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아캄(3)
* * *
슬레이어(Slayer).
특정한 무언가를 죽인 것에게 주어지는 칭호.
따라서 용을 죽이는 자를 드래곤 슬레이어.
고블린을 학살한 자는 고블린 슬레이어라고 불리는 게 일종의 정석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남자의 특정한 신체 부위를 죽인 자는 무엇이라고 불러야할 지에 대해서….
"크흠…."
뭐랄까… 감히 입에 담기조차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몇 가지 떠올랐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그딴 별명이 붙게 되는 대참사가 일어나게 둘 수 없었다.
비록 저 새끼들이 불한당일지라도,
인간을 동네 길냥이처럼 중성화시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똘똘이랑 이별하고 싶은 놈만 이쪽으로 와라."
나는 같은 남자로서 마지막 자비를 담아 경고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넉…?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듣긴 뭘 들어? 야비한 면상만 봐도 허세인 게 뻔하잖아아. 유넉의 과부제조기? 그게 뭔데 이 씹새끼야.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쎈 척하고 있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꼬깔두건 집단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놈이 나를 듣보잡 취급했다.
"야이 등신들아 쫄지 마! 고작 불알이나 찌를 줄 아는 비겁한 새끼라고."
놈은 주춤하는 집단을 선동하기 위해 나선 듯했다.
정작 본인은 나서지 않고 입으로만 떠들어 댔지만, 조금씩 그의 선동에 이끌려 눈치를 살피는 녀석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순순히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낌새였다.
'정녕 피를 봐야하는가.'
만일 누군가가 꼭 피를 흘려야 한다면…
내 것이 아닌 타자의 것으로 치루는 편이 그나마 나으리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각오를 다졌다.
"있어도 쓸데도 없는 새끼들부터 앞장 서라!"
아까부터 선동질하는 놈이 눈에 거슬렸다.
저 망할 새끼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고추 수확을 하게 생겼다.
'오냐, 무조건 너만 팬다.'
언제나 희생은 적을수록 좋은 법.
나는 저 선동가 녀석을 본보기로써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아 씨, 고추 새끼가 혓바닥이 더럽게 기네."
"…뭐?"
혀만 믿고 나대는 놈들은 똑같이 대접해 줘야한다.
나는 협곡에서 브론즈 트롤들과 맞서 싸우던 1티어 키보드 워리어의 저력을 다해 놈을 도발하기로 했다.
"뭘 또 꼬라봐. 꼬우면 너부터 들어와 보던가. 새끼가 주댕이만 살아가지고."
"……."
"떠들지 말고 너부터 실천하시라고요. 가랑이에 달아둔 건 장식인가. 너 임마, 이러다가 너네 엄마도 니가 아들인 거 까먹으시겠어."
"이, 이이… 호, 호로 새끼가…! 진짜 죽여 버린다!!"
놈이 잔뜩 흥분한 것처럼 목소리를 덜덜 떨어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내 목을 조를 기세였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나는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타인의 감정을 지배한다는 희열감에 중독된 것처럼 신명나게 깐죽거렸다.
"즌쯔 즉요 브린다~ 너는 아저씨보다 수다쟁이 아줌마가 더 어울려. 이 김에 어때? 이 단검은 무료로 TS 해드립니다만."
물론 이 단검의 능력은 중성화 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성별 전환을 기대하고 찾아온 손님이 있다면… 그들에게 허위 광고로 고소당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ㅡ
"…티, 에스? 털뭉치 그게 모야?"
등 뒤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 딴에는 조용하게 말하려고 한 것 같은데,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는 무척 또렷하게 들렸다.
"어휴, 지금 그런 걸 물어볼 때야? 나도 몰라, 이 바보야!"
바람꽃은 데이지의 의문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한편, 또래 친구에게 쓴소리를 들게 된 우리 꼬꼬마는 볼멘소리를 냈다.
"…내가 왜 바보야? 너도 모른대…."
"조용히 해. 이 바보 멍충아!"
"느, 늘었어…!"
…우리 애들이지만 참 천진난만하단 말이야.
내가 한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니,
덩달아서 우리 꼬마들도 긴장감이 풀린 모양이었다.
겁을 먹거나 놀라서 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어린애가 보는 앞에서 수상한 사람들과 입배틀을 뜨고 있는 상황은 마냥 유쾌하지 않았다.
"애들아, 내가 말하면 눈 감고 토끼 백 마리까지 세고 있어."
나는 이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자 말했다.
