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95화 (95/117)

〈 95화 〉 불청객(2)

* * *

늦은 밤.

초대받지 않은 자가 문을 두드린다.

쾅쾅, 문이 아주 부서질 새라 신명나게 갈겨댔다.

­여봐라! 이리 오라니까. 감히 이 몸을 기다리게 하는 불충을 저지르는겐가?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무례한 언성은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미친 놈한테 걸렸네.'

일단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나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꼭두새벽에 남의 집앞에서 주정을 부리는 취객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경험상 저런 것들과 상종하면 여러모로 피곤하다.

가급적이면 처음부터 경찰을 부르거나 끝까지 무시로 일관하는 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곳은 버튼 하나로 민중의 지팡이를 소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재수 없게 진상을 만났다면 당사자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게 보편적이다.

게다가,

­기어서 나오느냐? 찢어죽일 굼벵이 같으니라고.

"……."

성질 급한 누님의 인내심이 슬슬 임계점에 달한 듯했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몽둥이를 꼬놔쥐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레베카에게 대뜸 말했다.

"해치울까요, 마스터?"

"좋지. 이왕이면 머리통을 깨버리렴."

레베카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 삼아서 말했던 나는 그녀의 솔깃한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다가 뚝배기를 수확하러 가게 생겼다.

나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려놨다.

"그, 일단 대화부터 해볼까요. 지성인답게."

"글쎄. 저 자는 지성이 없어 보인다만."

레베카는 내키지 않는 듯이 볼을 부풀렸다.

흡사 장난감을 안 사준다고 삐친 애 같았다.

나도 모르게 삐뚜름하게 웃고 있으려니, 그녀가 입술을 달싹인다.

"차라리 심장을 찌르고 보자꾸나. 이럴 때일수록 기선제압이 중요하단다."

…심장을 찌르면 기선제압이고 뭐고 죽지 않나?

다소 파격적인 제안에, 내가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보자, 레베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 정도론 안 죽을 것들이다."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처음부터 불청객의 정체를 어느정도 짐작한 듯 보였다.

심장을 찔리고도 죽지 않는 자.

그런 존재는 판타지 세계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다.

적어도 인간은 아니다.

­본인은 네 놈들이 거기 있음을 알고 있다. 불안에 떠는 숨소리가 전부 들린다. 크크, 본인 말이 우습느냐? 거기 있는 계집 아이 하나를 꼬챙이에다가 관통시켜….

"저 새끼가 돌았나."

나는 데이지의 귀를 양손으로 막으며 이를 갈았다.

저게 도발이랍시고 하는 건지… 놈은 끔찍한 개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으응? 피터?"

데이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동그란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내 얼굴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지그시 당겨서 아이를 가슴에 묻고, 나보다 험악한 얼굴을 한 여인을 바라봤다.

역시나 드래곤이 현명했다.

그녀의 말대로 진즉에 저 미친 놈의 머리통을 깨버려야 했다.

"저 새끼, 제가 밟아도 될까요?"

나는 실수를 바로잡고자 말했다.

레베카는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살랑 젓는다.

"그대에겐 힘이 부칠 것 같구나. 대신, 머리통을 남겨 놓으마."

그건 딱히 필요없는데….

어쨌든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란다.

그 사실에 조금 아쉬웠으나, 그닥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순순히 문을 열고 용서를 구하라.

아마도 저 미친 놈은 인외의 영역에 걸쳐 있는 존재일 것이니. 그것도 드래곤의 결계를 뚫을 정도의 저력이 있는 괴물 말이다. 허나, 그러한 존재가 낡아빠진 나무문 앞에서 문을 열어주기만 종용하고 있으니 기이한 위화감이 준다.

[초대받지 않으면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자.]

예의범절을 지키느라 참으로 고생할 것 같다.

레베카의 말처럼, 그런 멍청한 제약이 걸린 존재는 정말로 흔하지 않다.

밤의 귀족을 자칭하는 추레한 박쥐.

그것들 중 하나이리라.

**

"그럼 커피가 식기 전에 다녀오마."

갑자기 커피를 태워달라길래 뭔가 헀는데….

레베카가 늠름한 얼굴로 대사를 치더니 일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붉은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가녀린 등을 멍하니 쳐다봤다.

'…실내에서 웬 바람?'

뭔가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추측건대, 이건 마법으로 인한 연출인 것 같았다.

'애쓴다 애써….'

