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Midnight snack(3)
* * *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북부 지역.
변두리의 마을은 황도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열악했다.
시골 마을의 불편함을 하나씩 열거하면 끝도 없을테고.
대충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나지막한 화로를 적당한 비교거리로 삼을 수 있겠다.
나는 그 조악한 화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부엌이라니.'
뾰족하게 생긴 이 층짜리 목조 건물에는 따로 마련된 주방이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불을 뗄 수 있는 공간을 부엌으로 써먹어야했다.
'본격적인 건 힘들겠네.'
뭐, 그래도 불을 지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어쨌든 굽거나 끓일 수 있다는 뜻이니 최악까지는 아니다. 게다가 다행히 땔감으로 쓸 장작도 넉넉한 편이었다.
나는 장작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그 위에 불씨를 붙였다.
바짝 마른 장작은 애태우는 일 없이 금세 주홍빛 불꽃을 피워냈다.
타닥.
고요한 밤 공기에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선명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팽팽한 신경줄이 서서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노곤하네.'
너울거리며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속에서 그간의 시름이나 고민 따위가 연소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런 내 곁에는ㅡ
"……."
…….
보라색 눈동자와 루비색 눈동자가,
아른거리는 불꽃에 물들어 단색으로 정의할 수 없는 빛깔로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불꽃보다도 그 빛에 홀린 듯이 바라봤다.
과연, 저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어쩌면 고난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뿐이 아니길 바란다.
부디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을, 아니면 조금 먼 미래를 보고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모두가 모닥불의 마법에 홀려 있을 때ㅡ
꼬르륵.
갑자기 깜찍한 배꼽시계가 끼어들면서 자기 주장을 했다.
누구인가?
누가 꼬르륵 소리를 내었어?
일단 결백한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용의선상을 살폈다.
"…나, 아니야."
아직 아무말도 안했어.
어쩐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범인 찾기는 넘어가기로 했다.
괜히 불멍을 때리는 꼬마들을 건드려서 잠을 깨워버리면 낭패니까.
발뺌하는 꼬꼬마에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애들이 불구경을 하는 동안에 조용히 야식을 만들기 위한 밑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이따금 곁눈질로 두 꼬마를 살폈다.
'둘이 은근히 닮았네.'
아이치곤 얌전한 편인 애들이라 그런가.
불 앞에 쪼그려 앉아서 있는 데이지와 레일라의 모습이 어쩐지 비슷해 보였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네.
그들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웃음을 나왔다.
겉모습은 정반대에 가깝지만,
이 두 꼬마는 의외로 닮은 꼴일지도 모르겠다.
'람람이가 없는 게 아쉽네.'
불멍을 하는데 진짜 댕댕이가 빠지다니!
뭔가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친 듯해서 조금 유감이다.
그렇게 시간이 제법 흘렀다.
체감상 10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아홉 살의 혜은이는 이 쯤되면 꾸벅꾸벅 졸곤 했는데….
나는 우리 꼬마들도 슬슬 졸려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넌지시 말했다.
"어때? 보고 있으면 점점 졸리지 않아?"
"으응, 아니이~"
헤헤.
뭐지? 긍정인지 부정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두 꼬마가 동시에 고개를 도리도리하는 것을 보아하니 부정인 듯했다.
허, 이걸 버텨?
생각 이상으로 강적을 만나버린 것 같다.
'호락호락하지 않군.'
1단계인 모닥불 ASMR 작전은 실패했다.
이제 어쩔 수 없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넘어가야겠다.
"이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며 불 위에다가 두꺼운 팬과 주전자를 올렸다. 그걸 본 데이지가 츄릅하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피터, 뭐 만들게? 먹을거야?"
누가 애를 굶겨 놓은 줄 알겠네.
저녁에 디저트까지 챙겨 먹었지만, 우리 꼬꼬마는 아직 배가 출출한 모양이었다.
먹는 거?
야, 너두?
먹는다는 소리에 아가용이 해맑게 웃었다.
먹는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니….
그건 좀 부럽다. 추악한 심성의 어른은 먹을것에 진심인 꼬마들이 곤란해 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크크, 잠이 솔솔 오는 마법의 약이지."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니 뭔가 좀 위험한 느낌이다.
"…재우는 약…!"
기대로 가득했던 데이지의 낯빛이 순식간에 암울해졌다.
한편, 레일라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구슬픈 눈빛을 내비쳤다.
아빠가 주면, 약이라도 먹을게요….
…어린애의 눈빛이 뭐 이래;
뭐랄까 터무니 없는 쓰레기로 전락한 기분이 들었다.
"애, 애들아. 이거 달고 맛있는 거야."
심장이 철컹한 나는 황급히 시무룩해 하는 애들을 달랬다.
"…달고 맛있는 약이야?"
"아니. 약 아니야."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애들은 은근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여곡절 끝에 야식을 만들었다.
제법 오랫동안 기다렸을 그녀에게 미안해져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애들아, 레베카랑 같이 먹자."
뒤따라 오던 레일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오물거렸다.
엄마?
"응. 같이 있었거든."
"피터, 아줌마랑 뭐하고 있었어?"
"…암 것도 안 했어."
사실 레슬링 비스무레한 걸 하긴 했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쳐맞았지만….
나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내했다.
아직 재우지 못한터라 데이지와 레일라를 꼽사리로 끼울 수 밖에 없었다.
"레베카, 저 왔어요."
"손님이 늘었구나?"
그녀는 내가 데려온 두 꼬마를 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러게요."
