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86화 (86/117)

〈 86화 〉 여정(5)

* * *

공기가 시리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단, 몸이 둔해지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남자에게 겨울이란 그 정도의 건조한 감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계절이었다. 그가 지붕 없는 하늘 아래서 겨울을 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현재ㅡ

'마을… 아니, 동굴이라도 찾아야겠군.'

남자는 앞으로 황야에 맨몸을 던지듯이 누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딱히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다.

병마가 들지 않는 축복받은 신체는 더할 나위 없이 강인했다.

홀로 완벽한 그에겐 혹독한 자연조차 시련이 될 수 없다.

"콜록, 콜록."

하지만 더이상 혼자가 아니게 된 남자는 불완전해졌다.

가면 밑에 감춰진 눈이 들썩이는 어깨를 향하고 있다.

[......]

너무 작고 가녀린 등이다.

성숙한 여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미숙하고 앳되어 보였다.

"크흥, 히응. 아아~ 목이 까끌하네요."

저 소녀는 일부러 능청스러운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침소리를 숨기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이 좋지 않다면 알리면 될 것을….'

남자는 아무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병약한 신체보다도 그녀의 완고함이 더 거슬렸다.

'…어째서?'

그것은 본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이었다.

아니, 애초에 지금까지 벌여온 행동 대부분이 그답지 않았다.

어째서 짐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를 신경 쓰고 있는가?

아버지의 말씀을 져버리고, 임무를 팽개치고, 굳이 여자와 함께 도주하는 이유는?

'내가 미쳐버린 건가.'

남자는 자신의 머리가 고장나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런 와중에도…

"기사니임! 이게 머에요?! 제 오빠 찾아준다면서요? 근데, 저 병사들이 우리가 쫓고 있잖아요! 히잉, 저는 선량한 시민인데…."

그의 귀는 소녀의 잔기침과 재잘거림을 담기 바빴다.

사내는 중증이라고 생각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꾸한다.

[목소리를 낮춰라. 들킬지도 모른다.]

"에휴, 기사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슬슬 자수하고 광명을 찾는 거 어떨까요? 저 이제 배고파서 눈에 뵈는 거 없어요…. 우리 하인커스도 쫄쫄 굶었단 말이에오, 그치이?"

­푸르르.

자신의 애마가 소녀의 말에 호응하듯이 작게 콧김을 내뿜었다.

원래는 진중한 녀석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옆에서 거드는 백마가 더 얄밉게 느껴졌다.

[엘리. 아직 떠들 기운은 있나보군.]

"그, 그건 아닌데여…."

그는 엘리와 하인커스를 한 번 쏘아본 뒤, 조용해진 틈을 타 상황을 복기한다.

'확실히 상황이 좋지 않다.'

어째서인지 제국의 휘하로 보이는 이들에게 쫓기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기민한 직감이 저들이 지닌 살의를 명쾌하게 집어냈다.

물론 그는 저들과 대화를 통해 사정을 물을 수도 있었다.

허나, 만일의 경우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자기 자신은 몰라도 여자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였나.'

그러한 가정을 떠올렸을 때ㅡ

그와 엘리를 태운 말은 도시의 반대편인 숲 속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는 일평생 추격자로서 살아왔기에,

쫓는 법만큼이나 도망치는 법에도 해박했다.

그에게 발자취를 지우고, 인기척을 숨기며, 음식을 먹지 않고도 버티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달리는 말이 새겨놓은 흔적을 일일이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말에서 내리기에는… 그와 동행하고 있는 엘리의 다리에 문제가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화전민 소녀.

어떠한 훈련도 받지 않은 일반인이다.

기척을 숨기는 법을 알고, 공복의 괴로움도 참아낼 수 있는 그와는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ㅡ

"우 씨, 무슨 말도 못하게… 콜록, 콜록."

엘리의 몸은 태생적으로 연약했다.

