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88화 (88/117)

〈 88화 〉 아캄(2)

* * *

'…등이 뜨근뜨근하네.'

나는 등을 어루만지며 한숨과도 같은 입김을 내쉬었다.

겨울마다 밖으로 나올 때면,

버릇처럼 호~하고 입김을 불어서 허공에 띄우곤 한다.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긴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담배 연기와 닮아서.

조금이라도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어린 날의 내가 그들의 모습을 흉내 내고자 한 치기어린 행동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르겠다.

'뭐, 담배는 피운 적도 없지만.'

비로소 어른이 된 나는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담배 연기 대신에 새하얀 입김을 만들어 내며, 나 자신이 느와르 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즐겼다.

"호하아~"

데이지는 그런 나를 따라하듯이 허공에 호호 숨결을 불었다.

하얀 볼이 살짝 발개진 채로,

입술을 어설프게 오무려가며 그러고 있었다.

나참, 이게 뭐라고 따라하는 거지?

꼬마의 모습에 헛웃음을 나왔지만, 폐활량을 자랑하는 그녀를 보다가 괜한 경쟁심이 들었다.

나는 크고 웅장한 입김을 만들어 낸 뒤, 자랑하듯이 가리켰다.

"뎃지야, 이거 좀 봐 봐. 내가 더 크다?"

"응. 피터는 대단해."

착한 데이지는 곧이곧대로 띠동갑이 넘는 어른이를 칭찬했다.

순간, 참 잘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칭찬은 칭찬이기에 우쭐하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만사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한다.

나는 적당한 높이에 있는 데이지의 머리통을 오른손으로 얹으며 덕담을 보냈다.

"뎃지도 소질이 있어."

"진짜로?"

"그럼. 조금만 내공을 키우면 대성할 거야."

일부러 데이지에게 생소한 단어를 써봤더니,

"??"

아니나 다를까.

우리 꼬꼬마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내공이 머야?"

나는 이 순간을 위해서 그동안 무협지를 봐온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

"이상한 짓 그만해… 이 바보들아!"

내 왼쪽에 서있는 바람꽃이 샐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지 동물귀가 달린 후드를 눈아래까지 내려썼다.

"…털뭉치, 내공이 뭔지 알아?"

바보라는 말에 움찔한 데이지가 역공을 가했다.

그녀의 소심한 반기에,

바람꽃이 흐흥하고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모야? 넌 그것도 몰라?"

"으응…. 그게, 몬데?"

데이지는 솔직하게 무지를 인정했다.

허나, 순진한 그녀가 맞서는 상대 꼬마는 좀 악질이었다.

"몰라. 내가 알게 뭐야?"

"……??"

데이지는 잠깐 뇌정지가 온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

이윽고, 낚인 것을 알아차린 듯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우리 꼬꼬마가 조금 뿔이 난 모양이다.

"너… 혼 나."

"뭐래. 너 하나도 안 무섭거든?"

당당한 말과는 달리,

댕댕이는 나를 방패처럼 앞세우고 뒤에 숨었다.

바람꽃은 그간의 경험으로 데이지와 육탄전에 벌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학습한 듯 보였다.

아놔….

결론적으로 새우들 사이에 낀 나만 옷이 늘어나게 생겼다.

"그만해… 이러다가 우리 다 넘어져. 참고로 나 넘어지면 뼈 부러질 거야. 뼈 부러지면 바닥에 뒹굴면서 엉엉 울거다."

힘없는 오징어가 추하게 애원하자,

그제야 티격태격하던 새우들이 기싸움을 멈췄다.

"…피터, 호해줄까."

…아니, 아직 안 넘어졌어.

"땅콩! 너 때문에 족제비 운다잖아."

안 운다고, 임마.

애들이 작정하고 나를 놀리는 걸까…?

나는 얘네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어서 쓴웃음을 흘렸다.

'으, 바람이 찹다.'

점점 바깥 날씨가 추워지는 것 같다.

그 탓인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코와 손 끝이 무척 시렸다.

그런 건 나 뿐만이 아닌지,

애들도 작은 손을 모아 입술과 코를 덮고서 호~하고 입김을 불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조만간 벙어리 장갑이나 귀도리를 뜨개질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더기를 입혀놔도 빈티지로 소화할 애들이라서 뜨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뭐,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일단 나는 애들에게 골탕 먹은 것에 대한 소심한 보복을 하기로 했다.

"너희들 왜 입냄새 맡고 있어?"

당연히 추위 속에서 온기를 찾는 행위였지만.

그렇게 물으니, 당황한 데이지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니얏! 나 입냄새 안 나! 양치, 양치 했어!"

"흥!"

아니, 우리 말로 하자…

얄짤없는 댕댕이 녀석은 바로 발을 밟았다.