나는 그 눈길을 피하며 멋쩍게 웃었다.
어쩌다보니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서 조금 찔렸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기다림이 오히려 즐겁더구나."
레베카는 입가를 가리더니 킥킥 웃었다.
어째 웃는 게 묘하다. 아무래도 이쪽의 사정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간 은근히 짓궂다니까.
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섭섭함을 툭 내뱉었다.
"좀 도와주지."
"필요하면 말하지 그랬니?"
레베카는 새침하게 코를 작게 울리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들고 있는 트레이를 들어주었다.
"후후, 기다린 보람이 있겠지?"
"너무 기대하면 곤란해요."
그녀는 말괄량이처럼 웃으며 내용물을 확인한다.
이윽고, 조금 흔들리는 눈빛을 한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제법 그리운 기분이 드는구나…."
내겐 레베카의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만들어온 야식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투박한 솜씨로 만들어진 팬케이크였다.
내가 데이지와 레베카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음식이었다.
우리 꼬꼬마는 마음에 쏙 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팬케이크 맛있었어."
"그치? 오랜만에 생각나더라."
그 때는 나와 데이지, 그리고 레베카 셋 뿐이었다.
하지만,
팬케이크?
지금 이 자리에는
레일라 또한 함께 있기에 다시금 만들어보고 싶었다.
나는 레베카에게 트레이를 되돌려 받으며 넌지시 묻는다.
"레베카. 단 거 좋아해요?"
"…응."
그리고, 그녀의 손에 하얗고 앙증맞은 손을 쥐어주면서 피식 웃었다.
"레일라도 단 거 좋아한대요."
***
식곤증!
배불리 먹은 자에게 찾아오는 무거운 숙명.
여자들에게 야식은 금기와도 같다지만….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서라면 금기를 범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다람쥐마냥 볼이 빵빵해진 데이지의 입에 적당한 크기로 자른 팬케이크를 들이밀었다.
"뎃지야, 이거 먹고 양치해야해."
"우웅, 아라써."
아이구, 옴뇸뇸 야무지게 먹는다.
어차피 우리 애들은 한창 때의 나이라서 어느 정도 살이 쪄도 괜찮을 거다.
다이어트한다며 히스테리를 부리던 뉘집 망나니와는 경우가 다르단 말씀!
"켁."
"우유도 좀 마셔."
무지성으로 펜케이크를 흡입하다가
목이 막힌 데이지에게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밀며, 나는 남몰래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크크크.'
이것이야말로 내가 벼르고 있던 비장의 한 수다.
모름지기 애들을 재우는 데에 있어서 식곤증과 더불어서 따뜻한 우유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거기에 달달한 꿀까지 한 큰술 듬뿍 넣었으니,
한번 맛을 보면 그 달콤한 마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리라!
'이것까지 마시고 나면 양들이랑 쎄쎄쎄 해야할 거다.'
그러한 내 음흉한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지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우유를 급하게 마시더니, 혀를 내밀며 울상을 지었다.
"떠거…."
뭐야 이 생물….
얘가 하는 짓을 보고 있으니 왠지 재우기 싫어진다.
헌데, 그런 마음이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닌 걸까?
애들의 재롱에 나이값을 하지 못하고 꺅꺅 비명을 지르는 팔불출이 있었다.
후~ 후~
"꺄아~♡"
딸랑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레베카였다.
용마망은 뜨거운 우유를 호호~ 불어서 식히고 있는 레일라에게 열심히 주접을 부렸다.
"아가~ 엄마가 식혀줄까??"
그녀는 마법으로 얼음까지 만들어내는 극성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그녀의 딸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끈질긴 모성애를 뿌리쳤다.
도리도리.
…이거 완전 창과 방패잖아?
용모녀의 싸움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특히나 레일라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흔들리는 저...
"응응. 엄마는 지켜보망!"
레베카는 거절당해도 마냥 좋은건지 틈틈이 애교 섞인 목소리를 냈다.
솔직히 뭔가 깨는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그녀가 행복해보이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던 중,
입가에 우유 거품을 묻힌 데이지가 입술을 달싹였다.
"피터, 아줌마 기분 나빠..."
…애들은 솔직해서 위험하다니까.
두려워진 나는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쉿. 그런 말하면 못 써."
나는 꼬꼬마의 입가를 닦아주며,
나쁜말은 당사자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몰래 해야한다고 충고했다.
어느덧.
넉넉히 만들었던 팬케이크가 제법 줄어들었다.
밤에 과식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슬슬 제동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조금 남겨둘까.'
본의 아니게 왕따 시켜버린 댕댕이들.
바람꽃과 테오의 몫을 따로 빼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특히나 성질 나쁜 댕댕이 때문이라도 그래야겠다.
집단 생활에 익숙한 북부의 위대한 아가늑대는 따돌림 당하면 엉엉 울어버릴 지도 모른다.
나, 안 우러….
…그래, 너 안 운다.
나는 상상 속에서 훌쩍거리는 바람꽃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뎃지야. 람람이랑 테오꺼 따로 챙겨줄까?"
"으, 응."
우리 꼬꼬마는 소외된 친구가 마음에 걸리면서, 동시에 내키지 않는 듯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뎃지는 돼지구나?
라임이 좋다. 다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피터, 이 정도면 돼…?"
"그걸 누구 코에 붙이게?"
나는 데이지가 삐질거리며 팬케이크를 따로 빼두는 것을 감시하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기대와는 다르지만 제법 유쾌한 밤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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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