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여정(2)
* * *
겨울.
한 때 녹음으로 무성했을 세계가
잠깐 쉬어가는 계절이다.
푸르른 하늘 아래에,
펼쳐진 평원은 색채가 옅은 갈빛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은 드넓음.
그 사이를 굽이치는 외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람과 우마가 드나드면서 만들어진 길.
그 위로.
달그락, 달그락.
두 마리의 말이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마차는 적막한 풍경 속에서 천천히 나아간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돌아봐본다.
어느덧 멀어진 길이 구불구불한 강처럼 보였다.
나는 허공에 입김을 피우며 중얼거린다.
"평화롭구만."
겨울을 맞이하여 북부로 가는 길은 무척 한적했다.
황도에서 터져 나가는 마차의 행렬을 보고 걱정한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우리들만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듯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전부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는 걸까?
어쩐지 북쪽에서 내려온 귀족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며칠 전이 제 1 황녀의 성년식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긴… 태양과 겨울은 사이가 영 나쁘지.'
나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활자를 훑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작중에서도 황가와 북부는 앙숙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제국이라는 한 울타리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현 황제가 겨울성의 주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찬탈로 황제가 된 요하네스가 북부가 지닌 막강한 군사력을 두려워했다.
여타의 소설 속 클리셰처럼,
이쪽 북부 또한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라고 불린다.
'눈 밖에 없는 곳에서 뭘 지키냐고 따지고 싶다만….'
그러나, 북부 대공이 지키는 겨울성은 절대적인 요충지였다.
북부는 온통 설원으로 뒤덮혀 있다.
극한의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고자 한다면… 깎아진 두 산맥 사이에 있는 단 하나 뿐인 길목을 지나가야한다.
그런 낙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겨울성이다.
수인을 포함한 이종족,
기괴하고 흉폭한 괴물,
그리고… 마족의 국가와 맞닿는 최전선.
그것이야말로 겨울성이 제국의 방패라고 불리는 의의였다.
사실상 인류의 방패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심시티는 너무 기가 막혀도 문제라니.'
너무나도 뛰어난 천혜의 요새가 감옥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북부와 경계 너머의 세력에게 적용되는 양방향의 족쇄였다.
차디찬 겨울에 몰린 이들은 하나 뿐인 출구인 겨울성을 호심탐탐 노린다.
겨울성은 언제 닥칠 지 모를 그들의 적을 쉴 틈없이 경계해야 한다.
'으, 극한 직업이 따로 없네.'
국경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키워야하는 것이 북부의 입장이다.
그런데, 황제는 그 속도 모르고 견제하느라 북부에 대한 지원을 나날이 줄이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나마 얌전한 수인족까지 건드렸으니…….
모르긴 몰라도, 겨울성주는 울화통이 터져나가고.
아군한테 어뷰징해대는 현 황제가 존나게 미울 것이다.
'하여간 콩가루 국가라니까.'
이래서 고여있는 물이 안된다.
천년이나 강대국이라고 떠받들어주니까 나라가 이 모양 꼬라지다.
나는 상념을 털어내듯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덜컹하고 흔들리는 마차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마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자동차와 또 달라서 새롭지만….
역시나 비포장도로의 매운맛에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마부석으로 다가가,
"야, 마차는 처음 몰아봐? 운전 실력이 왜 이래."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멸치같이 생긴 남자를 꾸짖었다.
내 이죽거림에도, 푸른 눈의 남자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승마는 귀족의 기본 소양입니다."
저 태연한 말투가 괜히 열 받는단 말이야.
나는 부조리한 걸 알고 있음에도 그를 갈구기로 헀다.
"근데 왜 마차가 흔들려? 이 새끼야, 하마터면 내 허리 박살날 뻔했잖아."
"그건 제 소양이 아닙니다. 정 힘드시면 길이 온전하기나 비십시오."
이 새끼는 여전히 지지않고 따박따박 말대꾸했다.
나는 그의 주둥이가 펀치를 먹이고 싶어졌다.
"야, 잘해라. 주먹이 울고 있다."
"잘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슬프시다니 안타깝군요."
역시 이 새끼랑은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대체 뭘 믿고 대가리가 뻣뻣한 건지….
'아니, 아무것도 없으니까 용감한가?'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
한 때 공작가의 차남이자,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연금술사였던 자.
그런 그는,
"그러고 보니 이번이 마차를 모는 건 처음이군요. 조금 신선합니다."
…한낱 마부로 몰락해 있었다.
나는 급격한 신분 변화에도, 한가한 낚시꾼처럼 편한 얼굴인 시어도어를 보며 한숨을 내셨다.
비록 마나는 봉인되어 있으나, 그의 육체를 구속하는 것은 없었다.
재수 없게 포로 신세가 되었으니 한 번쯤 탈출을 감행할 법도 한데….
'이 미친 놈은 도망갈 생각을 안 하네.'
오히려 시어도어는 제 집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 보였다.
