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여정(4)
* * *
케륵, 케륵.
상상 속에서나 등장하던 괴물.
그것들이 바로 눈앞에 있다.
번들거리는 눈깔이 생생했고, 이따금 새어 나오는 숨결이 역겨웠다.
나는 주어진 감각기관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저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유기체였다.
'…잘 만든 모형 같네.'
허나, 너무 지나친 사실감 때문인지 질이 나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멍한 눈으로 허구가 현실이 된 광경을 살핀다.
그 중, 이형(??)의 녹색 피부와 그 깡마른 팔에 쥐어진 날붙이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날이 빠진 볼품 없는 단검이었다.
게다가 녹이 슬은 걸까? 칼날이 칙칙한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모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들.
나는 그들에게 은근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
허나, 막상 필요악과 같은 존재를 마주하고서 품게 된 감상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시발, 스쳐도 파상풍 걸리겠네….'
반가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내게 든 감정은 경계심과 미약한 두려움 뿐이었다.
케케륵, 케케륵!
그러한 내 감정을 눈치챈 것처럼.
마차를 에워싼 고블린들이 개구리처럼 공명하듯이 해댔다.
어쩐지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뻣뻣해진 입으로 함께 조롱 당하고 있는 이에게 물었다.
"야, 저 새, 쟤들이랑 말이 통하냐?"
"미개한 고블린에게 언어가 있을 리가요."
뭘 그딴 걸 물어보냐는 눈빛이었다.
아니,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그냥 고블린들이 바로 덤벼들지 않길래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어봤다.
그러한 내 변명에 시어도어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한다.
"놈들의 영양 상태와 장비가 비교적 좋습니다. 제법 세력이 강한 무리로 보이는군요. 덤벼들지 않는 것은… 겨울철 식량 사정이 넉넉하다는 방증이겠지요. 아무래도 저희를 노리개로 삼은 모양입니다. 종종 그런 사례가 있다고 서적에서 봤습니다."
수다쟁이 연금술사의 추측이 맞든 아니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건 개같은 상황이라는 거다.
'그나마 다짜고짜 공격받지 않은 게 행운인가.'
어쨌든 저 고블린 무리가 굶주리지 않은 덕분에 말이나 마부를 잃지 않았다. 이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는 부분이다.
"할 일도 없는 고약한 새끼들이네."
"뭐, 고블린잖습니까."
시어도어가 어깨를 들썩이며 동의했다.
그거 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도로 들어갔다.
지금은 얼빠진 연금술사를 갈구고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역시 좋은 고블린은 뒤진 고블린 뿐인가.'
어느 평행선에는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블린이 계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세계에서만큼은 고블린 학살 전문가인 은등급 모험가의 말씀이 옳은 듯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나는 새삼 고블린과 대화한다는 발상이 지나치게 멍청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르르…!
놈들의 시선에 일말의 호의도 없었다.
나와 시어도어를 바라보는 눈빛은 비릿한 악의 뿐이었다.
"와… 족제비, 못 생긴 게 엄청 많아!"
갑자기 바람꽃이 마차 밖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래도 특유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구경을 나온 듯 모양이었다.
케륵? 케륵?
여자애를 발견한 고블린의 눈빛이 삽시간에 변한다.
지금까지 남자들을 찢어발기려던 흉흉한 시선과 종류가 달랐다.
케케케!
휘어지는 기분 나쁜 눈초리.
거기에 배어나는 가학성과 음흉함이 실로 적나라했다.
문득 머릿속에서 기분 나쁜 사실 하나가 떠오른다.
[고블린에겐 암컷이 없다.]
최약의 몬스터, 고블린.
놈들은 그 이명에 걸맞는 무력을 지녔으나 용케도 멸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리를 키우며 바퀴벌레처럼 득실득실하게 늘어난다.
실제로도 내 눈앞에 있는 고블린의 머릿수는 족히 삼십은 넘어 보였다.
수컷만 태어나는 기이한 괴물.
어떻게 개체를 유지하고 늘려온 걸까?
몬스터 리스폰?
판타지의 신비?
아니면, 미처 마련하지 못한 핍진성?
…유감스럽지만.