그녀에겐 비바람을 막고,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기침약도 필요하겠군.'

식량과 식수의 부족.

점점 떨어지는 체력.

계속된 도주로 인한 스트레스….

그에겐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는 문제들.

하지만 엘리에게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므로 그는 무거운 고민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근처 마을에 데려다주는 게….'

아니.

지난 경험을 미루어볼 때,

먹고 살기 급급한 인간들이 외지인인데다가 거동까지 불편한 여자를 챙겨줄 거란 생각은 너무 낙관적이다.

또한, 쫓아오는 제국의 개들이 자신과 함께 있는 여자를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대로 놓아주는 것이 더 위험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두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라도ㅡ

'…정녕, 그러한가?'

이것은 신념인가.

그것도 아니면…….

­부스스.

남자가 끝이 없는 상념에 잠겨있을 때였다.

한구석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낙엽이 부풀어 오르더니 사방으로 요동친다.

무언가가 낙엽 밑에 숨어 있었다.

­히이잉!

갑작스러운 소동에, 놀란 하인커스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휴식 중이라 승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떠오른 낙엽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오랜만입니다. 심문관, 쿼츠."

흩날리는 낙엽 너머에서 낮고 울림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어본 기억이 있는 중저음이었다.

'매복!'

그는 사태를 파악했다.

하지만 미처 반응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잿빛의 단정한 단발머리.

가벼운 평상복 차림, 얼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너는.]

"끄이잉…."

여자는 어리둥절해하는 엘리의 목에 단검을 겨룬 채로 입술을 달싹인다.

"부디 도망치지 마십시오. 3년만의 휴가를 당신을 쫓는데 전념하는 제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아, 이 여자애도."

마치 잘 정련된 검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살짝 드러난 팔근육과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이 범상치 않았다.

게다가… 저 여자와는 구면이다.

그녀는 흐리멍텅한 의식 속에서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이기에, 근위기사대의 부단장까지 나서는가!]

삼백여년 전, 루비 팬드래건 이후로

역사상 두 번째로 탄생한 여성 소드마스터.

[답하라. 시오네 카밀라.]

"흠, 그게 저야말로 궁금합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여기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말한다.

"어째서 오랜만에 나온 휴가가 근무보다 훨씬 힘든 지에 대해서."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분노한 그가 검에 손을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시오네가 단검을 내려 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나 히텐슈타인은 없군요."

[…….]

"심문관. 시어도어 폰 히펜슈타인이 어디있는지 아십니까?"

[그 자의 행방을 어째서 내게 묻는 거냐.]

쿼츠의 냉담한 목소리에,

"…그러게나 말입니다."

여기사는 어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한편,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던 엘리가 잔기침을 터트렸다.

"저기… 콜록, 콜록!"

기침을 하는 주기가 짧아졌다.

그 경중도 심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의 병세가 더 깊어지면 치명적이다.

[그대가 나를 쫓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쿼츠는 초조한 심정으로 여기사를 노려봤다.

문득 시오네가 기침을 하는 엘리를 가리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한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목책 너머에서 이들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외지인을 경계하는 주민들에게 내가 말이 통하는 문화 시민임을 보여주기로 한다.

"하룻밤의 따스함을 바랍니다. 부디 지친 나그네를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고블린에게 습격을 받은 후.

다행스럽게도 날이 어둡기 전에 어떤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목재이나마 성책을 구성하고 있는, 제법 건실한 개척 마을이었다.

북부의 개척 마을은 사람이 드세고 경계심이 강하다.

나는 시어도어의 조언을 참고해 홀로 설득에 나섰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들여보내 주겠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안돼."

그런데….

웃는 낯에는 침만 못 뱉는 모양이다.

"당장 돌아가라."

웬 시커먼 사내 놈 하나가 내게 활을 겨누며 대꾸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환대였기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왁, 시발?'

아니, 상도덕도 없는 촌놈 새끼야!

