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Midnight snack(2)
* * *
누구나 한번쯤 그런 밤을 맞이한다.
어중간한 새벽에 갑자기 눈을 떠버려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다시 잠들지도 못한 채로,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아무도 바라지 않은 불면.
그를 떨쳐내는데 정해진 해답이 없기에,그런 날을 맞이한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나아간다.
어느 누군가는 달아난 잠을 붙잡기 위해 갖은 애를 쓸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둑한 어둠 속에서 고요히 동이 트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한 소녀는 그 이상한 밤에 붙잡혀 있었다.
그녀가 타고 있던 꿈나라행 열차는 갑자기 드리프트를 꺾더니 절벽 아래로 탈선해 버렸다.
'잠 깼어….'
문득 깨어나 버린 데이지는 멍한 눈으로 낯선 천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어스레한 어둠만 보였다.
아직 밤이었다. 그녀가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는 소리다.
밤에는 시끄럽게 굴거나 돌아다니면 안돼.
'조금 더 자야해.'
데이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야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절벽 아래로 향한 기차가 돌아올 리 없었다.
"…잠이 안 와…."
결국 그녀의 잠은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데이지는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줄 데가 없었다.
어쩔 수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가만히 누워있어야 했다.
'심심해.'
잠이 오지 않는데 누워 있는 것은 좀이 쑤셨다.
다소 지루했던 데이지는 발가락이라도 꼬물거려 보기로 했다.
'…재미없어.'
금방 실증이 났다.
축 늘어져서 한참을 꼼지락거리다가 문득 재미난 놀이가 떠올랐다.
이른바 자신만의 보물 찾기!
데이지는 눈을 감고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Zzz….
옆에서 조그맣고 규칙적인 코골이가 들렸다.
데이지는 곧바로 여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사람은 키가 커다란 만큼, 코를 고는 소리도 무척 커다랬으니까.
'이 쪽에 있나?'
아이는 손을 뻗어서 반대편을 쓸어봤다.
그곳에 뜨끈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결이 느껴지는 촉감이 풍성하고 보드라웠다.
기분 좋은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데이지는 홀린 것처럼 그걸 조몰락거렸다.
"으으, 끼응…."
그러자 귀찮음과 짜증이 섞여있는 잠꼬대가 들렸다.
'아, 털뭉치다.'
…얘를 깨워버리면 또 심술 부리겠지?
조금 아쉬웠지만, 혼나기 싫었던 데이지는 가지고 놀고 있던 바람꽃의 꼬리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작은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디 갔지?'
분명히 옆에 있었는데….
잠깐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데이지는 조바심에 조금만 눈을 떠보려고 했다. 하지만,
'눈을 뜨는 것은 반칙이야.'
아이가 만든 놀이에는 자신만의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만 더 살피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어차피 잠은 오지 않고 밤은 여전히 길었으니까.
**
'없어.'
이상한 밤을 표류하게 된 데이지.
그녀는 자신이 대충 숨겨둔 보물을 찾아헤맸다. 그러나,
"어디 갔어…."
이곳저곳을 아무리 기다려도, 살펴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 데이지는 기어이 침대로 만들어진 보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야,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중대한 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또, 둘이 나갔어….'
데이지는 커다란 침대의 허전한 자리를 노려봤다.
그 자리에 있어야할 커다란 등과, 부담스러운 가슴이 보이지 않았다.
"…치."
그녀는 작게 볼멘소리를 냈다.
자신을 쏙 빼놓고 둘이서만 몰래 놀러 나간 것이 치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작은 머리에 한 가지 호기심이 피어난다.
어른들은 밤에 만나서 뭐하고 놀까?
'음… 술래잡기?'
으응,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아.
데이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기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그러자,
피터와 레베카가 서로를 마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떠올랐다.
"……!"
왠지 모를 조바심이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팅팅하고 연달아 울렸다.
이윽고, 데이지는 레베카를 피터와 단 둘이 두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피, 피터가 잡아먹힐 거야…!'
영특한 그녀는 아직 잊지 않았다.
지난 날, 자신이 그린 피터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아줌마의 모습을…!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데이지라도 들은 것이 있었다.
그 중에는 노파에서 미녀로 변신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껴있었다.
