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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87화 (87/117)

〈 87화 〉 아캄(1)

* * *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노을마저 사라진 풍경은 창백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겨울을 맞이한 이름 모를 마을의 입구를 지나자,

그 푸르스름함에 시커멓게 물든 건물들이 곳곳에 보였다.

목재로 지어진 집이 많았다.

대부분 세로로 높이 지은 터라 뾰족한 인상이었다.

수도에서 지내온 벽돌집에 비해서 조금 불안정해 보였다.

엉겁결에 들어오게 된 개척 마을.

'저녁이라 그런가? 뭔가 조용하네.'

그곳에 대한 감상은 공허함을 비롯한 적막함이었다.

낯선 타지에 정차한 이방인으로서, 막역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내가 멍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때ㅡ

뭔가가 옷자락을 아래로 쭉쭉 잡아당겼다.

"응?"

눈처럼 새하얗고 조그만 아이.

레일라가 내 코트를 꼬나쥐고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배시시 웃기만 하던 루비색 눈동자는 웬일로 시무룩해 보였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문득 이 아이가 연옥에 갇혀 있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도 그녀는 기묘한 능력으로 우리를 도왔다.

레일라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진지해진 나는 눈높이를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어?"

그러자, 아가용이 발끝을 바라보며 입술을 우물거린다.

­…넘 빨라요.

아무래도 그런 종류의 걱정은 기우였나보다.

레일라는 그저 다리가 짧아서 슬픈 모양이었다.

"아. 미안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가는 나를 따라오기 벅차서 속상한 듯했다.

…얘가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답답했을까.

나는 사죄의 의미로 시무룩한 아가용을 안아들고서 둥가둥가했다.

"쯧쯧, 형씨는 너무 무른 아버지구만. 그렇게 딸내미를 오냐오냐 하서야…."

그런 우리를 보던 아재가 혀를 찼다.

말투나 태도가 전형적인 꼰대로 보였지만… 그의 시선은 배시시 웃는 레일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긴, 우리 애가 이쁘긴 하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내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갔다.

"그런 아저씨는 결혼했어요?"

너는 이런 애 없지?

나는 레일라를 고쳐안고, 한껏 우쭐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아니네. 난 아직 총각이야."

분명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인데….

갑자기 어두워진 아저씨의 얼굴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멋쩍어진 나는 황급히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 뭐. 살다보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아저… 저기 이름이 뭐예요?"

"브루스 스피드왜건."

왠지 설명을 좋아할 것 같은 이름이었다.

"마을 유일한 숲지기지. 형씨는?"

브루스는 자신의 활을 자랑스레 내보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쪼고 있던 그 활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피터라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친척이 있는 윈터펄로 상행하는 중입니다."

"흠, 험한 시기에 별난 선택을 하는군."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오라이! 오라이! 좋아, 멈춰!"

후치와 제미니가 이끄는 마차도 무사히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야 안심이 든다. 다소 삐걱거렸던 만남이지만, 결과적으로 잘 풀린 느낌이다.

"아무튼 아캄에 온 걸 환영하지. 성대한 환영은 불가능하겠지만."

브루스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남자다운 호쾌한 웃음이지만, 그의 눈 밑에 자리잡은 눈그늘이 화장한 것처럼 짙었다.

"일행이 오면 촌장에게 안내해주지."

이름값을 하는 건지 이 아저씨는 제법 참견쟁이인 듯했다.

**

참견쟁이 아저씨의 도움으로 아캄 마을의 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족들과 겨울성으로 가고 있다고?"

그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이었으나,

체격이 무척 건장해서 그런지 노쇠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자였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덩치가 큰다더니.

그 말이 우스갯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예, 어르신. 아직 갈 길이 멀어서 하룻밤만 머물고 싶습니다. 저희가 마을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지금껏 문전박대를 당하다가 간신히 들어온 거라서, 괜히 밉보였다간 도로 쫓겨날 것 같았다.

"어차피 빈 집은 많소. 적당한 곳을 내어주리다. 원하는 만큼 있다가 가시오."

의외로 아캄의 촌장은 너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리가 마을에 머무는 것에 대해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럴 거 였으면 처음부터 곱게 들여보내주지.'

나는 속으로 문지기 역할을 하던 브루스 일당을 씹었다.

한편, 촌장은 손때 묻은 장부를 꺼내어 펼치더니 내게 물어봤다.

"일행은 성인 둘에 아이 셋. 다섯인가?"

"다친 아이와 마부도 있습니다."

"총 일곱이라… 작은 집은 불편하겠군."

노인은 내게 특별히 넓은 집으로 골라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며 적당한 금액으로 사례했다.

"아직 저녁을 들지 않았다면, 윌로프 부부가 하는 '요정의 자장가'라는 식당에 가보게. 거기 카리브 스튜가 끝내준다네."

내가 준 사례금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촌장이 웃는 낯으로 가게를 추천했다.

추운 날에 뜨끈한 스튜면 나쁘지 않지.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참. 애들이 몇 명이라고?"

돌아가려는 내게 촌장이 물었다.

이 어르신에게 약간 치매끼가 있으신가?

"넷입니다."

나는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그런 내 대답에, 노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밤에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말게."

