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아캄(4)
* * *
이세계 심영이의 문신 덕분에 얼추 사태를 파악했다.
더 자세한 것은 한스가 정신을 차린 뒤에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동안 시꺼먼 사내 새끼를 감시하고 돌봐줘야한다는 생각하니 썩 내키지 않았다.
"뺀질이. 이제 이거 담당은 너야."
나는 성가시고 더러운 것은 시어도어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만약 한스가 죽거나 도망치면, 앞으로 마차는 제미니 대신 너가 끌어야할 거다."
"아니, 인질에게 포로를 맡기는 법이 어딨습니까?"
항상 태평한 시어도어도 이번 만큼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고작 열정페이로 추가 근무를 하는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도 억울한 것일까?
쯧쯧, 기껏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은혜를 모르는 연금술사는 배때기만 불린 모양이었다.
나는 괘씸한 놈에게 권력의 맛을 보여주기로 했다.
"붙잡지도 않는데 뭔 놈의 인질이야? 오냐, 일하기 싫으면 밥도 굶어야지. 어디 3주만 굶어보자."
"…감옥에 있는 것만도 못한 비인륜적인 처사입니다만."
"그러면 감옥 가실?"
"……."
현상수배 중인 연금술사는 이를 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아쉽게도, 그는 최후의 만찬을 콩밥으로 먹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
급한 불을 끄고 나서 이층으로 향했다.
한 칸씩 계단을 밟으면서 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전개인가.'
예고도 없이 의문의 무리에게 습격을 당했다.
아직까지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우리 애들을 노렸어.'
다시 생각하면 정말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동안 너무 술술 풀려서 방심했다. 만약 레베카의 안배가 아니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나는 작게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쥐었다.
아까 놈들에게 손속을 아낀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다시는 개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손을 잘라 버렸어야 했다.
그런 내 마음에 호응하듯이ㅡ
부르르.
품 속에 넣어둔 단검이 진동을 보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녀석의 목표는 나와 좀 다른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씹, 아니야. 거기 아니라고. 가만히 있어."
우웅우웅.
뭐야, 이거 무서워. 대화가 통하는 건가?
고자검이 불만이라는 것처럼 우웅거리며 진동을 보냈다.
"…뭔 마사지 기계냐고."
고추나 자르는 단검에 이딴 기능을 왜 달아둔 거야?
덕분에 피부가 근질근질하고 진동음이 신경 쓰이잖아.
여러모로 들고 다니는 게 꺼림칙한 아티팩트다.
허나, 레베카가 나를 생각해서 준 선물인데다가
비루한 내 몸뚱이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으로 깡으로 들고 다닐 수 밖에 없다.
나는 포기하고 고자검을 어깨에 걸쳤다.
"할 거 없으니 어깨라도 마사지해."
우웅! 우웅!
"!?"
와, 이거 뭐지…?
성능이 확실한 녀석은 안마기로도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
아이는 극적인 비극이 없이도 어른이 될 수 있다.
잔인한 현실은 어른이 된 뒤에 충분히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ㅡ
이 세계는 어린아이를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내린다고 말했다.
나는 그 자를 데려다가 이 아이들이 겪었을 일들을 모조리 체험 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물어보고 싶었다.
'어째서 어린애가 학대와 폭력을 감당해야해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한 목사님도 천국의 문을 두드렸을까.
어릴 적의 나는 그게 궁금했다.
**
'사이좋게 잘 놀고 있으려나.'
나는 데이지와 바람꽃을 찾아나섰다.
꼬깔두건의 습격 때문에 여러모로 놀랐을 아이들을 살펴봐야했다.
물론 우리 애들에게 생채기 하나도 생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사연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다보니 이럴 때일수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용마망 같은 건 얼마든지 괴롭혀도 좋으니,
부디 꼬마들이 우울해 하거나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레베카도 그걸 바랄거야.'
아마?도
이층에 있는 방은 두 개.
그 중에 테오가 있는 방 쪽에서 떠들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짜?! 에이, 말도 안돼.
진짜래두. 이걸 못 믿네?
다행히도 한창 이야기꽃이 핀 것 같았다.
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뭇하면서도 은근히 섭섭했다.
쟤네들은 내가 없으면 무슨 얘기를 하고 놀까?
문득 호기심이 생긴 나는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소리없이 접근했다.
마침 방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몰래 엿보기 좋았다.'
그렇게 내가 문 틈을 들여다 봤을 때,
어째서인지 데이지가 웬 작대기 하나를 들고서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뭔가 기시감이 드는 몸짓이었다.
무언가를 베는 듯한 일련의 동작처럼 보였다. 그러나,
"피터가 막 이케이케… 슝, 서걱… 했어!"
"??"
…얘가 말하는 게 영 맹탕 같았다.
대체 뭘 설명하고 싶은 거니? 우리 애는 상당히 난해한 전달력을 지닌 모양이었다.
이걸로 하나 깨달았다.
데이지는 연극 쪽으로 보내면 안된다. 체육 특기생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왜 내 이름이 나오지?'
나는 조금 불안해진 눈으로 데이지의 재롱을 마저 훔쳐봤다.
우리 꼬꼬마가 클라이맥스라는 것처럼 절정에 오른 연기력을 뽐냈다.
"이상한 천 아저씨가 끼에에… 이러면서 픽 쓰러졌어…!"
힘 빠지는 비명소리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만약 데이지가 장래희망 표기란에 아이돌 같은 걸 적어오면 뜯어 말려야겠다.
"그, 그래? 와, 대단하다…."
얼떨떨해 하는 듯한 테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착한 녀석답게 어설프게나마 호응하려는 모습이 대견했다.
반면에,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치이? 피터가 막 슉슉…."
'…뎃지야, 제발, 그만해.'