여기엔 흥미진진한 미지는 없다.
그저 달갑지 않은 원인과 결과만 존재한다.
케케륵, 케르륵.
"으으…."
악의에 예민한 바람꽃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챘다.
항상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족제비, 쟤들 기분 나빠…."
그녀는 내 등에 숨어서 잘게 떨었다.
다른 아이는 물론이고, 이 아이에겐 특히나 질이 나쁘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으…."
내 목소리가 나답지 않게 날카로웠다.
그 탓인지 바람꽃이 토달지 않고, 얌전하게 마차 안으로 돌아갔다.
케륵! 케륵!
애를 숨긴 게 불만인 걸까?
고블린들이 항의하는 것처럼 거칠게 울어대고, 마구잡이로 돌멩이를 집어던졌다.
개 같은 고블린 새끼들.
역시 고블린은 몰살 시켜야한다.
"야, 이 상황을 어떻게 보냐."
나는 내 몫까지 돌을 얻어맞는 시어도어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주요 급소에 가드를 올린 상태로 구시렁거린다.
"제가 불쌍한 지, 저들이 불쌍한 지 고민이 듭니다."
음, 생각지도 못한 난제였다.
내 눈에는 둘 다 전혀 가엾지 않은 존재였으니까.
내가 낄낄 웃어대자,
시어도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블린이 슬슬 달려들 것 같습니다만."
"오, 그러네. 뭔가 불나방 같다."
케르륵!!
겁을 먹지 않고, 잡담이나 하고 있던 탓일까?
우리를 품평하던 고블린들이 잔뜩 꼴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시어도어에게 질문을 해댄다.
"여기 고블린이 노상강도도 하냐?"
내가 아는 고블린은 근거지를 오가며 인근 마을이나 터는 놈들이다.
허나, 그런 놈들이 가도에서 대기까지 해가며
규모가 적은 마차를 습격한다는 것이 뭔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주변의 인간들을 보고 배운 걸지도 모르겠군요. 꽤나 학습력이 있는 미물이잖습니까."
그리 말하는 연금술사의 얼굴이 제법 염세적이었다.
시어도어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인내심에 한계에 달한 고블린 놈들이 흉폭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케륵! 케르륵!
저주 받은 숲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녹색의 무리는 질서 없이 그저 우르르 천박하게 달려든다.
데이지보다도 작은 키의 고블린들.
그들 개개의 볼품 없는 체격은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떼를 지어 몰려오는 수세와 그들에 손에 들린 날붙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움츠려들게 만드는, 살 떨리는 폭력성을 품고 있었다.
놈들의 무기는 초라하고 지저분하다.
내가 요리할 때 다루는 식칼만도 못해 보였다.
허나, 그 정도만으로도 생명을 갈취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놈들은 내 심장이 아닌 복부를 노리고 달려온다.
자비는 아니었다.
나를 살려두기 위한 것이 아닌… 그저 곱게 죽이지 않으려는 악의에 불과했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로,
날개가 뜯겨나간 잠자리처럼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리라.
키에엑!
어느새 놈들이 코 앞에 있다.
그대로 날붙이를 앞으로 들이내민 채 달려든다.
'생각보다 빨라.'
이제와서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섬뜩한 감각을 느끼며, 나를 죽이려는 것들을 가만히 지켜본다.
주마등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지 죽음이란 무척 차가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깜빡인다.
뿌드득!
뼈와 살이 뭉개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곧장 눈을 뜬다.
허공에 들러붙은 채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고블린들이 보였다.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양새가 단체로 마임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우스광스러웠다.
키엑? 키엑?
한편, 고블린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도리질했다.
무식하고 용감한 몇 놈은 재차 무지성으로 달려들었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제 뚝빼기를 갖다가 깨버리는 기행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고블린의 피도 붉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려준, 머리가 터져나간 놈들에게 짤막한 소감을 보냈다.
"병신."
너댓마리가 추가로 대가리를 깨고 나서야,
고블린들은 자신들 앞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끼에에엑!