뭐, 덕분에 마부로 요긴하게 써먹고 있긴한데….
그래도 이 새끼가 사라져 주는 게 제일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제발 어디 한 번 걸려라.'
혹시라도 수작 부리면 팔다리 하나 똑 부러뜨려야지.
나는 마부로 전락한 연금술사를 흘겨보다가 마차 안으로 돌아갔다.
**
새하얀 준마가 바람처럼 뛰쳐나간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숲은 잔상처럼 남겨진다.
남녀를 태운 백마는 드디어 속도를 늦추었을 때.
남자의 너른 품에 안겨있는 소녀가 그제서야 잊고 있던 호흡을 몰아쉬었다.
"기사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저 사람들이 왜 쫓아와요?"
엘리는 미칠듯이 뛰는 심장을 꾹 누른 채로 물었다.
드디어 행방불명된 오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틀 전, 어째서인지 흙먼지와 함께 검과 갑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그들을 향해 왔다.
엘리는 처음에는 도시 특유의 환영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를 데리고 온 기사님은 그들을 보자마자 말머리를 돌려 숲쪽으로 내달렸다.
'대체 왜 도망치는 건데?!'
당시 엘리는 여러모로 따지고 싶었지만.
심각해보이는(기사님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기사님 때문에 며칠 째 입을 다물어야했다.
그러나, 이 쯤되면 화전민 출신인 못 배운 소녀라도 알 수 있다.
그녀와 이상한 기사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
'어째서?'
엘리는 자신이 마을에서 똑똑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오빠에게 잽싼 다람쥐 같다는 평가를 많이 들었다.
'다람쥐는 귀여우니까!'
그런 영리한 머리로 가능성이 높은 가정을 떠올린다.
헉, 설마…!
뭔가 그럴듯한데?
아니, 에이 설마~ …이걸 물어도 되려나?
엘리는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그러고는 한결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 기사님, 혹시… 범죄자예요? 그것도 나라에서 쫓기는…."
[…아니다.]
수도사는 가면 너머로 그 맹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엘리는 어쩐지 석역찮은 기사의 태도에 불안한 마음이 새록새록 들었다.
'끙, 여신님! 대체 제가 당신한테 뭘 잘못했나요…?'
그녀는 당장이라도 여신에게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것이라곤…
오빠를 비롯한 마을 사람의 행방을 찾는, 어딘가 이상한 기사님에게 끌려온 게 전부였지 않은가!?
억울했던 엘리는 남자의 가슴팍에 뒷머리를 콩콩 찍어대며 말했다.
"아니긴 뭔데요! 사실대로 말해요!"
[알아서 좋은 것 없다. 그리고 얌전히 있어라. 다친다.]
"……."
엘리는 목소리가 미칠 듯이 좋은 수도사가 미워졌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에 은근히 마음이 놓이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아 씨, 이 사람… 납치범인데….'
처음에는 자신을 강제로 데리고 나온 기사가 두려웠다.
언제 살해당할 지 모른다는 공포에,
내숭이라는 가면을 쓰고 일부러 밝고 스스럼 없이 행동했다.
엘리, 오빠가 계속 곁에 있어줄 수 없을거야. 그러니까, 괜찮은 남자를 잡을 수 있는 비결을 알려줄게.
오빠의 말대로, 마을 남자들은 그녀의 톡톡 튀는 행동에 호감을 보였다.
엘리는 불쌍하고 예쁘게 보이면 남자들이 그녀를 아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다리는 병신이지만,
엘리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법을 터특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엘리는 그 가면을 쓴 생존 행위를 잊어버리곤 했다.
…더이상 수상한 기사가 두렵지도, 밉지도 않았으니까.
'…몰라. 전부 오빠 때문이야!'
엘리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오빠를 탓하며,
"에휴. 그럼, 고생하는 우리 하인커스가 쉴 곳이나 찾죠."
[…그렇군.]
그 결말을 알 수 없는 운명에 등을 기댔다.
운명은 두근두근거리는 나지막한 심장소리였다.
**
판타지 소설의 애독자로서,
마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허나 여행이란 과정에 낭만 뿐인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나무바퀴가 굴러가는 소음이 크다.
말이라는 생물이 이끄는 마차는 불규칙적으로 덜컹거린다.
마차가 돌부리를 지날 때마다 크고 작은 충격이 찾아온다.
이런 걸 보면….
현대의 일상에서 사소한 편의를 모르고 지나친 게 많았다.
'마법으로 이런 거 해결 못하나.'
분명 마탑이란 게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부디, 그 쪽 동네에선 잘 알지도 못할 이론은 집어치우고, 생활에 도움되는 거나 발명해 줬으면 좋겠다.
'일반인은 마차에 타고 있는 것도 힘드네….'
여기서 괴로운 건 내 허리 밖에 없는 듯했다.
우리 애들은 태생 자체가 남달라서 그런 지 언제나처럼 기운찼다.
