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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81화 (81/117)

〈 81화 〉 어느 한밤의 회상

* * *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흐릿한 시계.

­팡! 팡!

무언가 내 위에 올라타 방방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음에도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 감각이 굉장히 둔했다.

또 멍한 머리는 자꾸만 지끈거려서 생각하는 게 버거웠다.

결국 나는 나를 깔고 앉은 괘씸한 녀석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사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저 눈을 뜨고서 확인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귀찮아.'

진심 모든 게 귀찮았다.

몸이 너무 나른하고 무기력했다.

지금의 나에겐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올라올 거 같네.'

속이 메스껍고 눈이 핑핑 돈다.

분명 누워있는데도 몸은 하늘로 붕 뜨는 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혀 반갑지 않은 감각이었다.

'시바, 이제 술 안 먹을거야….'

나는 또 한 번 지키지 못할 다짐을 되뇌었다.

그런데, 이번 숙취가 역대급이었다.

언제 누가 와인이 숙취가 심하다더니, 그게 과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으, 머리 깨질 거 같아.'

나는 치 떨리는 두통에 괴로워 하며.

지난 날의 나를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필름이 끊긴 기념적인 밤.

어젯밤의 일이 파편처럼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한다.

­짠!

맑은 소리와 함께,

투명한 글래스에 담긴 와인이 찰랑거린다.

붉은색이 방 안에 켜둔 촛불을 따라서 반짝인다.

노을처럼 따듯하고 아름다운 붉은빛이었다.

나는 그 붉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황홀하다고 생각했다.

­꼴깍.

서로의 어깨가 맞닿는 거리였다.

그녀가 목을 축이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린다.

이대로라면.

­두근.

그녀에게 내 숨소리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게 못내 부끄러웠던 나는,

소음을 숨기기 위해 붉은색에 취하고자 했다.

"크으~ 아, 큰일이네. 술이 달아…."

내가 입맛을 쩝 다시며 중얼거리자,

평소보다 한층 붉어진 레베카가 나를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럼 다행이잖니? 쓴 술보다야 훨씬 나으니."

그리 말한 그녀가 안주를 집어주었다.

눈앞에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가락이 아른거린다.

"그건, 뭐… 그렇죠?"

나는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살짝 깨물었다.

그럼에도 내 입술에 조금 닿아버렸기에 그 부분이 신경쓰였다.

"키킥, 그럼 된 거지."

레베카는 내가 오물오물 받아 먹는 것을 흐뭇한 눈으로 봤다.

…평소에는 먹여주다가, 입장이 반대가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레베카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깨끗이 핥고서 잔을 채운다.

이윽고, 자기 딸과 똑닮은 미소로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짠?"

술을 좋아하는 드래곤은,

내가 말한 '짠'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다만, 아직 낯설어서 그런지 수줍은 게 말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허나 크게 웃으면 삐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써 미소만 지었다.

"네. 좋아요."

**

'…그 다음에는 뭐했더라.'

여기까지는 필름이 선명하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기억이 듬섬듬성했다.

아무래도 너무 방심했나보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을 너무 초장부터 들이부었다.

'아깝네.'

레베카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는데…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으로 보아하니 별 거 아닌 잡담이나 했던 것 같다.

대충 레베카가 도착한 북부가 어떤 곳인지.

하루 동안 애들이 잘 지내는지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다.

'아.'

문득 인상 깊은 게 하나 떠올랐다.

…어쩌다보니 레베카가 울어버렸다.

그건 도수를 알 수 없는 와인을 6병 정도 비어냈을 때였다.

"레베카, 이거 바바요. 애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거 그렸어요~"

화장실을 갔다오는 김에,

낮에 애들이 그린 그림을 가져왔다.

레베카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필름 끊길 것 같아….'

아직 내 주량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기에.

슬슬 걱정된 내가 잠깐 술을 깨려고 꺼낸 주제였다.

"어머, 아이들이 그린 거라고?"

꼬맹이's의 고사리손를 상상하는 듯이.

홍조를 띈 레베카는 기대가 된다는 눈으로 웃었다.

그녀가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천천히 그림을 넘겼다.

"음. 이번에는 맛있다고 안 그래야겠구나."

레베카는 데이지의 그림을 보며 알 수 없는 말을 했고.

바람꽃이 그린 그림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림에 대해서 설명해주자, 선선히 고개를 끄덕끄덕였다.

"그렇구나. 잘 모르겠지만, 잘 그린 것 같구나."

"크크, 인정."