그런데, 이제 막 산수를 배우는 중인 데이지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피터, 손가락이 모자라…."
"...나도 백 마리는 못 먹는데."
바람꽃도 은근슬쩍 난색을 표했다.
흠, 아직 백까지 세는 건 무리인가. 애들에게 안되는 걸 강요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럼 서로 손가락을 합쳐서 스무 마리만 세볼까?"
나는 적당히 타협하고 조금만 더 빠릿하게 움직여 보기로 했다.
그 때, 마법의 단검이 내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이 우우웅 하고 소름끼치는 진동을 보내왔다.
썩 믿음직하긴 한데… 솔직히 그다지 달갑지 않은 호응이었다.
"이 새끼가…! 고작 한스 놈을 해치웠다고 우쭐해 하는 거냐? 그 놈은 우리 중에서 최고로 모자란 놈이다!"
아니, 너야말로 진짜 모자란 놈 같은데...
기껏 정체를 숨긴 한스의 이름은 왜 자꾸 팔아대는 거야?
이런 놈들을 위해 총대를 멘 한스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기특하고 불쌍한 한스에게 친구를 만들고 주고 싶어졌다.
"네가 있으면 한스도 외롭진 않을 거 같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나는 실실 웃는 낯으로 흉흉한 단검에 몸을 맡겼다.
**
다행스럽게도 더이상의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등을 지켜야하는 나는 놈들이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으나, 어째서인지 그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그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쫄지마! 이 새끼들아 앞장 서!!"
목소리가 큰 녀석이 여전히 뒤에 숨어서 명령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놈의 명령에 따라 전열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입 닥쳐! 저 미친 놈의 말이 맞아! 당신부터 앞장 서"
"나 무서워… 이대로 동정으로 죽고 싶진 않아…."
"이거 놔! 나는 아직 신혼이라고! 내 색시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오히려 몇몇이 기구한 사연을 읊으며 탈주하자,
눈치를 살피던 나머지도 새끼 거미처럼 뿔뿔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개판이네. 일단 조직적인 집단은 아니야.'
아직까지 뭐하는 놈들인지 짐작할 수 없지만,
사이비 같은 복장에 비해서 의외로 집단 의식이 옅은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두고보자!"
마침내 대장처럼 보이는 놈까지 튀었을 때ㅡ
이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은 최초의 희생자 한스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상자는 데리고 가야지…."
놀랍게도, 그 누구도 꺼꾸라진 한스라는 남자를 챙기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피의 복수해야 한다고 떠들던 주제에… 그 때의 열변은 거짓말인 것처럼 의리가 없는 족속들이었다.
동료 의식은 개나 줘버린 이기적인 집단.
무장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체계나 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에 잠식한 범죄 조직이라기엔 너무나도 어설펐다.
의문의 꼬깔두건은 아캄 마을의 주민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네.'
허무하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두고보자던 대장 꼬깔의 말처럼 아직 끝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잠깐 한숨을 돌린 나는 콩가루 같은 집단이 남기고 간 한스를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살아 있으려나…?'
한스가 당한 부상은 우스운 농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척 치명적인 급소라서 자칫하면 쇼크로 죽을 것 같아서 걱정됐다.
아무리 정당방위라도 내가 찌른 사람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입맛이 나쁘다. 게다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증인을 허무하게 잃을 수 없었다.
그러나, 2미터가 넘어가는 덩치를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객기 부리지 않고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레베카 좀 도와주세요. 거기서 훔쳐보고 있는 거 다 알거든요."
"후, 훔쳐본다니…! 이건 우연이란다."
지붕 위에 숨어있던 레베카가 쭈삣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 덜 떨어진 고양이도 아니고… 우연히 지붕에 올라갔다고?
나는 어이없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대체 거기서 뭐해요."
"달 구경…?"
그러니까 왜 의문형이냐고….
용마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넘어가기로 했다.
"실컷 봤으니까 상황은 아시겠죠."
"훔쳐본 거 아니래도."
"누가 뭐래요."
레베카가 뚱한 얼굴로 지붕에서 내려왔다.
언뜻 보면 우리를 습격한 불한당에게 크게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씹는 맛이 없는 싱거운 악당이구나."
어쩐지 나는 레베카가 등장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테오에게 왼손에 봉인된 흑염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레베카도 옆에서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설마 고블린 때도….'
물론 이건 질 나쁜 음모론이었다.
