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여정(1)
* * *
높고 푸르른 겨울 하늘.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불지 않은 화창한 날씨다.
태양이 부쩍 차가워진 대지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그런 날이었다.
맑디맑은 하늘 아래,
화르르륵.
도시 한복판에서 불꽃과 함께 검은 구름이 피어오른다.
짙고 매캐한 연기였다. 그대로 두둥실 떠올라서 하나의 기둥을 이루었다.
본디 기둥은 무언가를 받치는 역할이다.
그러나, 저 검은 기둥은 아무것도 떠받치지 않는다.
무수한 군중들 사이에서.
에이미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말뚝 같아….'
타오르는 장작 더미 위에 누군가가 매달려 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다만, 몸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는 넝마를 입고 있었기에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흐, 살려주세요… 아니야… 난, 마녀가 아니야아….
이름 모를 여인의 흐느낌은 광장 끄트머리까지 닿는 듯했다.
불길은 천천히 하늘로 치솟는다.
그에 따라서 여자의 체념이 고통어린 비명으로 바뀐다.
까아아아악, 뜨거워…! 뜨거워어어…!
절규는 말뚝처럼 귓가에 내리꽂힌다.
사람을 산 채로 태워죽인다는 발상.
에이미는 어째서 그게 정화라고 불리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이러한 의문을 들키는 순간ㅡ
그녀 또한 저 여자처럼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침묵한다.
"…저러면 숨이 막혀서 죽는데요. 타서 죽는게 아니라."
문득, 옆에 있던 소년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이미는 하인리히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저 가엾은 마녀가 더이상의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기를 비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세요? 가끔 빵을 나눠주던 수녀 누나였어요. 평범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하인리히의 중얼거림은 그녀에게만 들렸다.
에이미는 소년의 입술을 꼬집으며 작게 소곤거렸다.
"조용히 해. 높으신 분들이 마녀라면 마녀겠지. 괜한 생각하지 마."
하인리히는 그 말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임금님이 평범한 돌을 황금이라고 말하면 황금인 거냐고 반박하고 싶었다.
"근데, 진짜 나쁜 사람은 멀끔하게 생긴 사람이래."
그 때, 에이미가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내가 들은 이야기에서 그러더라고."
그녀의 눈은 태양처럼 눈부신 금발의 청년을 향한다.
**
"저기요, 아저씨. 쟤들 저한테 파는 게 어때요? 시세의 몇 배로 쳐드린다니까."
웃는 낯인 갈색머리의 청년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쩍 마른 중년의 사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달싹인다.
"어허, 안된데도! 내가 젖먹이 때부터 애지중지 키운 녀석들이오!"
"나참. 되게 단호박이시네."
청년은 웃는 낯으로 한숨을 쉬는 기행을 보였다.
그러고는 품 속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주머니를 꺼내 밀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누런빛이 주르륵 쏟아진다.
꿀꺽. 중년의 사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아저씨가 개이득인 장사 아니에요? 솔직히 저 애들 몸값이 이 정도는 아니잖아요."
눈대중으로 본 금화만 해도 스무닢이 넘는다.
아무리 말이 귀하다고는 하나, 한 필에 금화 두 닢인 걸 감안하면….
"그, 그렇긴 한데…."
중년 남자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모레 중으로 물건을 수도에 납품해야 하네. 그러니 짐마가 없으면 곤란해."
그는 정기적으로 수도와 지방을 오가며 소득을 버는 소상인이다.
2주 가까이 되는 여정이 무척 지난하고,
도시쟁이들에게 수수료를 떼이는 게 일상이지만…
"상인에겐 신뢰란 생명과 다름없네."
마흔이 넘은 남자는 상인으로서의 책임감과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일확천금이 상당히 아쉽지만….
상인은 청년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쯧쯧, 이 아저씨가 낭만이 있네. 상인이면 이득을 쫓고 살아야지. 뭔 놈의 얼어죽을 신뢰야."
웃음기를 지운 청년이 혀를 쯧 차면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겐가?"
"흠, 상인에게 신뢰는 생명이다…. 인정, 그거 좋은 말이예요. 그런데, 그래서 도시 깍쟁이들이 아저씨 물건 제대로 팔아주긴 해요? 아저씨 볼이 홀쭉 들어간 것 좀 봐."
상인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가 도시에서 버는 수익은 간신히 손해만 보지 않는 정도였다.
도시쟁이들은 그의 노력을 악착같이 깎으려는 속물 뿐이니까.
청년은 낯빛이 어두워진 상인을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달싹인다.
"이건 아저씨가 제 아버지 같아서 말해 드리는 겁니다. 지금 도시로 들어가면 후회할 거예요. 거기 난장판이거든요."
청년의 입에서 놀라운 정보가 흘러나왔다.
문득 상인은 황도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를 떠올린다.
정상적인 것과 거리가 먼 불길한 연기였다.
불미스러운 사건을 전해들은 탓인지, 가슴 속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우, 재수가 없구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나…."