천년의 세월이 창피할 정도의 추태였다.

허나, 대사가 워낙 넘사벽이라서 그런지 은근히 그럴 듯해 보여서 더 어이가 없었다.

"아줌마, 멋있다…."

"아니. 하나도 안 멋있어."

나는 드물게 레베카를 칭찬하는 데이지에게 고개를 절레 저었다.

부디 멀쩡한 어른을 본받았으면 한다.

저런 거 말고….

'요즘 사춘기이신가?'

과연, 늦바람이 무섭다고.

레베카가 테오와 쌍벽으로 이상한 물이 든 감이 없잖아 있다. 이러다가 나중에 흑염룡이라도 될까봐 걱정이다.

'문화 전파는 신중히.'

뭐, 그 외에는 걱정되지 않는다.

하는 꼴이 좀 그래서 그렇지… 어쨌든 그녀는 진짜 드래곤이니까.

**

나는 한 손에는 쿨쿨 축 늘어진 레일라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삐약삐약 재잘거리는 데이지를 쥐고서 바람꽃이 있는 방으로 왔다.

"히히, 족제비 바버…."

…이게 꿈에서도 나를 욕하네?

바람꽃은 난리통에도 용케 깨지 않고 곤히 자고 있었다.

원래는 얘가 나름 예민한 편이었는데….

어느샌가 야생 늑대가 집에 키우는 게으른 댕댕이처럼 되어버렸다.

어쩄든 나는 댕댕이의 옆자리에 레일라를 고이 눕혔다.

한편, 아직도 눈이 말똥말똥한 데이지에게는 신신당부했다.

"뎃지, 내가 부르기 전까진 방 밖으로 나가면 안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

"응. 아라써."

아이고, 기특해라.

갑작스러운 소란 때문에 많이 놀랐을텐데… 제법 의젓하지 않은가! 내 멋대로 데이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주었다.

나는 난장판이 된 꼬꼬마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방을 나섰다.

다른 방에 있는 테오를 비롯해서 따로 챙겨야할 놈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은 팔자 좋게 자고 있네."

잠긴 문을 열자마자,

바른 자세로 누워 있는 고추 새끼 둘이 보였다.

아, 맞다. 하나는 이제 아니지?

나는 창백한 얼굴의 마을사람 한스에겐 심심한 애도를 보냈다.

이 다음으로,

"얌마, 이게 빠져가지고. 퍼뜩 안 일어나?"

이 마을에 들르자는 의견을 낸 연금술사,

시어도어 폰 히텐슈타인은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를 대신해서 두들겨 팼다. 현 사태를 불러온 원흉이 왠지 이 놈처럼 느껴져서 내 주먹이 무척 매서웠다.

"마, 뒈지기 싫으면 일어나."

"…비인간적인 처사. 폭력적이고 무도한…."

시어도어는 벌개진 눈을 뜨며 투덜거렸다.

녀석은 그동안 내가 많이 편해진 모양이다.

앞으로 그의 아침밥은 겨울바람에 꽁꽁 얼린 흑빵으로 해야겠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면은 보장받아야 합니다만."

"니 짬에 잠이 어딨어? 헛소리하지 말고, 이 놈이나 잘보고 있어."

나는 제 운명도 모르고 태평한 소리를 해대는 시어도어를 갈궜다.

비록 한스는 이미 구속해 두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수작부리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해야했다.

그 때였다.

­쿠구궁….

작은 흔들림과 함께 둔탁하게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이 소란스럽군요. 혹시 적습입니까?"

과연, 뺀질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

나는 정답이라는 뜻으로 시어도어의 머리를 한대 후려쳤다.

**

때는 삼백여년 전,

인간과 아인들의 대전쟁으로 혼란에 휩싸인 시대.

여인의 육신으로 검을 들어 전쟁터를 누비던 자가 있었다.

산을 운반하는 거인을 도륙하고, 고집스러운 난쟁이들의 성을 공략했으며, 혈혈단신으로 거만한 요정들의 왕을 굴복시켰다. 홍옥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전장에 나타나면 용맹한 오크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기어이 그녀가 탐욕의 용마저 베어버렸을 때,

황제는 여검사의 업적을 칭송하여 친히 이름을 하사하였다.

팬드래건.

음유시인들의 노랫말로 전해지는 위대한 영웅들 중 하나.

삼백년이 지난 오늘날도 회자되는 이름이지만,

역사에서 돌연히 사라져 버린 그녀의 최후를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세인들은 말한다.