'아줌마는 마녀인 게 분명해!'
아이의 눈에는레베카의 존재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악한 마녀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데이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혼자서 끼약끼약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 나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착한 마녀야."
어쨌든 간에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소녀는 마녀에게서 붙잡혀 있을 그를 구출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안된다.
캄캄한 위험 속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준비물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용사의 곁을 지켜줄 든든한 동료!
데이지는 가장 먼저 기절한 개구리처럼 뻗어서, 쿨쿨 자고 있는 또래 아이를 쳐다봤다. 지금은 흠냐흠냐 입맛을 다시는 바보 같은 얼굴이지만….
"…깨우면 화낼텐데."
최근에 너무 자주 깨운 탓인지,
깨울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털뭉치를 건드리기에는 조금 무서웠다.
'응, 물리기 싫어.'
심술쟁이 강아지를 영입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어쩔 수 없었던 데이지는 차선책을 떠올렸다.
머리카락이 새하얀 애.
아줌마의 딸이라는 조금 이상한 꼬마.
데이지는 자신의 옆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레일라를 보며 뺨을 긁적였다.
'얘는 아직 좀 어색해.'
그녀는 어딘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는 또래 아이였다.
막 대해도 괜찮은 털뭉치와 다르게 레일라는 대하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그렇다고 혼자서 어두운 곳을 향하기엔 더 어렵고 막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데이지에게는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
'…피터를 구해야해!'
아이는 용기를 낸다.
작은 손을 뻗어서 미지의 두려움에 맞섰다.
찰싹.
고요한 밤에 살과 살이 맞닿는 찰진 소리가 울렸다.
"얘, 일어나."
으에?
흐릿한 어둠 속에서 붉은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데이지는 영롱한 반짝임을 흥미롭게 보며, 이 애가 확실히 레베카의 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
누구?
한편, 레일라도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단잠을 깨운 자를 확인했다.
하얀 소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데이지를 잠깐 본다.
하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흥도 비추지 않고 그대로 감기려고 했다.
데이지는 레일라의 무심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무시 당하는 기분이었다.
'완전 내숭쟁이.'
털뭉치의 말처럼, 하얀 땅콩은 여우같은 지지배였다.
얘는 피터 앞에서만 방실방실 웃는다.
그런 레일라가 조금 괘씸했던 데이지는 곧바로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눈 감지마."
?!
그녀의 손가락이 레일라의 눈꺼풀을 열어젖혔다.
갑작스럽게 봉변을 당한 레일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만 뻐금거렸다.
'이상한 얼굴.'
어쨌든 이제 쳐다봤어.
데이지는 다음에 얘가 무시하면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큰일 났어."
데이지는 어리둥절해 하는 레일라를 내려다보며, 얘를 어떻게 설득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피터가 위험해. 구하러 가자."
???
하지만 설명이 어려웠던 데이지는 일단 지르고 보기로 했다.
피터가 알려준대로라면….
허락을 얻는 것보다 저지르고 용서 구하는 게 더 쉬울테니까.
**
나는 야식을 만들러 가기 전에.
겉옷을 챙길 겸 애들의 자는 얼굴을 보고자 큰 방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그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재빠르게 구석으로 숨어들어갔다.
'아니, 왜 숨은거냐.'
도둑 놈 같은 스스로의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허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컨셉을 지켜서 그대로 엿보기로 했다.
바깥으로 열린 문 너머에 꼼지락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복도로 나오려고 했다.
어쩐지 나는 그 자의 정체를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밤 중 화장실에 가는 일이 잦아서 (바람꽃에게만) 악명이 높은 열살배기 꼬꼬마!
"이쪽이야."
역시나 데이지다.
오늘도 화장실 가는 중인가?
우리 꼬꼬마는 몸집이 작은 탓인지,
애들 중에서도 화장실 때문에 자주 깨는 편이었다.
"얘, 빨리 좀 와."
'오늘은 전우조가 고생하는 모양이네.'
나는 데이지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꼬꼬마는 기특하게도,
따로 말하지 않아도 전우조로 화장실을 가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좋게 말해서 전우조다.
사실은 혼자서 화장실을 못 간다는 의미였으니까.
'뭐, 화장실 가다가 귀신 볼 일은 없겠네.'