"아니죠. 절 만났으니깐 아저씨는 행운인 거죠."
청년이 부리는 넉살에 상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웃는 낯에 점점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같은 자식들이 집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겨울입니다. 든든한 가장이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빠 얼굴을 잊어버린 아이들을 생각해봐요."
중년 남자의 마음이 찡해졌다.
실제로도 그에겐 오우거 같은 아내와 한창 사춘기인 딸아이가 있었다.
이 화상아!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집구석에도 들어오지도 않앗!
그 또한 가정에서 떳떳한 기둥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상인으로 살아오면서 지켜온 신념은 지나치게 확고했다.
텅.
청년이 끙끙 고민하는 중년 남자 앞에 꾸러미를 추가로 내밀었다.
"마차랑 과일주, 그리고 모피값은 따로 쳐드리죠."
"으윽."
중년 사내는 상인으로서의 긍지가 시험에 놓인 기분이었다.
'지금 내 신념을 돈으로 사려는겐가!'
그러나,
"정말로 고마우이…!"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
히이잉.
결국 주인이 바뀌어버린 두마리의 말이 서럽게 울부짖었다.
허나 붉은 머리의 여인이 그들을 지그시 쳐다보자ㅡ
날뛰던 말들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짐승의 본능은 뛰어난 건 건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벌벌 떨고 있는 말을 쓰다듬는 레베카에게 묻는다.
"쟤네들 상태는 어때요?"
"제법 괜찮은 말이다. 조금 손해보긴 했지만 이만하면 상등품이구나."
…조금이 아니라 완전 호구였지만….
용마망의 금전 감각은 정상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어쩌다보니 행상인에게서 말을 살 수 있었다.
이건 오늘 아침에 돌아온 레베카가 황도로 가던 뜨내기 상인을 발견한 덕분이다.
'운이 좋았어.'
우리에게 마차를 이끌어줄 말이 필요했기에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여기서 쓸만한 말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현대 사회에 비하면 일상에서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는 세계관이지만… 그런 만큼이나 말은 유용하고 귀중했다.
변변한 마을에도 제대로 된 말이 없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도시에서 말을 구매하려면 일정한 절차에 따라 제대로 된 신분증이 있어야했다.
물론 수도에서 말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일단 레베카의 신분은 표면적으로 귀족이었으니까.
그러나.
떠들썩한 황도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비싼 값을 치뤘더라도 수월하게 이동 수단을 얻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아무쪼록 금이 썩어넘치는 레베카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의 재력에 충성을 바치고 싶을 정도였다.
푸르릉.
갈색 말과 점박이 무늬의 말.
두 녀석 모두 피부에 은은한 광택이 돌고, 갈기가 풍성했다.
애지중지 키웠다는 상인이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다. 말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보이기에도 썩 괜찮아 보였다.
게다가 두 말 모두 성격이 유순했다.
뭐, 최상위 포식자가 곁에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는 함께할 두 녀석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마침 암수가 나눠져 있었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것을 읊는다.
"이제 갈색은 후치, 너는 제미니야."
"음?"
말을 길들이는 레베카가 나를 돌아본다.
엿새만에 보는 루비색 눈이 너무나도 고혹스러웠다.
멀어져 있던 것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그녀가 몰라보게 변할 리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루비색 눈동자를 마주보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그 이름에 어떤 의미가 있니?"
어수선한 나와 다르게,
레베카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옅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의미라… 어라?'
나는 그 동그란 물음을 멍하니 보다가 뭔가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이 곳에 드래곤까지 있었다. 노린 것처럼 절묘한 구성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큭큭 웃으며 말한다.
"왠지 주인공이랑 히로인이라면 오래 살 거 같지 않아요?"
"??"
그러자, 루비색 눈동자가 두어번 끔뻑거렸다.
가끔… 천 년이라는 연식에 어울리지 않게도 깜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푸르릉!
"흐익!"
"…! 아 씨, 땅콩 때메 더 놀랐잖아!"
……??
진짜배기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동글동글한 녀석들이 구석에서 층층이 구겨낀 채로, 후치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뭔가 찐빵 같네.'
특히나 체구가 작고 새하얀 레일라가 그렇게 보였다.
아가용은 가장 밑에 깔려 있어서 금방이라도 찌그러질 것처럼 같았다.
"너네들 거기서 뭐해?"
"보면 몰라? 말 보러 왔자나."
아… 그렇구나…?
탑의 꼭대기인 댕댕이가 너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순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피터, 얘 무거워…."
문득, 바람꽃의 받침대 노릇을 하고 있는 데이지가 울상으로 말했다.
나는 불쌍한 꼬꼬마가 안타까워서 쓴웃음을 지었다.
'용사랑 드래곤도 깔고 앉는 댕댕이라…?'
어느새 데이지와 레일라의 처지가 완전 떡락했다.
**
사연 많은 홈리스걸 데이지.