데이지가 조금 전의 일을 내 무용담처럼 묘사하고 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보다 신이 난 꼬꼬마의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그녀가 동작을 취하고 입을 열 때마다 내 손과 발이 베베 꼬이는 기분이었다.
이게 남의 이야기라면 아무렇지 않지만…
보잘 것 없는 내 역사를 재구현하는 것은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글구 족제비가 단검을 쥐고 이렇게 말했어. '어이, 엄마랑 이별하고 싶은 놈만 들어와라!'''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은 한 적 없어….
맹랑한 댕댕이가 사람을 패드립퍼로 만들어 버리고 난리다.
"와아… 진짜 귀… 멋, 멋있다!"
테오는 나나야 시키가 뺨치는 피터의 무용담에 탄성을 내뱉었다.
꼬맹이 데이지가 말할 때와는 반응이 사뭇 다른 것이 우스웠다.
한편, 슬슬 내 무용담을 듣는 것이 괴로웠던 나는 레베카에게 텔레파시로 구조 요청을 보냈다.
이야기 멈춰! 이제 그만해줘….
"키킥."
내 애원을 들은 용마망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조금 민망하지만, 어쨌든 이로써 불편한 주제에서 벗어날 수…
"그이가 이 말도 했지. '원한다면 한스의 곁으로 보내주지.'"
…청개구리도 아닌 도마뱀이 한술 더 떠버렸다.
각색한 대사가 느와르물에나 나올 법했다.
기억력이 사기적인 용가리가 대화를 잘못 기억할 리는 없다.
아무래도 시국에 편승해서 나를 골리려는 짓궂은 의도가 느껴졌다.
"대사 뭐야…. 피터 형도 할 땐 하는 사람이었구나…."
"암. 무릇 사내라면 도망치기만 해선 아니된단다."
…신났네. 아주 신났어.
천 살이나 먹고도 애기들이랑 자알 논다.
차마 더 들어줄 수 없었던 나는 조용히 뒷걸음질 했다.
**
넘어가기 어려운 중요한 사안이 있었다.
나는 곧장 레베카를 불러다가 한스를 통해서 알아낸 것을 알려주었다.
정확한 사실 관계는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은 추측만으로도 충분히 경계해야하는 대상이었다.
"마족이라…."
천년 전을 회상하는 것일까?
레베카의 중얼거림은 어쩐지 깊고 아련하게 들렸다.
"가장 오래된 어둠이 돌아오는구나. 기어이, 로드의 예언대로."
생각보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활자로 지켜본 나는 간접적으로만 알지만.
직접 그들을 겪은 그녀는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동굴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던 어둠에 대해서.
원래 마족이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삼 년 뒤의 일이다.
허나, 한참 이른 시기에 그들의 추종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쩌면 삼 년이 되기 전부터 이미 마족이 암암리에 잠식하고 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원작에서 제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내부에서부터 쉽사리 무너져 내린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건 예정되지 않은 시나리오다.
어떤 변수가 생길 지 모르니 마족이란 위험요소와는 피하는 게 현명했다.
'특히나 데이지에게.'
자신들의 영웅을 잊은 인간들과 달리,
인족의 영웅에 의해서 눈과 얼음 뿐인 감옥으로 쫓겨난 그들은 결코 용사라는 원수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발견하면 기필코 말살하려고 들 것이다.
데이지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만큼 성장하기 전까지 그들에게 노출되어선 안된다.
'당장 떠나야한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내 손을 떠났다.
앞으로의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혼자서 결단할 수 없었다.
나는 레베카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정말로 이 마을에 마족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마족은 피를 빨아먹는 벼룩과도 같지. 질기고 성가시단다. 차라리 집을 포기하는 게 떠나는 게 나을 정도지."
레베카는 마족을 해충에 빗댈 정도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세스코가 없는 시대인 만큼 한 번 벼룩이 창궐하면 상당히 끔찍할 것 같았다.
"당장 짐 쌀까요?"
나는 남자답게 도망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 나를 본 레베카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레 저었다.
"병충이란 내버려두면 끝도 없이 퍼져나가는 법. 모르고 지나쳤으면 모를까. 발견했으니 모조리 태우는 게 옳단다."
…드래곤이라서 그런건가?
해충을 박멸하는 스케일이 남다르다. 한 채도 아니고 마을 전부를 싹다 불태울 기세였다.
갑자기 습격이나 해온 불온한 마을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타인의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레베카에게 잡아둔 한스를 심문한 다음에 판단을 내리자고 말했다.
"하루만 더 지켜보죠."
"부디 기우였으면 하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여행을 온 기분이었는데….
재수 없는 주제를 꺼내서 그런지 분위기가 무거워져 버렸다.
어차피 이제 더이상 꺼낼 이야기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따질 것부터 따지기로 했다.
"그나저나 레베카. 정말 너무하세요."
"응? 뭐가?"
"분명 말려달라고 했는데…. 레베카까지 나서서 날조하면, 애들이 저를 힘순찐이라고 오해하잖아요."
"??"
내가 찡찡거리자 레베카가 잠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눈웃음을 짓더니, 손으로 턱을 받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힘순찐이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대가 나를 탓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구나. 그런데 날조라니? 그건 참으로 억울한 말이구나. 난 진실만 말했잖니?"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연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깜찍한 모습이라서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 어려진다고 했던가?
지금 레베카의 모습을 보니 딱 그 말이 생각났다.
괜히 분했던 나는 꼬투리라도 잡고 싶었다.
"나참. 그 나이 먹고 꼬마들이랑 놀면서…."
"후후, 이승에 미련이 없어진 거니?"
문득, 고블린이 달려들 때도 보지 못한 주마등이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 대가로 그대로 하직할 뻔했다.
역시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한다...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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