나는 사심이 가득한 레베카의 평가가 낄낄 웃었다.

이윽고 마지막이 한 장이 되었을 때ㅡ

레베카의 딸, 레일라가 그린 그림이 나왔다.

참고로 꿈에 나올까 두려웠던 그로테스크한 작품은 미리 빼두었다.

"이건…."

그 그림은 비교적 어설펐던 애들의 그림과 수준이 달랐다.

레일라는 예술에 재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그림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새하얀 백지를 채운 것은ㅡ

두 명의 남녀.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꼬마 아이.

비록 크레용의 색깔이 부족했기에 표현이 모자랐지만.

…키가 큰 여자의 머리카락 만큼은 눈에 띄는 빨강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드래곤은 망각하지 않는다.

[애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거 그렸어요.]

그렇기에,

레베카는 내가 처음에 내뱉은 말을 떠올린다.

"……고맙구나."

목이 메인 목소리에 알싸한 냄새와 달달한 장미향이 느껴졌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어깨가 아주 작았다.

다행히도, 레베카는 많이 울지 않았다.

…내가 온갖 광대짓을 하고, 일일이 대작해가며 분위기를 띄웠다.

"레헤카, 레헤카! 소, 소오가 우스면 머까요? 바로~ 우, 하하!! 아하하하하."

"…그대여. 이제 적당히 하렴."

물기로 반짝이던 루비색 눈동자가 차갑고 서늘했다.

"……."

나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침묵이 흐른다. 게다가 밤이 깊어서 그런 지 방 안이 너무 고요해진다.

'으, 너무 졸린데….'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한계였기에,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무리인 듯했다.

내가 꾸벅꾸벅 졸 때 쯤.

"…그대에겐…."

문득 레베카가 나를 보며 무어라고 말했다.

당시에 너무 피곤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대사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대가 내게 바라는 게 있다면… 그, 내가 뭐든지 들어주마….

**

…레베카가 뭐든 해준다라?

어째서인지 소원을 들어주는 어느 만화 속 신룡이 떠올랐다.

아, 그러면 이건 국룰인데.

'여자아이의 팬….'

…아직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병신 같은 이상한 드립이 떠오르고 지랄이다.

그리고.

……몇몇 위험한 망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소원을 빌었던가?'

으음, 모르겠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때가 막바지라서 기억이 깔끔하게 날아가 버린 듯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필름이 끊겼다.

'시발, 뭔가 실수한 건 아니야??"

…아주 불안한 감각이 들었다.

술에 꼴아서 가족과 친구들한테 전화로 구질구질하게 굴던 흑역사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일단 애들 보러 간건 기억나는데'

나는 조각난 기억의 필름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일단 레베카랑 같이 애들을 보러 간 것까지 생각났다.

애들이 감기 걸릴까봐 이불을 덮어주고 왔었다.

그리고.

­음, 여기서 자는 건 아닌 것 같구나. 내 방에서 자는 게 어떠니?

레베카가 자신의 방에서 자라고 충고했었다.

술 냄새가 많이 나서 애들에게 민폐라는 모양이었다.

나는 일리가 있다며,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과여어언! 눈나, 제가 선두를 뚫겠습니다아아!! 뒤따라 오시지요오오!

­그대여… 이제 슬슬 정신 좀 차리렴.

'그럼, 여긴 레베카의 방인가?'

거기까지 떠올리는 것이 내 한계였다.

그 이상은 떠오르는 것이 없거나와ㅡ

"피터 살려줘어!"

반쯤 잠들어 있는 의식에,

어린아이의 간절한 목소리가 닿았기 때문에.

**

­번쩍.

마치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아 넣은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정신에 불빛이 들어온다.

"으으…."

몸이 무겁다.

그리고 무지하게 피곤했다.

나는 애써 무기력함을 떨쳐내고 일어나려고 했다.

­?!

그런데, 무언가 내 가슴 죽지에 앉아있었다.

몸이 기우뚱하며 구를 뻔한 녀석을 본능적으로 받쳤다.

"…머야."

체구가 작고, 여러모로 새하얗다.

이로써 내가 기절한 동안에,

나를 방석 삼고 있던 범인을 알 수 있었다.

­헤헤, 아빠!

레일라가 나를 마주보며 배시시 웃었다.

코앞에 보이는 새하얀 미소에 짜증이 도로 들어가버렸다.

'나참, 웃기는.'

나는 나도 모르게 따라서 웃으려다가….