그도 그럴게, 천년이나 살아온 위대한 드래곤이 중2병에 걸렸다는 건 너무 황당무계하지 않은가.
나는 애써 의심을 떨쳐버리고,
아직도 숫자를 세는데 여념없는 꼬마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이제 그만하면 됐어. 집에 가자."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꽃이 쪼르르 다가와 데이지의 놀라운 창의성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족제비…! 땅콩이, 얘 엄청 바보야! 열 개 더하기 열 개가 열열개래…."
…역시 우리 애는 예체능으로 보내야겠다.
나는 건강하면 됐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열열개 데이지는 갑자기 등장한 레베카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줌마, 이번에도 일부러 늦…."
"쉬, 쉿. 작은 아가! 달콤한 거 좋아하지?"
레베카는 환하게 웃으며 데이지의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
어머나, 둘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해진 거래?
그들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제법 훈훈해 보여서 미소를 절로 자아냈다.
"으, 으으…."
다만, 모든 이들에게 방치된 한스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
야생의 고자를 주웠다!
그러나 차마 레베카에게 맡길 수 없었다.
나는 더럽고 궂은 일은 시어도어에게 맡기기로 했다.
해부학에도 정통했던 연금술사는 한스의 끔찍한 몰골에도 눈썹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흠, 생식 기능을 완전하게 잃어 버렸군요."
오늘따라 천역덕스러운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나는 괜스레 가라앉은 마음으로 재차 확인했다.
"그… 고자라는 거지?"
"네, 완벽하게 고자입니다."
시어도어는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선고를 내렸다.
…기절한 한스의 몸이 파르르 떨린 건 기분 탓일까? 비록 정당방위였으나 내가 다 숙연해졌다.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절단 되었습니다. 이건 정교한 기술자의 솜씨로군요. 대단합니다."
그 와중에, 정신 나간 연금술사는 모자이크가 필요한 그 부위를 들여다보며 연신 감탄하고 자빠졌다.
…그딴 저주받은 기술이 뭐가 대단해?
뜻밖의 칭찬을 받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나는 문신 투성이의 험상궂은 맨얼굴이 드러난 한스를 보며 물었다.
"생명에는 이상이 없어?"
"북부 태생답게 생명력이 강인합니다. 지혈은 끝냈으니 회복하는대로 의식을 차릴 겁니다."
거기는 회생이 불가능하지만,
몸뚱이가 워낙 터프한 한스라서 목숨만은 건진 듯했다.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세계의 심영을 살폈다.
한스는 주먹깨나 쓰는 러시아 형님처럼 인상이 험악했다.
그리고 온 몸에 거미와 들쥐, 박쥐 따위를 연상시키는 문신으로 가득했다.
문신이 없는 곳을 찾는 게 더 힘들 지경이다.
나중에 쭈글쭈글한 노인네가 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호작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쯧쯧, 부모님이 주신 몸에 이따위로 쓰니 천벌 받지."
한국에서 온 유교 청년은 유사 러시아 청년에게 혀를 찼다.
한편, 한스의 문신을 유심히 보던 시어도어가 뭔가 알아차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원시적인 주술로 보이는군요."
"주술?"
"예. 아마도 우상을 숭배하는 종류의…."
다소 지루해 보였던 시어도어는 축구공을 쫓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우상 숭배라?'
나는 좀 더 자세히 한스의 문신을 살폈다.
처음에는 흉측해 보이기만 하던 문신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것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시커먼 구덩이가 있다.
그 안은 염소를 비롯한 짐승들과 이름 모를 벌레들이 메우고 있었다.
그 구덩이를 중심으로 북과 나팔을 든 사람들이 원을 그리듯이 모여있다.
전체적으로 기괴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것은,
…수소의탈을 쓴 괴물이구렁텅이 속으로 어린 아이를 집어 넣는 형상이었다.
실로 악취미적인 문신.
숭배한다는 의미에서 연상되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산제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세계는 빛의 여신을 유일신으로 섬긴다.
빛의 여신은 주신치고는 무능한 편이지만, 명색이 빛의 신답게 이따위 악취미적인 산제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정상적인 인간들이 믿는 신이 아니었다.
시어도어는 찌푸린 나를 보며 여실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자는 마족의 이교와 관련된 듯 합니다."
"하아."
어쩐지 꼬깔두건이 꼭 사이비 같더라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정말로 웃기지도 않는 일이 되어버렸다.
'벌써부터 마족이냐.'
나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한스를 노려봤다.
질 나쁜 운명의 장난에 휘말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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