그거 쏘면 내가 뒤지는 게 아니라고….

"에이, 잘 생긴 선생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우리 그러지 말고 천천히 대화부터 하죠? 아, 저 좀 보세요. 정의로운 선생님들을 믿고서 비무장이에요."

나는 마차 안에서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흉흉한 분노에 황급히 말을 이었다.

"흠, 젊은 양반이 뭘 좀 아네. 내가 잘 생기긴 했지."

"선생님이면 나보고 말한 거 같은데?"

"어허. 이 새끼들이 양심을 스튜에 말아 먹었네."

수염이 듬성듬성 난 못생긴 놈들이 제 얼굴에 금칠하기 시작했다.

어째 해대는 꼴이 우스운 걸 보아하니….

활부터 쏘는 몹쓸 인간들은 아니고, 단지 생각이 모자란 얼간이처럼 보였다.

"선생님들 갈 땐 가더라도 이유라도 말해주십쇼. 이대론 섭섭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때다 싶어서 세 얼간이들에게 물었다.

만약 답변이 시원찮으면, 그들의 마을이 잿더미가 될 수도 있다.

"형씨, 정의로운 내가 말해주디."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제 혀를 깨물며 말했다.

**

털복숭이 아재의 말은 대충 요약하자면,

며칠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마을을 습격하고 있단다.

'정체불명의 몬스터라…?'

마을 주민의 말이 어린애를 겁주려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미지의 괴물이란 말에 조금 흥미가 생겨서 물어봤다.

"그거 고블린이에요?"

"허허! 불알 달린 남자가 고블린 같은 거에 쫄면 쓰나?"

험상궂은 남자들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꺄르륵 웃어댔다.

…어째서인지 디스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뭔데요?"

"그건 모르네. 그러니까 정체불명이지."

얼씨구?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그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놈은 밤에만 찾아와."

"아주 빠르고 흉폭하지."

"…마을 사람을 넷이나 잡아먹었어."

아, 그러니까….

'마을 밖에 있는 우리가 제일 위험하다는 거네?'

왠지 주민들의 속셈이 뭐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이대로 마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고, 우리를 정체 모를 괴물의 희생양으로 바칠 계획이 아니었을까?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저 마을에서 쉬어갈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위험에 휘말린 기분이다.

게다가, 내가 예상했던 이상으로 시골의 인심은 독한 모양이었다.

'뭐, 알려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가.'

그들에게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어 보였다.

일단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이 든다.

­그대여, 마을로 들어가자꾸나. 이대로 떠나기엔 밤이 늦었구나.

반지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말처럼 이제와서 떠나기에도, 뭔가를 하기에도 늦은 감이 있었다.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들여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어쩔 수 없다. 우리 마을을 위해서다."

이기적인 새끼들….

요즘 시골 인심이 이토록 야박하다.

"부드러운 모피와 끝내주는 과일주도 있습니다."

"마을에 모피는 널렸다. 과일로 만든 술은 기별도 안 찬다. 그거 음료수다."

북부 촌놈들 아니랄까봐 도수 낮은 건 취급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대여, 해치울까?

거듭된 거절로 인해 인내심이 한계가 달한 레베카의 전언이다. 나는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참아, 레베카.'하고 속으로 빌었다.

물론 그녀가 나서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편하리라.

그러나 매번 그녀에게 의지하는 것도, 이번 일에 무력을 쓰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이들 강도였으면 마음이 편했을까?

이기적이긴 하나,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마음이 심숭샘숭했다.

'이왕이면 대화로 해결하고 싶은데.'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는 타협점을 찾아봐야겠다.

그렇게 잠깐 마차로 돌아가려던 때ㅡ

­!!

희뿌연 어둠 속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아이가 마차에서 뽀로로로 튀어나왔다.

­아빠~

눈처럼 하얗고 작은 새가 날아오는 듯했다.