…누군가를 닮은 루비색 눈동자에, 어쩐지 가슴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

그런 나를 보며 아가용이 입을 오물거렸다.

숙취일까…?

왠지 모르겠지만 식은땀이 좀 났다.

"피터어…!"

상황을 보아하니 급한 일이 따로 있었다.

나는 생각을 뒤로 미뤄두고 레일라에게 부탁했다.

"아니야. 근데 일단 내려와 줄래?"

­끄덕끄덕!

그래, 말을 잘 들으니 참 좋다.

한층 가벼워진 나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어째 방 안이 난리도 아니었다.

"힝, 가지마아아아아."

"으, 피터, 나 도움, 도와줘…."

아직 흐리멍텅한 시야 속에서 보이는 것.

널브러진 채로 친구의 발목을 붙잡고 힝힝 울고 있는 바람꽃.

발목을 붙잡힌 채로 어쩔 줄 몰라하는, 구슬픈 표정의 데이지.

­팡팡!

그리고….

신이 난 얼굴로 침대에서 방방 뛰어 놀고 있는 레일라까지.

"이게 무슨…."

…이것도 지옥인가?

뭐랄까, 아주 하찮은 느낌의 지옥이었다.

"흐, 피터! 털뭉치, 이상해!!"

데이지가 나를 구원의 동앗줄처럼 쳐다봤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바람꽃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무슨 일인데…."

나는 숙취로 비틀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지근거리까지 다가가자,

댕댕이가 이슬이 맺힌 코발트색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뭔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조제비, 사라있어써?!"

"뭔데. 잘 살아있는 날 왜 죽여…."

나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조곤조곤 달래며 바람꽃을 관찰했다.

"조제비이이……."

평소의 까칠함은 어디가고….

도로변에서 주인을 잃어버린 포메라니안처럼 처량해 보였다.

또 얼굴도 굉장히 붉고, 혀도 꼬부라져 있었다.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딱 주사를 부리는 것 같았다.

'…취한 건가.'

나는 멀쩡해 보이는 데이지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얘 술 마셨어?"

"아니! 갑자기 이랬어. 문 열었는데… 갑자기 울면서 앵겼어!"

데이지가 방언이 터진 것처럼 빠르게 말했다.

아무래도 댕댕이에게 시달린 게 무척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니까 냄새 맡고 취한 거다?"

"응, 그건 모르겠는데…."

내가 못 미더운 피해자에게서 상황을 듣는 중ㅡ

문득, 혼자서 울음을 그친 바람꽃이 배시시 웃었다.

"족제비이어, 히히 술냄새나아~ 진짜 실허~"

…너 뭐니?

도대체 싫다면서 왜 웃는 건지 모르겠다.

'전나 피곤해… 좀 더 자고 싶어….'

숙취 때문에 그냥 쉬고 싶었다.

나는 댕댕이를 경계하고 있는 데이지에게 넌지시 물었다.

"뎃지야, 혹시 해 떴어?"

"응. 쫌 전에."

"아아…."

그니깐, 밥 차릴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자는 건 그른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참 시끌벅적하다.

앞으로도 조용한 아침은 글렀다는 예감이 들었다.

**

시간은 흘러.

어느덧 닷새가 되었다.

골골거리는 테오를 케어하고.

골방에 가둬둔 시어도어를 갈구고.

세 꼬마들과 놀아 주었을 뿐인데도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나는 반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일이면 눈보라가 그칠 것 같구나.

"그럼 내일 아침에 오시겠네요?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삼일 전, 레베카로부터 수인족 누나들을 무사히 마을로 돌려보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기상이 악화되어 장거리 텔레포트를 할 수 없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나 눈보라가 오는 날에는 공간이동 마법이 어렵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상악화로 항공기가 못 뜨는 이유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레베카 복귀 기념 환영 파티라도 열까요?"

­아니, 사양하도록 하마. 쯧, 벌써구나.

오늘도 반지의 배터리가 금방 닳아버렸다.

감질나는 통신 수단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신형 좀 개발 안해주나 모르겠다.

­ 내일 보자꾸나. …피터.

"…네, 내일 봐요. 레베카."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안부를 전했다.

담백한 인사였지만 담긴 뜻은 깊었다.

레베카가 북부로 떠난 날.

그 날 이후로 그녀와는 이것저것 상황이 맞지 않아서 만날 수 없었다.

결국 그로부터 그녀와는 엿새만의 재회하는 셈이었다.

'...그 때, 실수 안 했겠지?'

나는 설렘인지 걱정인지 모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일이 오기를 바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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