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여정(3)
* * *
흔히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다행히도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엔 다소 불편하던 마차에서의 생활은 며칠이 지나자 자연스레 적응되었다.
마차 멀미로 끙끙거리던 테오 또한 수상쩍은 연금술사가 제조한 멀미약을 복용하고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한가하구만."
그 뒤로는 이렇다할 문제나 사건이 없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비교적 쾌적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낮에는 마차를 타고 한참 이동하고.
밤이 되면 적당한 곳에 자리잡고 캠핑을 한다.
그 과정은 가족끼리 차박 여행하는 것 같았다.
딱히 하는 것 없어도, 소소하게 즐거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족제비제비."
"뭐야. 댕댕람람댕이."
원래 여행이라는 게 처음에나 흥미로운 법.
며칠 동안 마차 안에만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나 심심해!"
바람꽃이 가장 먼저 지루함을 호소했다.
누가 산책을 두 시간 씩 하는 댕댕이 아니랄까봐… 녀석은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하긴.'
어른인 나도 무료해서 힘이 쭉 빠지는 마당이다.
에너지가 넘쳐나는 꼬마에겐 더욱 힘든 시간일 것 같았다.
"그러게. 너무 한가하긴 하네."
마찬가지로 심심했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바람꽃이 기회를 포착한 맹수의 눈빛을 하며 네발로 쪼르르 기어왔다.
아주 흉폭한 모습의 댕댕이는 내 무릎을 붙잡고,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낸다.
"헤~ 그럼 현랑이랑 향신료 상인 이야기 해주라! 결국 그 둘이 어떻게 돼? 진짜 정말로 헤어져?"
그런 그녀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풍요를 관장하는 늑대가 나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바깥 세상을 모르는 레일라를 위해서 들려준 이야기였는데… 오히려 바람꽃에게 더 취향 저격이었던 모양이다.
"나, 현랑 님이랑 헤어지면 얼간이 상인이랑 가만 안 둘거야!"
'너가 가만 안 있으면 어쩌게?'
나는 볼이 발그레한 꼬마 늑대의 협박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 댕댕이가 작중에 등장하는 늑대 여신님께 제대로 꽂힌 모양이다.
하긴, 요이츠산 보리늑대가 유래없이 매력적인 히로인이긴 했다.
귀여운데 요망한 건 반칙이니까.
'3권까지 얘기했던가?'
마침 답답하고 재밌을 부분이다.
어젯밤에 댕댕이가 잠 못 자겠다고 막 보채던 게 생각났다.
…참고로 바람꽃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잤다.
'아직 시간이 아니긴 한데.'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은 잠자기 전으로 한정했다.
안 그러면 시도 때도 떠들어야 해서 내 삶이 피곤해지니까.
"응? 얘기 해주라, 해줘!"
평소 틱틱거리는 댕댕이가 드물게 애교스러웠다.
찬장에서 간식 하나 꺼내줘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선례라는 게 한 번 있으면 자꾸만 생기게 된다.
나는 그 뒷감당이 자신 없어서 고개를 절레 저었다.
"어허, 기다려."
"으으, 그럼 그 둘이 어떻게 되는 지만 알려줘! 그래서 같이 다녀?"
사소하게 행패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바람꽃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더니 스포일러만 요구했다.
처음부터 내가 거절할 것을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다.
'진짜 궁금한가 보네.'
물론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무래도 결말이 찜찜한 소설은 뒷맛이 안좋으니까.
나만 해도 실시간으로 따라가던 빛길의 엔딩 때문에, 게임 판타지 만큼은 손을 못 대고 있었으니….
"족제비, 왜 얼굴이 왜 그래? 설마 헤어지는 거야…?"
다소곳하게 무릎을 모은 바람꽃의 얼굴이 애절했다.
나는 간절한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응. 안 알려줘."
"아앙, 쫌쌩이!"
뭐, 해피엔딩인데 알려줄 필요가 없지.
"씽, 아려주어…!"
잔뜩 약이 오른 바람꽃이 옷자락을 잘근잘근 물어댔다.
그냥 오물오물 하는 거라서 아프진 않았다.
나는 값싼 대가라는 심정으로 팔 한쪽을 장난감으로 내어줬다.
"피터, 안 아파?"
그 모습을 보던 데이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데이지의 주먹이 꼬나쥐어져 있었다.
나는 황급히 남은 한손으로 작은 머리통을 붙잡고서 대사를 쳤다.
"괜찮아. 팔 하나 쯤이야."
'새로운 시대에 두고 왔다.'
빨간 머리 해적의 두목이 된 기분이 이러할까?
…좀 축축하고 불편하다.
**
판타지 소설에서 여행하면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에피소드가 있다.
의문의 무리에게 쫓기는 귀한 신분의 아가씨,
도중에 우연히 만나게 되는 수상쩍은 미녀 또는 미남,
갑자기 습격 해오는 도적 또는 몬스터 등등….
이러한 극적인 만남이나 위기는 클리셰나 다름 없을 정도로 자주 써먹는다.
그러나,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아무 일도 없네.'
