다.
데이지에게는 그런 털뭉치가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벌컥.
한편, 레일라는 무심하게 문을 열어버렸다.
방문 너머에서 달짝지근한 와인 냄새가 확 풍겨온다.
"켁!"
미처 코를 막지 않고 있던 바람꽃이 휘청거렸다.
하기야 데이지에게도 어지럽다고 생각되는 짙은 술냄새였다.
데이지는 흐느적거리는 바람꽃의 겨드랑이에 양손을 끼워 부축했다.
"저기, 괜찮아?"
"하으으…."
…털뭉치의 눈이 핑핑 돌고 있었다.
데이지는 그게 참 신기하는 생각을 했다.
아빠!
레일라는 그들을 신경쓰지 않고 방 안으로 쫑쫑 들어갔다.
그녀의 목적지는 침대에 불룩하고 솟아나 있는 이불 위였다.
하얀 꼬마가 그 위로 요란하게 뛰어들자ㅡ
"으겍…!"
이불 속에서 개구리가 밟힐 때 나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이윽고, 끙끙거리는 앓는 소리가 들리더니…
"……."
곧 쥐가 죽은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레일라는 이불 위에 걸텨 앉은 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이불을 팡팡 치면서….
"힝, 족제비가 죽었어…."
문득 정신을 차린 바람꽃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
데이지는 그 말에 흠칫하고 놀랐다.
일단 이상한 털뭉치를 놔두고, 곧장 피터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ㅡ
"땅코옹… 나 버리자마아…!"
얼굴이 붉은 바람꽃이 울먹거리며,
찰거머리처럼 데이지의 다리에 매달렸다.
"으익, 저기, 놔 줘… 이거 놔 줘…."
"가지마아… 나 버리지마아아…!"
왜, 왜 이래?
왜 털뭉치가 이래?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데이지는 어쩔 바를 몰랐다.
도움, 도움이 필요해! 대인관계가 서툰 그녀는 그저 눈을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얘, 도와줘어…."
??
절실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하얀 꼬마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헤헤.
레일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반면, 데이지는 누가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며 울상을 지었다.
"피터어, 도와줘어어!"
...괜히 구하러 왔다가 곤경에 처한 듯한 상황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