나는 숨 죽여 웃으면서 그들을 지켜봤다.
오늘도 댕댕이랑 가겠지?
내가 자리에 없거나 미처 일어나지 않으면, 나 대신에 고생하는 게 바람꽃이었다.
'아침부터 소란스럽겠네.'
나는 댕댕이한테 잔소리를 들고서
울상을 짓는 데이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후아아암….
내 예상을 벗어난,
상상도 하지 못한 정체에 보고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이참, 눈 좀 떠…."
음냐.
데이지가 잠결에 비척거리는 레일라를 질질 끌고 나온 상황이었다.
'재네 둘 왜 같이 다닌데?'
그 조합이 너무나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건 못 참지! 나는 어른스럽게 그들의 뒤를 몰래 밟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피터…!"
…머리에 레이더라도 달려있는 걸까?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데이지에 들켜버렸다.
아무래도 나는 미행하는데 소질이 없나보다.
**
…아빠?
나를 발견한 레일라는 휘둥그레한 눈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할까…. 반가운 동시에 왠지 당혹스러워 보이는 눈빛이라서 이상했다.
"거, 거기서 뭐해?"
그 때 데이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를 미행하려고 했지,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커다란 제리가 보여서."
"…제리? 그게 모야? 먹는거야?"
데이지가 의문을 표시하며 작게 입맛을 다셨다.
나는 생쥐라고 알려주려다가, 베어그릴스 뺨치게 터프한 꼬꼬마가 '생쥐? 모야, 먹는 거네!' 하고 말할까봐 두려워서 입을 다물었다.
"뎃지는 또 화장실이야?"
"아니야…!"
데이지가 힘차게 도리도리했다.
누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던데… 일단은 그녀의 주장을 믿어주기로 했다.
"그럼 왜 안 자고 일어났어?"
그러자,
데이지가 뭔 자랑거리처럼 말했다.
"나, 잠이 안 와!"
어… 그렇게 보이네.
나는 꼬꼬마의 충격 발언을 듣고서 허허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용마망의 마법으로 낮에 너무 자버린 탓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보면 레베카가 마법이 잘 먹히지 않는 데이지에겐 강한 수면 마법을 걸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근데, 피터는 안 자고 뭐해?"
문득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올려다본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 무구한 눈빛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 해야할 게 조금 있어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은 허황된 것이 아닌 듯이 금방 현실이 되어 닥쳐왔다.
"나도 같이 있어도 돼?"
저두!
이런, 난감한데….
이러다가 오붓한 밤까지 깜찍한 꼬마들과 놀아주게 생겼다.
나는 요 말썽쟁이들을 떼어놓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괜찮겠어…? 밤에 안 자면 키 안 클거야."
"그, 그러면 안되는데."
키 크고 싶다는, 하찮은 야망을 품고 있는 데이지가 기겁했다.
하기야, 매일 우유를 두 컵 이상 마시는 꼬마에겐 무척 충격적인 정보일 것이다.
네네!
반면에, 레일라는 키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친의 우월한 유전자를 믿고 있는 아이의 여유로움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공략이 쉬운 데이지와는 달리 레일라를 떼어내는 것은 다소 어려워보였다.
'일단 하나라도 줄여보자.'
어차피 레일라 정도의 잠꾸러기는 금방 재울 수 있다.
투머치토커식 '내가 L.A에 있을 때…'를 읊으면 그만이라고.
그러니, 데이지만 침대로 돌려보내면….
어느 정도 어른들의 조용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럼. 뎃지는 자러 갈까?"
나는 헤벌쭉 웃으며 데이지를 달랬다.
데이지는 그런 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입술을 툭 내밀었다.
"근데 나 안 졸려."
하하, 망했네.
우리 꼬꼬마의 예쁜 눈동자가 밤하늘에 놓인 은하수보다 말똥말똥했다.
…요 개구쟁이들을 떼워놓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대로라면 레베카와의 심야데이트 같은 건 물 건너갈 듯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겐 이럴 때를 위한 비장의 수가 있었다.
"애들아, 내가 마법 보여줄까?"
"…마법?"
??
새벽까지 안 자고 버티며 프리큐어를 쳐보던,
여동생을 재우기 위한 오빠의 108가지 비법을 선보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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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