나참, 괜히 골려주려다가 본전도 못 찾겠다.

"손 시린데 손잡을까?"

나는 민심이 떡락하기 전에 애들에게 물었다.

"응!"

"…귀찮은데."

데이지는 말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바람꽃은 투덜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하며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나는 한겨울에도

양손에 꽃을 들고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

지도에도 없는 개척 마을, 아캄.

그곳은 떠들썩하고 사람이 북적였던 수도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했다.

보이는 것은 얼어붙은 척박한 토지와 곳곳에 건조되고 있는 짐승의 모피, 그나마 온기를 더해주는 주홍색 불빛 뿐이었다.

그것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풍경이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미난 구경거리가 없는 다소 정적인 마을이었다.

다만, 그러한 감상을 품은 것은 나 뿐인 모양이다.

데이지와 바람꽃은 그저 산책을 나온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눈치였다.

특히나 댕댕이가 신난 것처럼 보였다.

"히힛! 재미없어."

'…웃으면서 잘도 말하시네.'

역시 늑대도 개과인가?

바람꽃은 바람을 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했다.

데이지도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주변을 둘러보는 눈망울이 똘망똘망했다.

'혹시 나만 재미없나?'

하기야, 원래부터 나는 외출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해외 여행을 가는 것보다 집에서 웹소설이나 보는 게 더 성미에 맞았다.

하지만 이 꼬마들이 있으니 바깥 나들이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너네가 좋으면 됐지.'

나는 애들과 보폭을 맞추며,

새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이른 저녁 임에도 확실히 인적이 드물었다.

간간이 어른들은 보이는데… 우리 애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 마을에 생기가 없다고 생각했더니,

아무래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문득 브루스와 촌장의 말이 생각난다.

­정체불명이지. 놈은 밤에만 찾아와.

­밤에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말게.

아캄 마을의 분위기를 보니,

그들의 경고가 어린애들을 겁주기 위한 우스갯소리는 아닌 듯했다.

'마을에 뭔가 있긴 있나보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슬슬 돌아가야겠다.

게다가… 영 꺼림칙한 시선이 사방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분 탓은 아니었다.

집집마다 창가에 서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외지인이라서 경계하는 건가?'

모르겠다. 어쩐지 감시 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급적이면 골목길을 피하고, 큰길을 이용해 거처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

걷다보니 어느덧 별빛이 반짝였다.

이 세계에 전기가 없고,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하늘에 별이 쏟아질 것처럼 가득했다.

한 마디로, 이제 완전한 밤이라는 소리였다.

'좀 지각했네.'

본의 아니게 촌장의 경고를 어겨버렸다.

사실 산책을 나올 때부터 이미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져서 밤이나 다름없었지만.

레베카와 있다보니 조금 안일해졌나보다.

뭐, 그래도 지금이라도 들어가면 괜찮을 것이다.

'설마 하루에 세 번이나 위험할까봐? 그건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되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확실히 내 간땡이가 부은 듯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원래 인생이란 놈은 확률 조작에 걸린 것처럼 재수가 없을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우리가 하룻밤을 보낼 거처가 눈에 보일 정도의 거리에 도착하자,

"…족제비, 저기 누가 숨어있어."

바람꽃이 귀를 쫑긋 세운 채로 말했다.

어리기는 하나, 감각이 날카로운 수인족의 경고다.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만한 게 아니었다.

"몇 명이나?"

"많아."

데이지도 무언가를 느낀 건지 한 곳을 지그시 바라봤다.

"……."

나는 더이상 발을 옮기지 않고,

애들을 등 뒤로 보낸 뒤에 그곳을 뚫어져라 봤다.

'뭔가 있나…?'

내 눈에는 어두컴컴한 골목만 보였다.

애들이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쯤ㅡ

스멀스멀거리는 그림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무수한 그것들은 시커먼 옷으로 차려입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전부 눈만 파인 꼬깔두건을 뒤집어쓰고, 좀처럼 체형을 짐작하기 어려운 품이 넓은 천을 입고 있었다.

마치 유령 혹은 그림자 같았다.

'뭔 KKK단이냐고….'

나는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한 눈에 봐도 불온한 의도가 풍기는 복색이었으니까.

그들의 모습은 낮에 봤던 고블린 무리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악의는 워낙 다채롭기에,

한낱 짐승들의 원초적인 본능에 비해서 더욱 꺼림칙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이 마을의 종교행사나 할로윈 파티일 리는 없겠지.'

어째서 저들이 우리를 노리는 건지 모르겠다.

뭐, 세상에 무차별 살인도 있는 마당에.

사실 동기라는 생각보다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리라.

어차피 지금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이 개같은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저기요? 님들 누구세요?"

놈들의 꼴을 보아하니 통성명은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했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드래곤을 불러올 시간을.

"……."