그의 검은색 눈동자는 어쩐지 음울하게 보였다.

**

하룻밤 빌린 집에다가 짐을 풀었다.

겨울인지라 조금 있으면 완연한 밤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여자 넷이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보였다.

…어째 여기 여자들은 나보다 옷을 더 빨리 갈아입는다.

""…….""

아무튼 나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들이 단체로 불멍이라도 때린 모양이었다.

'쟤는 진짜로 불멍이네?'

나는 그들 중에서 삐죽 솟아난 강아지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 댕댕이 옆에 불멍의 프로.

데이지가 무릎을 끌어 모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모닥불을 보며 자주 멍 때리던 애답게 눈빛부터가 남달랐다.

'…뭔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네.'

이게 프로의 자세인가?

10살짜리 꼬마의 눈빛이 너무나도 현묘했다.

한편, 불꽃보다 붉은 머리카락을 보면서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눈나, 더위를 많이 탄다면서요.'

언젠가 내뱉은 말이 무색하게도,

레베카는 벽난로의 뜨뜻함에 잔뜩 풀어진 얼굴이었다.

누가 변온동물 아니랄까봐.

사실 그녀가 온기를 즐기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슬슬 저녁을 먹으러 가야했기에 그들의 상념을 깨운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 나왔다."

데이지의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이제 절전 모드가 끝난 모양이다.

"왔구나아."

레베카는 나른한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레일라가 이미 그로기 상태였다.

­흠냐….

얘가 깨우는 게 미안할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 밥을 먹일 수 없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간단하게 해결하고, 촌장이 추천한 식당은 내일 가봐야겠다.

"레베카, 좀 쉬고 있어요."

"그래. 필요하면 부르렴."

어쩌다 보니 시간이 좀 남는다.

완전히 밤이 되기 전에 어떤 걸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흥."

아무래도 낮의 일로 아직도 꿍해서,

나한테 말도 안 거는 댕댕이를 달래는 게 좋을 것 같다.

"람람아. 나랑 산책 가주라."

"시, 싫은데…. 내가 왜에? 혼자서 가."

본인은 싫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꼬리와 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게 솔직한 건지 아닌 건지….'

자꾸만 파닥거리는 부분에 눈길이 간다.

나는 시선 관리를 하며, 틱틱거리는 꼬맹이에게 혼신을 다해 부탁했다.

"에이, 같이 좀 가주라. 혼자 나가면 무섭잖아."

"차암~ 뭐가 무섭대? 다 큰 어른인데."

"원래 이불 밖이 제일 위험해."

"그게 뭐야? 바보 같애! 흥… 족제비, 쪼끔만 기다려 봐."

바람꽃은 작은 혀를 쏙 내밀더니,

갑자기 이층으로 다다다 올라가 버렸다.

…어쩐지 스스로 산책줄을 물고오던 누렁이가 생각난다.

'숩다 숩어.'

비교적 까칠하다고 해도

결국 댕댕이라서 은근히 만만하단 말이지.

자존심과 맞바꾼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ㅡ

"피터, 무서우면 나도 같이 가줄까?"

데이지가 나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고작 10살배기에게 동정받는 어른이라니… 나조차도 멘탈이 살짝 흔들렸다.

역시 애들 앞에서 냉수도 못 먹겠다.

다소 억울한 나는 우리 꼬꼬마에게 내 남자다움을 설명하려고 했다.

"아니, 뎃지야. 실은 무서운 게 아니라."

"군말이 많구나. 손을 줄 때 잡고 가려무나. 왜, 그대는 겁쟁이잖니?"

옆에서 팝콘을 먹던 레베카가 킥킥 웃어댔다.

겁쟁이라는 불명예에 즉시 반박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자, 어째서인지 입술을 떼기가 어려웠다.

"피터,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와아… 그거 눈물나게 믿음직한데?

나는 손에 들어오고 한참 남는 앙증맞은 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참, 어쩔 수 없으니까 같이 가줄게."

2층에서 내려온 바람꽃이 등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가리는 용도로 쓰는 후드를 가지고 왔다.

바람꽃은 제 겉옷을 내게 쭉 내밀더니 말했다.

"족제비, 나 이거 입을래. 입혀줘!"

어… 할 말이 좀 많지만.

어쨌든 당당해서 보기 좋았다.

"오냐."

바람꽃에게 겉옷을 입혀주자,

그녀가 냉큼 후드를 덮어쓴다.

동물귀가 나 있는, 별난 디자인의 후드였다.

바람꽃이 유독 마음에 들어하는 옷이었다.

아무래도 쫑긋 솟은 귀 부분이 편해서 그런 것 같다.

내친김에 데이지에게도 후드를 입혔다.

검은머리는 아니지만, 붉은 머리도 충분히 눈에 띄니 가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런 시대에선 미모라는 게 좋은 의미로만 작용하는 게 아니니 주의하는 게 좋다.

"혹시 모르니 챙겨두렴."

레베카가 어지러운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내밀었다.

뭔가 마법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녀석이다.

"이게 뭔데요?"

"음, 호신용?"

…어째서 의문형이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레베카가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이 얼빠진 용가리 같으니….

아티팩트에 무언가 하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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