심심하면 눈사람이나 굴렸을 바람꽃.
그리고, 그동안 갇혀 지냈던 레일라까지….
'…라인업이 눈물나네.'
새삼 느끼는 건데.
우리 꼬마들에겐 말이라는 생물과의 인연이 멀어 보이긴 했다.
아마 쟤네들이 가까이서 말을 관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푸르르.
"뭐, 뭘 봐!"
…넌 왜 말한테 시비 걸어?
나는 기선 제압에 실패한 댕댕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나 꼬맹이들은 네발 달린 식구에게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좀 재밌네.'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왠지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앞으로 함께 할 동물 친구이니 일찌감치 적응시키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나는 말과 함께 구입한 마차에서 홍당무를 몇 개 꺼내왔다.
이윽고, 말을 보느라 멍하니 있는 데이지에게 하나 내밀었다.
"뎃지야, 이거 먹여볼래?"
"…당근…."
꼬꼬마는 내가 내민 당근을 보더니 슬쩍 뒷걸음질했다.
누가보면 무시무시한 흉기인 줄 알겠네….
나는 어이없이 웃고서, 겁 먹은 듯한 꼬꼬마에게 새로이 알린다.
"이거 후치랑 제미니 꺼야."
"아, 말…!"
요 꼬마 녀석이 방긋 웃는 이유가 뭐려나…?
과연 오늘 점심이 당근 스튜인 걸 알고도 그리 웃을 수 있을 지 궁금했다.
나는 속내를 숨기고 데이지의 손에 당근을 쥐어줬다.
예전에 체험장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넌지시 말한다.
"먹이를 줄 때, 손가락은 내밀면 안돼."
"아, 알겠어."'
데이지가 굳은 얼굴로 끄덕거렸다.
그런데, 고사리손에 꼬옥 쥐고 있는 당근이 어쩐지 구조신호처럼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여기 내가 있지 않니?"
문득 레베카가 호언장담했다.
그녀의 세로로 갈라진 동공은 네발 달린 미물을 향해 있었다.
…….
후치와 제미니가 잘 만들어진 석상 같았다.
…적어도 말들이 사고치는 일은 없어 보인다.
여러모로 안쓰러운 말을 위해서라도 도움을 줘야겠다.
"뎃지. 후치가 배고프대. 하루종일 못 먹어서 굶어죽을 것 같다는데?"
"엑? 진짜? 어떡해…."
데이지는 동정 어린 눈으로 후치를 보았다.
그녀 또한 한때 거리를 떠돌았기에, 공복의 괴로움을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빨리 먹어."
우리 꼬꼬마가 불쌍한 말을 위해 용기를 냈다.
그러나, 배고픈 후치는 데이지가 내민 당근을 심드렁한 얼굴로 쳐다봤다.
"말아?"
푸르!
결국 후치가 주둥이를 내뺐다.
척봐도 거부 반응 같다. …눈치 없는 상인 아저씨가 말 새끼한테 아침을 두둑하게 먹인 모양이다.
"씁."
그때, 용마망은 말 못하는 짐승에게 눈치를 줬다.
히이이….
도도하던 후치가 덜덜 떨면서 주둥이를 벌렸다.
당근을 먹지 않으면 자기가 먹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작. 아작.
갈색말이 아이가 건네준 당근을 조심스럽게 베어 문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언제 겁 먹었냐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와아…."
데이지가 홀린 것처럼 작은 손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온 말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진다.
"…따뜻해."
말은 그 여린 손을 배려하듯이 고개를 좀 더 기울여준다.
데이지는 그런 말의 호응을 자랑하듯이 내게 보며 말했다.
"피터, 얘 좀 봐! …왜 귀여워? 나 어떡해…?"
"어…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우리 꼬꼬마가 언어능력이 고장날 정도로 감동했다는 건 알겠다. 처음으로 겪은 말에 대한 데이지의 감상이 매우 긍정적임인 듯했다.
"이힛, 간지러."
푸르릉.
언제 친해졌는지….
후치가 마치 애교를 부리듯이 데이지에게 뺨을 비볐다.
"흐응, 제법 영리한 녀석이구나."
소녀와 놀아주는 말을 물끄러미 보던 레베카가 중얼거렸다.
나 또한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숫말은 어디에 붙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지 아는 것처럼 보였다.
"족제비, 족제비!"
빠빠!
갑자기 두 꼬마가 내 바지자락을 쭈욱 잡아당겼다.
나는 황급히 바지를 사수하며, 내게 들러붙은 바람꽃과 레일라를 확인했다.
하얀 볼이 보기 좋게 상기되어 있다.
눈망울은 숨길 수 없는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얘네들이 왜 이러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당근 줘! 이번엔 내가 줘볼래!"
당근, 해볼래요!
나는 후치와 제미니가 배부르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 2개만 주자."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이히이잉잉…!
그날, 후치와 제미니는 애들로부터 당근을 4개씩 받아 먹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