내 경우엔 위기는 고사하고, 몬스터는커녕 커다란 야생동물도 보기 힘들었다. 너무나도 평온한 여정이어서, 한적한 시골 여행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기야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인연이든 악역이든,
누군가와 마주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성가신 일에 휘말리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웹소설에 찌든 뇌가 '몬가, 몬가 사건이 일어날 거야!' 하고 헛소리를 해댔다.
'에잇, 재수 없게시리.'
이러다가 망상이 현실로 이뤄질까봐 두렵다.
내 머저리 같은 머릿속을 비워야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뭐하고 놀면 좋을까.
나는 레베카의 아공간을 뒤적거리다가 적당한 것을 발견했다.
"오, 이거 좋다."
"이제 아주 제 것처럼 다루는구나?"
내가 카드덱을 섞으면서 실실 웃자,
레베카가 핀잔인지, 칭찬인지 모를 묘한 눈웃음을 보냈다.
괜히 찔렀던 나는 용마망에게 굽신굽신 고개를 조아렸다.
"…나중에 제 것도 마음대로 쓰세요."
"오, 기대하고 있으마."
세상에,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부자인 레베카는 개털인 내게도 사양하지 않는다.
참고로 내가 가진 게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선 내가 입고 있는 옷부터가 레베카의 것이었다….
'…나중에 몸으로 떼워야겠네.'
지금의 내겐 배부른 데이지에게 사탕을 사줄 돈도 없다.
가진 게 비루한 몸뚱어리와 빚으로 산 풀떼기 뿐이라는 생각에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떡상할 날이 찾아온다!
나는 우뚝 서게 될 삼년 뒤를 상상하며, 카드덱을 촥촥 소리나게 섞었다.
"피터, 머해?"
"머야? 뭔데? 재밌는 거야?"
와아! 와아!
방금 전까지 모피 더미에서 뒹굴거리던 꼬맹이들이 쪼르르 모여 들었다.
아빠! 멋져요!
고작 카드를 섞는 행위만으로 인기인이 되는 세계라…?
제법 나쁘지 않는 기분이다. 수업 중에 포커나 치던 게 쓸모 없진 않았나 보다.
'그래. 나를 봐라!'
나는 흥이 난 김에 공중에서 카드를 펼치는 묘기를 선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끼이익…!
"끄이익."
아, 급정차 에반데.
갑자기 마차가 멈추고 난리였다.
그 탓에 발이 미끄러졌다. 섞고 있던 카드도 사혼의 구슬조각처럼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헤윽."
"아악, 족제비… 나 눈 맞았어…!"
???
구경하고 있던 꼬맹이's도 대굴대굴 구르고, 눈 먼 카드에 얻어맞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대여, 이 둘은 내가 돌보마."
정신 없는 상황에 레베카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굴러갔던 레일라를 품에 안고 있었고, 환자인 테오 또한 챙겨둔 모습이었다.
"고마워요."
나는 자빠진 데이지를 추스리고, 눈탱이 맞은 바람꽃에게 물었다.
"호 해줄까?"
"으응… 입 냄새 안 나?"
…나 양치 꼬박꼬박하거든?
말하는 뽄새를 보아하니 멀쩡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들 무사한 것 같아서 한시름을 놓았다.
이윽고, 크게 다칠 뻔한 사태에 대한 짜증이 치솟아올랐다. 레베카 또한 표정이 싸늘했다.
"레베카, 잠깐 다녀올게요."
잔뜩 열 받은 나는 마부석으로 나가봤다.
이러한 사고를 일으킨 운전기사에게 톡톡히 따질 셈이었다.
"야, 운전 똑바로 안…."
"아.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인상을 쓴 나를 본 시어도어가 드물게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가 뭘 잘 못 먹었나?'
내가 의아함을 가질 찰나.
어쩐지 겨울인데도, 배경이 묘하게 초록초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서 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한 시선이 느꼈다.
굳이 눈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득했다.
케륵? 케륵?
가래가 끓는 듯한 불쾌한 울음소리였다.
코 끝으로도 짐승 특유의 역한 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시발, 피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도 아니고….'
나는 바라 마지않는 상황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의 숲.
지독하게 못생긴 난쟁이들이 우리가 탄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케륵, 케륵!
놈들은 어린아이로 착각할 정도로 왜소했다.
이족 보행하는 모습이 인간과 유사해 보였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 봐도 확연하게 다르다고 알 수 있었다.
쭈글쭈글한 면상에, 민둥머리, 그리고… 이형의 녹색 피부.
툭 튀어나온 뾰족한 주둥이와 가로로 누운 섬뜩한 동공이 이질감을 더한다.
전체적으로 추악하고 기분 나쁜 외형이었다.
면상으로 선악을 구분 짓는다면, 저것들은 백프로 지옥에 떨어져야할 존재 같았다.
'…진짜 조까치도 생겼네.'
나는 저 심술궂게 생긴 흉물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게 된 괴이였으나…
내가 줄곧 상상해온 모습 그대로의 괴물이었으니까.
아이 정도의 체격을 가지고 있으며.
무리를 짓고, 약탈을 주로 일삼는 소귀(小?).
판타지 세계에서 신출내기 모험가에게 자주 퇴치당하는 최약의 몬스터.
"고블린?"
키릭. 키릭.
놈들의 손에 들린 몽둥이와 녹슨 칼이 유독 흉흉해 보였다.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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