잔뜩 열 받은 놈들이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또 혀를 내밀고, 손가락질을 하는 등… 마치 나를 도발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비겁한 인간 놈! 배떼기를 쑤시고, 산 채로 내장을 들춰낸 뒤, 눈앞에서 여자를….
당연하게도 고블린의 말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놈들이 지껄이는 말이 호의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겠다.
"이 정도 수준의 결계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다니, 무지하면 용감한가 봅니다."
놈들을 관찰하던 시어도어가 말했다.
언제 돌에 맞았는지 그의 오른쪽 눈탱이가 푸르스름했다.
"용감하면 뒤져야지."
이번만큼은 얼빠진 연금술사의 말에게 호응했다.
또 고블린들에게 말을 못하다는 게 일종의 행운이었다고 일러주고 싶었다.
놈들이 쓸데없이 입을 벌리지 않은 덕분에ㅡ
[겨울인데도, 시끄러운 벌레가 득실거리는구나.]
곱게 죽을 수 있는 거니까.
**
놀라운 사실!
고블린이 구워지는 냄새는 의외로 고소하다!
굳이 이를 묘사하자면….
유통기간이 지난 돼지고기를 굽는 듯한 냄새였다.
더 나아가 그런 돼지고기를 오물과 함께 태우면 이런 구린내가 날 듯했다.
아무튼 전말에 대한 감상은 그거다.
"우웩."
…한동안 고기는 입에 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지독한 탄내에 적응하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런 내 등을 누군가가 토닥토닥한다.
"이런, 괜찮니?"
저세상 숯불 구이집 여사장님이었다.
주문하지도 않은 고블린 구이를 쉰여개나 내온 장본인….
누가 불속성 도마뱀 아니랄까봐.
그녀의 스테이크 취향은 웰던인 듯 보였다.
'뭐, 레어로 자르는 것보단 낫지.'
선혈이 낭자하는 맛 vs 새카맣게 태운 맛.
둘 중에서 굳이 고른다면 후자가 좀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계속 속이 언짢다면 잠깐 눕겠니?"
레베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최면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뒤통수를 대고 누웠다.
…부드럽다.
그리고, 일순간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었나.'
모르겠다.
압도적인 광경에, 그저 전율할 수 밖에 없었다.
"……."
"……."
뭔가 어색하다.
내가 애들에게 무릎배게를 해줄 때랑 다르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레베카… 다음에는 얼려 드시는 게 어때요."
"??"
나를 내려다보는 루비색 눈동자가 두어번 깜빡거렸다.
레베카는 생각에 잠겨 잠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이윽고, 뭔가 깨달은 것 처럼ㅡ 앗!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참, 실례란다! 나도 저런 건 안 먹는다."
그녀가 내 이마를 탁 소리나게 쳤다.
조금 삐친 모양인지 타박하는 손바닥이 제법 매웠다.
"레베카, 아픈데요?"
"맞을 만 하잖니. 그대여, 더 혼나기 전에 정중히 사죄하렴."
지금 까불기에는 입지 조건이 영 좋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잘못을 빌기로 했다.
"죄송합니당. 레베카는 천하의 미식가에오."
"말투가 가증스럽구나."
"호에엥."
"이게!?"
분노한 레베카가 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대충 보복하는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개털인데 난리나겠다.
"…저도 속이 안 좋아지는군요."
문득 주변을 살피던 시어도어가 입가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뭔가 머쓱해져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어느새 탄내에 적응을 한 건지 헛구역질도 가라앉은 상태였다.
"자만에 빠진 무리라서 행운이군요."
시어도어가 그을린 활과 화살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원거리 무기를 가지고 있는 고블린이었다.
재수 없었으면 시어도어가 의문사 당했을 거란 이야기였다.
'아깝…나?'
그의 처지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행하는 만큼 최소한의 방비책은 마련해 줘야하나 싶었다.
…연금술사의 처우는 제쳐두고.
결론은 후치랑 제미니가 놀란 것 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북부에는 이런 놈들이 흔한가요?"
"음, 슬슬 황도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지. 변경으로 갈수록 자주 보일 거란다."
레베카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시어도어 또한 담담한 얼굴로 수긍하고 자빠졌다.
대체 수도권 외 지역은 어떤 곳이길래….
