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91화 (91/117)

〈 91화 〉 Midnight snack(1)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벽이 찾아왔다.

한창 클 나이인 어린이는 한창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 시간이었다.

오늘이 평소와 같았다면,

나도 코 자는 뽀시래기들 사이에서 열심히 코를 골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싸늘하네.'

나는 단검을 천으로 닦아내며 생각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내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과 조금 비슷한 것 같았다.

그건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의 추위였다.

단순히 북부의 찬바람이 매섭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나는 시린 목를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자다가 칼 맞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손질한 단검을 갈무리하고 창 밖을 내려보았다.

그곳에는 이따금 희끄무레한 어둠만이 꿈틀거릴 뿐,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유령의 마을에 온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달빛마저 두려워서 모습을 감춘 듯, 마을의 풍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적막했다.

'폭풍전야로구만.'

나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무언가를 노려보다가 가림막을 쳤다.

오늘은 잠들 수 없는 밤이 되리라는 예감을 하면서.

**

북부로 향하던 중 우연히 들르게 된 외딴 마을.

아캄.

그들은 처음부터 낯선 방문객을 환영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보면 환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짜고짜 도적떼마냥 우리를 위협했으니까.

그 때는 요행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장소는 여전히 불한당들의 앞마당이었다.

나는 놈들이 다시 찾아오리라고 예감했다.

아무리 어설픈 사냥꾼이라도, 제 집에 들어온 사냥감까지 곱게 놓아주진 않을테니까.

게다가,

'아직까진 본인들이 포식자인 줄 알고 있으려나.'

꼬깔 두건들은 우리 일행의 진짜 전력을 모른다.

끽해봐야 무료로 중성화 수술해주는 핸섬 가이만 알고 있을 것이다.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법이니,

지금 쯤 이성을 되찾은 놈들이 나 하나 정도는 해볼 만하다는 흑심을 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니,

나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불나방 시즌2 찍겠네."

고블린에 이어서 인간까지.

나방도 아닌 것들이 제 발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터라 골치가 아팠다.

레베카는 원래 인간에게 호의적인 편이지만….

아무래도 인간들에게 자식을 납치당한 전적이 있기에, 그와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자들을 향한 손속이 고울 리가 없었다.

야습에 대한 대비.

그리고 레베카의 불장난.

어느 쪽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하물며, 마족이라는 변수까지 생긴 이상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고로 나는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이 짓도 오랜만에 하네.'

당시에 힘든 것도 막상 나중에 해보면 그리운 법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침번 만큼은 군복무 시절을 생각나게 해서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말년에, 당직 서라고…?"

잠깐 졸았더니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졸리니?"

레베카는 잠꼬대를 하는 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지독한 악몽에 의식이 흐려진 것 뿐입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피곤하면 가서 눈을 붙이렴. 여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단다."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혼자서 충분하다라….

하기야, 그녀의 말처럼 내가 눈을 뜨고 있다고 한들 유의미한 도움을 주기 힘들었다.

발 닦고 잠이나 자는 것이 현명할 지도 모른다.

허나 이대로 레베카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육체는 멀쩡할 지 몰라도,

혼자서 밤을 지새우는 과정은 무척 지루하고 외로울 것이다.

나는 그녀처럼 위대하지도, 강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이런 나라도 외로움을 타는 용의 말동무 정도는 되어줄 수 있었다.

이게 무의미해 보일 지 몰라도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게다가,

"그리고, 늙으면 잠이 없다며? 흥, 걱정하지 말고 가렴."

"……."

…용마망께서 나의 실언을 아직까지 담아두고 있었다.

은근히 속이 좁은 레베카인지라, 꽁한 걸 풀어주지 않으면 한동안 바가지 긁힐 게 뻔했다.

나는 상처입은 용을 달래기 위해서 열심히 딸랑거리기로 했다.

"에이, 피곤하긴요. 레베카랑 있는 게 힐링인데요? 아니, 여신 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오히려 이득보는 기분이네요."

립서비스로 그녀의 기분이 풀린다면 값이 싸다.

게다가, 마음에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레베카와 같은 미녀랑 데이트할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오… 데이트라고 생각하니까 훨씬 낫네.'

이게 발상의 전환이라는 녀석인가.

어쩐지 긍정적인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와, 대박. 이건 사실상 포상이 아닐까요?"

"……입, 입 발린 소리만 하는구나."

너무 주접 떨었나보다.