음침한 놈들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놈들이 우리 주위를 에워쌓인 상태였다.

뒷면에는 벽.

정면에는 수상쩍은 집단.

이대로는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는다.

­찰칵찰칵.

나는 검집에서 요동치기 시작한 단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설마 너가 범인은 아니지?'

이걸 선물 받은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누가 저주받은 물건 아니랄까봐 완전 재수가 옴 붙었다.

­어떤 마녀가 애용하던 아티팩트란다. 타인의 살의를 감지하면 사용자를 호산해주는 주문이 걸려있지.

나는 이걸 선물이랍시고 준 장본인의 말을 떠올렸다.

'왐마, 뭐 그런 사기적인 게 다 있대요? 그래서 이거 하자 없는 물건은 맞나요? 아무대서 막 뽑아도 상관 없죠?'

­으음, 실은 말이다. 그 마녀가….

레베카와의 대화를 온전히 회상하기 전에,

"우오오오!"

비겁하게도 웬 놈이 달려들었다.

덩치가 산만한 놈이 주먹도 무지하게 크고 빨랐다.

"피터, 피해!"

"족제비!"

등 뒤에 숨긴 꼬마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이 지닌 비범한 재능이 아니더라도, 저 남자의 주먹에 심상찮은 거력이 담긴 것을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저 솥뚜껑만한 주먹에 얻어 맞으면…

지금껏 해온 치아관리가 무색하게 전 뿌리를 임플란트 해야할 것이다.

'시바… 죽겠네.'

어렸을 때 태권도도 배우지 않은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얼어붙은 내 의식과 달리 오른손은 요요하게 움직인다.

마치 따로 뇌가 달려있는 독립적인 생물체처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자신을 잊은 세상을 향해 한 획을 그었다.

­서걱.

손끝에 무언가 야릇한 감각이 있었다.

허나, 그 감각이 뭔지 온전히 깨닫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미숙했다.

'기분이 이상해.'

내가 옅은 희열과 함께 눈을 떴을 때ㅡ

"끼아아아악!!"

이름 모를 남자가 계집애처럼 높은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을 뒹굴고 있엇다.

한편, 내 손에는 기이한 문양이 요요하게 빛나는 단검이 들려 있다.

나는 홀릴 것 같은 기분으로 단검을 바라봤다.

상당히 끔찍한 물건인데 반해 어쩐지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성능은 기가 막히네.'

그러나, 그렇게 감탄하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눈을 까뒤집고 거품까지 문 남자가 피를 뿜어내는 부분을 확인하니… 성능이고 나발이고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미친, 한스가 불알을 찔렸어…!"

"…비겁한, 아니 악독한 새끼다…."

한스라는 비운의 사내가 하혈을 하고 있는 끔찍한 광경에, 나를 비롯한 이들이 단체로 전율했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상쩍은 집단은 모두 남자인지 나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워낙 충격적인 최후에, 놈들 사이의 침묵이 깨지고 동요가 퍼졌다.

"…손이 안 보였어. 터무니 없는 고수다."

"시발, 너가 분명 약으로 재운다고 했잖아?"

"나보고 지랄하지마. 저 새끼가 식당으로 안 왔어."

"닥쳐, 이 병신들아. 한스가 ㅈ… 아니 고자가 됐어. 이 핏값을 받아야한다!"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소리를 지르자,

금세 침착함을 되찾은 놈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족히 스무명이 넘는 무리였다.

다행히 벽을 등지고 있긴 하지만, 수적인 열세는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으, 이 누나는 언제 와…!'

연락을 취한 레베카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어쩌면 그녀 또한 이 놈들에게 습격을 받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좋아, 후회하고 싶은 새끼는 더 기어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흉흉한 단검을 앞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빌빌 거리는 놈처럼 평생 내 별명을 잊지 못하게 해줄테니까."

"…별명?"

"설마, 별명이 붙어있는 전사인가?"

한번 금이 간 침묵은 쉽게 깨지고, 놈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이 고민하는 사이에,

나는 다시금 레베카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실은 말이다. 그 마녀가 남자들의…

'남자들의?'

­그, 그 음… 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단다….

'음, 뭐요?''

­…경.

'경?'

­으, 으, 음… 아니! 대체 뭘 말하게 하는 거니!

'아악!!'

갑자기 급발진한 레베카 때문에,

등짝을 얻어 맞고 쫓기듯이 산책을 나와야 했었다.

'…억울해. 본인이 말해놓고 나보고 그래.'

지금도 등이 욱신거린다고.

분명 등짝에 손바닥 자국이 생겼을 거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알아낸 단검의 정체.

연인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실의 빠진 그가 마녀로 전직하면서 그 증오심을 담아 만들어낸 무기.

"유넉의 과부제조기."

나는 그 마녀의 끔찍한 별명을 자칭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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