그녀가 정치적인 이유로 말살 되었다고, 또는 전쟁영웅을 만들기 위해서 지어낸 허구에 불과하다고.

한편, 주정뱅이들은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영웅은 의외로 여인으로 돌아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

.

"흐음, 난제로구나."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고민에 빠진 모습은,

언뜻 보기엔 예쁜 옷를 골라보고 있는 여자들과 비슷해 보였으나 엄연히 달랐다.

"언월도라… 유사한 건 글레이브인가?"

그녀가 양손에 저울질을 하듯이 들고 있는 것은,

천이나 보석 따위가 아닌,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창자루였으니까.

그녀는 제 키보다 머리 세 배는 더 길어보이는 창을 두어번 휘둘러 본다.

무척이나 호쾌한 움직임이었으나,

정작 창을 다룬 이의 표정은 썩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검보다도 무게 중심이 극심하게 쏠린다.

꿰뚫는 것을 중점으로 하는 스피어보다 다루는 것이 훨씬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패도적인 무기 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과거에는 오크들이나 쓰는 무기라고 천시했으나… 막상 다뤄보니 이 또한 운치가 있지 아니한가?

"동방의 영웅이 애용할 만하군."

레베카는 호기롭게 웃었다.

잠깐이지만 치기 어린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러나,

­거기 있음을 안다. 수줍음에 고집이라도 부리는 겐가?

상념에 잠기기에는 장소가 좋지 못했다.

낡은 나무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실로 거슬렸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문을 열다면, 무례를 용서하고 상냥하게 보듬어주겠다.

문 너머의 존재는 마치 사람을 홀릴 것처럼 속삭였다.

실제로도 그런 의도가 다분하다.

붉은 눈동자에는 끈적한 마력의 흐름이 훤히 보였다.

천박한 마력이 낯이 익다.

사람을 유혹해서 잡아먹는 모기들의 고루한 방식이다.

"확정이군."

레베카는 한결 싸늘한 눈으로 문 너머를 노려봤다.

반면에, 문 너머의 존재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유혹하듯이 지껄인다.

­크크, 그대가 처녀라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섬세하게 핥아….

"주둥이 닥치거라. 토가 쏠리는구나."

­어, 뭐…? 지, 지금 뭐라고….

잔뜩 당황해서 떨리는 목소리였다.

레베카는 선심을 쓰듯이 그에게 재차 들려주었다.

"역겨우니 아가리를 닥치라고 했다."

­…가, 감히…!

그나마 조용하군.

하지만 곧 시끄러워질 게 분명했다.

"연습대상으로 쓸만…."

레베카는 창을 내세운 자세를 취하다가,

문득 밀려드는 회의감을 느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이딴 놈을 상대로 창이나 휘두르고 있어야 하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깜찍한 아이들을 예뻐할 시간도 모자란 마당에…!

"벌써 질리는군."

용은 변덕스러웠다.

하물며 그녀는 영웅 놀이나 하고 있을 나이가 아니었다.

쉽고 빠르고 간결하게 끝내자.

술… 아니, 커피가 식기 전에.

창은 투척무기다.

레베카는 별다른 미련 없이 창을 날렸다.

나무문이 종이장처럼 뚫리면서,

뒤이어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명중이군."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

레베카는 흡족하게 웃으며 먼발치를 바라봤다.

창백한 달빛 아래에,

두꺼운 창날에 꿰뚫리다 못해 찢겨나가 몸뚱이가 반토막된 남자가 있었다.

"끄으으으…."

놀랍게도, 그는 살아있다.

당혹과 증오가 점철된 눈으로 난데없이 창이 쏘아진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그는 푸른 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피부와 깔끔하게 빗어올린 머리가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다만, 그 미모가 무색할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반으로 갈라진 그의 몸은 꿈틀거리며 이어붙고 재생하고 있었다.

이윽고, 레베카를 발견한 그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네 년을 곱게 죽이진 않겠다."

"쯧, 겨울에도 모기가 있다니 말세로군."

"지, 지 지금 감히 본인을 모기라고 부른겐가! 네 년은 팔다리를 잘라서 평생…."

귓가에 앵앵거리는 벌레는 역시 질색이다.

레베카는 허공에 호박만한 크기의 불꽃을 만들어냈다.

"아가리 닥치라고 했다."

"……."

심상찮은 마법과 마주한 존재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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