레베카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내 어깨를 찰싹 두드렸다.

하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그건 드래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득, 얼마나 칭찬을 퍼부어야 우리 드래곤 눈나가 어깨춤을 출 지 궁금증이 들었다.

1절만 하면 정이 없지.

한국인답게 나는 한술 더 뜨기로 했다.

"빛의 여신조차 시기질투하는 절세의 미인, 날아가던 새가 나는 법을 잊어버려 추락하고, 나라가 무너질 정도의 경국지색…!"

"에? 어어…? 저기, 그만…."

고래, 아니 드래곤이 당황하고 있다.

나 때문에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다! 나는 위대한 종족의 감정을 희롱하고 있다는 희열감에 젖었다.

"끼에에엑!!!! 비인간적인 미모!!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앗…!!"

"그, 그만해!! 작작, 작작 좀 하렴!"

­빡!

"아악!!"

…이게 재색겸비인가?

레베카는 주먹질조차 파멸적으로 아름답고 강력했다.

"거기에 문무양…."

"후후, 정신이 들 때까지 맞아야겠구나?"

"악! 타, 타임! 아윽, 저 뼈 맞았…."

"그 부분은 근육이란다. 참고로 뼈는 이 쪽이지."

아, 시바 2절만 할 걸.

역시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이다.

**

…먼지나게 쳐맞았다.

나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울상으로 말했다.

"때린 데를 또 때리는 게 어딨어요… 멍 들면 책임져요."

"그건 걱정하지 마렴. 이럴 때를 위해서 동방에서 수행을 온 고승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구타할 수 있는 무술을 배워뒀단다."

…이럴 때가 언젠데…?

그리고, 뭔 드래곤이 스님한테 사람 패는 법을 배워? 뭔가 유래를 듣고 나니까 더욱 얼탱이가 없었다.

"이 참에 한 번 배워 보겠니?"

샌드백을 치더니 스트레스가 풀린 건가….

레베카가 더없이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중얼거렸다.

"그거 배우기 쉬워요?"

"몸으로 체감하면 금방이란다."

…스틱스강으로 소풍 가자는 소리처럼 들리네?

나는 온 몸에 구석구석에 새겨진 레베카의 손길을 떠올다가, 털썩하고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세요."

"나참, 누가 죽인다니? 간단하대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쩝, 엄살이 심하구나."

간곡한 애원에 폭군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죽다가 살아난 나는 안심하고서, 뱃속이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쳐 맞는 것도 나름대로 운동이 된 건가…?

약간의 공복감과 더불어서 입 안이 심심했다.

'오랜만에 야식을 먹겠네.'

당직 설 때, 야식을 먹는 소소한 재미가 빠질 수 없다.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레베카에게 물었다.

"레베카, 출출하지 않아요? 야식 어때요?"

"나쁘지 않구나."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그대가 만들어주는 거면 뭐든지 좋지."

…그녀의 말에 왠지 모르게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난감했다.

그도 그럴게, 뭐든지라는 좋다라는 말은 쉬운 거 같으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맨날 아무거나 먹겠다고 떠들던 여동생이 생각났다.

그 년한테 국밥 먹자고 말하면 분위기가 안 난다고 퇴짜놓고, 중국집 가자고 하면 칼로리 높다면서 지랄발광을 떨어댔다….

'…미친 년. 치킨은 잘만 쳐먹으면서.'

다행스럽게도 그 망할 여동생과 다르게,

그저 빛인 레베카는 음식을 가리지 않아서 메뉴를 선택하는데 부담감이 적었다.

날이 쌀쌀하기도 하고 배도 출출한데.

요깃거리가 될만한 따뜻한 국물요리가 당긴다.

'어묵탕 땡기네.'

하지만 아쉽게도 어묵이 없었다.

어묵을 만드는 과정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레베카의 아공간에도 생선살을 비롯한 주요 재료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다음으로 기약하고.

나중에 강이나 바다에 들리면 생선을 구할 수 있도록 해봐야겠다.

적당히 생각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으음, 저기, 그대여?"

레베카가 은근슬쩍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뭔가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네?"

"나도 도와줄까?"

오, 세상에.

큰일날 소리를 한다.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부디쉬고있어주세요."

"…어쩐지 말투가 묘하구나?"

레베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나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애써 상황을 무마하고자 했다.

"하하, 설마요. 기분 탓이에요."

괜히 짐덩어리를 데려가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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