그리고 껴입은 옷 때문인지 평소보다 통통해 보였다.

'아, 옷 갈아입었네.'

얘가 어째서 마차를 탈출한 건지 모르겠지만.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굴러갈 것처럼 동글동글해 보여서 눈앞이 아찔했다.

나는 냉큼 손을 뻗어서 레일라를 낚아챘다.

"어허, 뛰면 위험해."

­히힛.

겨울옷을 입은 아가용은 혼나는 와중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실거렸다.

그러더니 내 한 손을 부여잡고서,

마치 자신을 끌고 가달라는 것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제 발로 나와놓곤 나보고 옮겨달라니?

이거 아주 조금 괘씸하다. 허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레일라는 아직 가볍기만 했다.

아무리 옷을 껴입었어도 내가 조금만 힘을 주니 쪼르르 끌려왔다.

­까하하!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지만.

얘한테는 이것도 세상 즐거운 놀이인가 보다.

"재밌어?"

­네에!

레일라의 해맑은 웃음을 보니,

다소 꿀꿀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직장 생활에 치인 가장의 활력소가 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여, 우리 아가가 마치 천사 같지 않니?! 아니 여신의 인도자조차...

이 밤톨만한 자객을 보낸 건 용마망인것 같다.

반지에서 들려오는 딸천재의 자식 자랑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미치겠네...

이거 세뇌 당하는 느낌이야.

"제발 너네 엄마 좀 말려주라."

­??

레일라는 그런 나를 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이미 늦었나?

아무래도 벌써 세뇌를 당해버린 모양이다.

내가 숨겨둔 사탕을 몽땅 쏟아내려고 할 때ㅡ

"어이, 형씨!!"

눈썹을 찌푸리게 만드는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 얼간이 중에서 대장 격인 아저씨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쿵!

얼추 3미터는 되어보이던 높이였는데…

갑자기 상남자처럼 목책 위에서 뛰어내리고 난리다.

멋진 추락을 보여준 아저씨는 엉기적거리며 다가왔다.

"그런 건 진작 말해야지!"

미친 놈마냥 다짜고짜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위협적인 느낌에, 레일라를 등 뒤에 숨기고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예끼! 뭐기는 이 사람아! 형씨 때문에 하마터면 천하의 개새끼들이 될 뻔했잖아."

…이 털복숭이가 이제와서 뭐라는 거지?

"네?"

"이렇게 귀여운 자식 새끼가 있으면 진작 말해야지."

어이 털린 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저씨는 열정적인 눈으로 새하얀 꼬마를 빤히 들여다봤다.

­응?

한편, 마음씨가 고운 레일라는

처음 보는 이상한 생물체에게도 손을 흔들어주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허억… 얼어붙었던 심장이 뛰고 있어…."

…이거 미친 놈인가?

땀내 나는 아저씨가 갑자기 시를 쓰고 지랄이다.

나는 까닭 모를 두려움에 손을 흔드는 레일라를 더 깊이 숨겼다.

"형씨 애 맞지?"

그걸 본 아재가 눈에 이채를 빛내며 내게 물었다.

문득 아가용이 쥔 손에 꾸욱하고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네, 아빠에오!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나와 레일라를 번갈아 보더니 말한다.

"혹시 부인이나 어린아이가 더 있나?"

…어째서인지 궁지에 몰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레베카… 데이지, 바람꽃, 테오도 포함하면….

"그… 셋, 아니 넷 더 있어요."

"음, 보기와 다르게 많이도 낳았군. 형씨, 운 좋은 줄 알아."

…뭐가 보기와 달라 이 야만인 새끼야.

아무튼 수상할 정도로 애한테 집착하는 아저씨가 대문을 보며 고함쳤다.

"아이 새끼들아! 손님이다! 문 열어라!"

'아니, 이게 뭔데.…'

너무나도 허무하게 문이 열렸다.

지금까지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게 우스울 정도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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