단, 한 소년만 빼고.
"우윽, 혀엉… 저, 죽, 죽여줘요…."
나를 애타게 부르짖는 것은 테오였다.
새파란 얼굴로 누워있는 소년을 보니, 불행은 겹쳐서 온다는 말이 생각났다.
…각성 후유증으로 골병 든 김테오는 마차 멀미까지 앓았다.
'참으로 딱한지고.'
나는 여러모로 안쓰러운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관심 있는 예쁜 애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으로 있으려니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흑흑…."
테오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남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취미가 없었다.
깨끗한 천을 얼굴에 드리워주는 게 최선이었다.
"힘내, 임마. 조만간 멀미약 만들어 줄게."
"…그, 그런 거 있었으면, 진작에 만들어주지… 구시렁구시렁…."
테오는 요즘 세상이 많이 편해졌는지 틈만 나면 나한테 찡찡거렸다.
얘가 많이 아프니까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청춘이니까 가끔은 대범하게 받아들여 줬으면 바람이 있다.
'으이구, 사내대장부가 묵직해야지!'
원작에서의 고결하고 자기희생적이던 테오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좀생이처럼 커서 솔로로 살….'
"족제비!"
내가 테오에게 저주 아닌 저주를 내리고 있을 때ㅡ
보리쌀하고 있던 댕댕이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큰일났어! 큰일!"
바람꽃은 특유의 높은 목소리를 빽하고 말했다.
얘는 또 왜 이래?
큰일이라기엔 뭔가 짓궂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었다.
"어, 왜."
분명 별 거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심드렁한 나를 보고도, 바람꽃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이히힛 웃었다.
"그게, 땅콩이. 쉬 마렵대!'
"아… 아니얏아! 나, 나 쉬 안 마려!"
난데없는 공격에, 우리 데이지가 새빨개진 얼굴로 삐약 소리를 질렀다.
"뭔데~ 아까 마렵다며. 아… 혹시 끙이었어?"
"…하지마하지마! 털뭉치, 진짜 하지마!"
제대로 빡친 듯한 데이지가 양팔로 풍차돌리기를 했다.
머리가 좋은 바람꽃은 한 손으로 데이지의 머리를 밀어냈다.
짝짝!
레일라는 헤헤 웃으며, 짜란다짜란다 박수를 쳤다.
...어쩐지 장작을 넣는 느낌이다.
아가용은 벌써 싸움 구경이 재밌다는 사실을 터득한 듯 보였다.
"아니, 뭐 그런 걸로 애를 놀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대소변은 눌 수도 있지….
뭐, 생각하면 우리 애들 나이대에 '이 주제는 민감하게 반응할 만했다. 나도 초등학생 때는 화장실에 볼일 보러가는 친구들 골려주곤 했으니까.
"피터… 나, 아니야."
"그래, 람람이가 개나빴다."
댕댕이의 놀림으로 삐쳐버린 데이지를 내 무릎에 태웠다.
나는 꼬꼬마의 정수리를 손빛으로 살살 긁어주었다.
그런 데이지의 머리카락은 레베카보다 검붉은 색이었다.
원래의 검은 머리도 좋아하지만, 이 색도 오랜만이라서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아가, 굴러다니면 못 쓴단다."
에에.
나는 어느새 제 엄마에게 붙잡힌 아가용을 보며 작게 웃었다.
'레베카의 딸이 둘인 것 같네.'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좀 묘했다.
문득, 내 시선을 눈치챈 듯이 고개를 든 루비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레베카는 예쁜 호선을 그리며 물었다.
"뭔가 할말이 있니?"
요즘 그녀가 전보다 자주 웃는 것 같다.
왠지 마주칠 때마다 웃는 듯해서 나도 덩달아 웃는 일이 많아졌다.
"아, 그냥 보기 좋아서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흘리듯이 웃었다.
그런 대꾸에 레베카가 좀 더 깊어진 미소를 띠며 입술을 달싹인다.
"아, 그치~ 우리 아가.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즐거운듯한 콧소리와 눈웃음이었다.
잠깐 잊고 있던 지난 밤을 떠올리게 했다.
그 때부터 레베카가 조금 변한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전과 다르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좀 더 살갑다고 해야하나?
'뭐, 나쁜건 아니니까.'
나중에 레베카와는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지금은 애들이 온종일 같이 있고,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북부로 가야하니까.
'나중에 이야기할 때가 오겠지.'
나는 레베카와 마주보며 실실 웃었다.
왠지 이러고 있으니까… 뭔가 오순도순한…….
"혀엉… 저, 가끔 세상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워요."
김 테오.
현재 나이 15세.
검은 댕댕이는 한창 그 병을 앓는 중이었다.
이 세계에는 있을리 없는 중2를…
얘는 어쩌다가 각성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왼손에 흑염소가 봉인된 이야기를 들려준게 실수였나?'
앞으로 애들에게 들려줄 이야기에 장난치면 안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
ㅇ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