이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싹 트기 시작했다.
**
불나방들이 모조리 타죽는 동안,
꼬마들은 세상물정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레베카가 애들을 마법으로 재운 모양이었다.
다소 강압적인 조치라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이런 일에는 얄짤 없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 애들을 앞에 두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일동, 앞으로는 단독 행동 금지. 마차에 내리고 나선 어른들이랑 떨어지면 안돼."
"응. 알겠어."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난 데이지가 말했다.
개운하게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눈이 아주 말똥말똥했다.
이제 곧 저녁인데….
오늘밤에 재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문득 레베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요즘 작은애를 재우는 게 쉽지 않더구나."
'작은애'는 데이지를 가리킨다.
여담으로 바람꽃을 '큰애', 레일라를 '우리 아가'다.
아무래도 레베카만의 애들을 부르는 애칭인 듯 했다.
아무튼 레베카의 말은 그거다.
데이지에게 깃든 마법을 무시하는 가호가 강해졌다는 의미….
그녀가 커가면서 용사의 힘도 성장하고 있다.
과연, 이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될 지 아직까지 예상할 수 없었다.
"네. 기억해둘게요."
나는 일단 마음에 새겨두기로 했다.
한편, 보기 드문 상황이 보였다.
데이지가 안쓰러운 얼굴로 바람꽃의 머리에 손을 툭 올리고 있었다.
"털뭉치, 울지마."
풀 죽은 댕댕이를 위로하는 고양이가 생각났다.
허나, 막상 위로를 받은 바람꽃이 새빨개진 얼굴을 홱홱 젓는다.
"하, 하지마. 나 안 울었어!! 씨, 땅콩! 내가 말했지!? 북부의 늑대는…."
"…귀 따가워."
잔뜩 흥분한 댕댕이의 데시벨에,
데이지가 괴롭다는 듯이 귀를 틀어막았다.
힝….
좀처럼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졸고 있던 레일라도 깨버렸다.
한편,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테오는 체념한 표정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
그래, 너가 고생이 많다.
나는 귀에서 케찹을 흘리는 테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얜 왜 또 삐진거야?'
제 꼬리를 밟힌 포메라니안처럼 아르릉거리는 녀석을 살폈다.
평소와 달리 축 쳐져있는 강아지귀와 꼬리가 보인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쫑긋 솟아있던 챠밍포인트가 영 시들시들하다.
"피터, 털뭉치한테 뭐라고 했어? 쟤가 그러는데 혼났다는데."
그러던 중, 바람꽃에게 도망쳐온 데이지가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충직한 밀고자 덕분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민 바람꽃에게 날카롭게 말한 게 문제가 된 모양이다.
역시 드센 겉모습과 다르게 섬세한 구석이 있는 아이다.
이러면 안되지만, 꿍해져 있는 그녀를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람람아, 나 화낸 거 아닌데."
"…누가 뭐래."
말은 아니라면서 눈치는 살피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 쟁여둔 사탕을 댕댕이의 손에 몰래 쥐어주었다.
"흐응, 막 잡지말지~"
내 손을 뿌리치는 척 하면서,
딴 애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연기하는 게 레전드….
어쨌든 화해의 뇌물은 받아주었다.
어린애인 만큼 단 거 먹고 나면 기분이 어느정도 풀리리라.
"근방에 마을이 있을 겁니다. 고블린이 인적도 없는 길목에 잠복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마부석에 앉은 시어도어가 그럴듯한 의견을 냈다.
가는 길에 마을이 있다라?
물자는 충분했으나, 한 번쯤 들렀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마차에서 다같이 부대끼며 자는 건 조금 불편하니까.
'시어도어만 빼고.'
당연하게도 음흉한 연금술사는 혼자 마차 밖에서 야영을 해왔다.
어쩌면… 영리한 놈은 연속된 야영에 지쳐,
마을이 있다면서 은근슬쩍 나를 꼬드기려는 걸지도?
가령 그렇다한들 속아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고블린 습격의 최대 피해자는 시어도어였으니까.
명목상 고용주로서 무급 노예의 정신건강을 책임져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루 정도 묵어 볼까요?"
레베카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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