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해뜰참
* * *
저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새벽녘이 떠오른다.
세상이 색을 되찾는 광경.
어둑했던 하늘에 번지는 찬란한 빛을 보며, 오늘도 변함없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해치웠나…."
아.
나도 모르게 마법의 주문을 입에 담았다.
흠칫 놀란 나는, 내 발치에는 수둑히 쌓여있는 잿더미를 유심히 살폈다.
…….
먼지와 재가 바람에 조금씩 날릴 뿐.
되살아나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휴, 천만다행이다.
'확인사살 완료.'
이로써 꺼진 불은 잿불까지 꼼꼼히 확인했으니 안심해도 될 것이다.
나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재를 모아 유리병에 담았다.
흡혈귀가 남긴 잔해는 연금술 재료로써 쓰인다고 하니 일단 챙겨두기로 했다.
'…일단은 이거 시체지?'
약간 죄악감과 꺼림칙함이 들었지만….
뭐, 살면서 해악만 끼쳐온 놈이니, 죽어서라도 이로운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대충 합리화했다.
휘이이.
미처 챙기지 못한 잿가루는 허공에서 산산이 흩어진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차가운 숨을 내뱉고서 발길을 돌렸다.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간다.
"고생했구나."
붉은 머리카락을 곱게 모은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맞이해준다.
따스한 온기에, 추위로 얼어있던 내 뺨을 녹으면서 혈색이 돌았다. 집 안은 조금 더웠다.
"고생은 레베카가 다했죠."
나는 멋쩍게 웃으며 갑갑한 겉옷을 벗으려 했다.
그런데, 겨울옷이 워낙 두터워서 그런지 옷을 벗는 도중에 팔이 끼여버렸다. 끙, 이거 잘 안 빠지네.
"킥킥."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모를 웃음소리에,
괜스레 민망해진 내가 키득거리는 그녀에게 눈치를 줬다.
"나참, 너무 웃는 거 아니에요?"
"왜에. 그럼 안되니? 응?"
레베카는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코트를 벗을 수 있도록 거들어 주었다.
"……."
진짜 반칙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수준이 아니다.
나는 내 코트를 접어 안아든 레베카를 보다가 항복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봐줬다."
"일단 이 층으로 올라가자꾸나. 여긴 상태가 영 좋지 않으니."
레베카가 내 손목을 지그시 당긴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대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말대로, 간밤의 일로 불에 그을리고 부서져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고쳐쓰긴 힘들겠네.'
집을 빌려쓴 입장으로서 변상해야할 것이다.
물론, 집주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흥흥~♪"
앞서 걷는 레베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배부른 고양이처럼 살랑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에, 나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밤새 성가신 일을 겪은 것치고는 기분이 썩 좋아보여서 신기하다.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납득한 나는 즐거워 보이는 그녀를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
테오는 귀를 바닥에 바짝 붙였다.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무척 조용해서 방 안에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실로 이상한 일이다.
분명 방에 들어오기 전, 그것도 방금까지만 해도.
바깥은 지옥을 연상케하는 비명소리로 시끄러웠는데….
'이럴 수 있을까?'
테오는 너무나도 고요한 방에 의화감을 느꼈다.
백색소음조차 허용하지 않는 기적의 정적.
이는 과보호가 심한 드래곤이, 오직 아이의 숙면을 지키기 위해서 펼친 상위 마법이었다.
'여기는 내가 있던 방보다 벽이 두꺼운가봐.'
대마법사가 보았으면 땅을 치고 욕할 마법이었나,
테오는 더이상 무서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킁킁.
안도한 테오는 본능적으로 주변의 냄새를 맡았다.
어쩐지 방 안에는 과일이나 꽃향기와 비슷한 산뜻한 향기가 주로 났다.
'거기에, 우유 냄새도 조금 나네.'
무심코 맡게 되는 기분 좋은 향기.
어딘가 맡아본 것 같으면서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킁킁!
테오는 그 향기로움의 정체를 탐구하고자 열심히 코를 울렸다.
한참을 그러던 중.
냄새 맡는 소년의 귓가에, 호기심을 품은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모해?"
"……!!"
화들짝 놀란 테오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몸인지라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엎드린 자세로 운명을 맞이하는 게 최선이었다.
"헤, 그, 안, 안녕하세요…."
"으응."
몸집이 조그만한 아이가 그를 본다.
반짝거리는 보라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다.
'데이지, 구나….'
테오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소녀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서로 낯가림이 심한 편인지라,
아직까지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테오는 데이지라는 소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도 그럴게,
'까맣다.'
서로 같은 색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껏 불길하다고 손가락질 당해온, 그 저주스러운 색깔을 지녔으므로.
테오는 밤하늘처럼 늘어뜨린 데이지의 머리카락을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랑 같아.'
난생 처음으로 만난 동류의 소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가까운 듯하면서도 멀리있는 듯한, 모순적인 거리감 때문에.
아니, 어쩌면 서로 혐오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테오는 남몰래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자기 자신이 미웠으니까.
"……."
"거기서 모해?"
데이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바닥에 달라붙어서 냄새를 맡고 있던 테오가 이상하다는 듯이.
"이, 이, 이건… 시, 시체 놀이예요…!"
어째서인지, 소년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숨겨야한다고 직감한 걸지도 모른다.
"글쿠나."
어떻게든 위기를 넘긴 걸까?
테오는 앙증맞은 소녀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
"근데. 왜 자꾸 킁킁 거려? 감기야?"
'……구석, 아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어!!'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몸만 멀쩡하다면 당장 접시물에 코를 박았을 텐데.
테오가 꿈틀꿈틀 몸부림치자,
놀란 데이지가 슬며시 거리를 벌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있지, 괜찮아?"
"……."
"얘, 괜찮냐니까아?"
"……."
"왜 말 안해…?"
"……."
또래 여자아이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어렵다.
테오는 일단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침묵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었으나,
행동력이 넘치는 꼬마에겐 썩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었다.
"치, 털뭉치한테 물어볼래."
데이지는 테오의 거듭된 무반응에 빈정이 상한 것처럼 뾰로퉁한 얼굴로 일어났다.
'에… 털뭉치?'
테오는 불길한 예감에 눈알을 굴렸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엔 침대로 다가간 데이지가 누군가를 흔들어 깨우는 모습이 들어왔다.
"털뭉치. 털뭉치. 할 말 있어."
"으으… 으으. 너, 즈거…."
그게 재앙을 부르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은 테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그러지 않는게… 제가 말해드릴테니까…."
"몰라. 킁킁이랑 말 안할래."
이미 마음이 상한 데이지는 말을 안 들었다.
"크, 킁킁이…?"
이 날부로,
테오의 별명은 킁킁이가 되어버렸다.
**
"하아암…."
요즘 애들을 따라서 일찍 잤더니만.
밤을 새는 게 적응이 안 돼서 그런지 꽤나 피곤했다.
내가 자꾸만 하품을 하자,
레베카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자꾸나."
피곤한 나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 있어서 고민이 된다.
"그래도 될까요?"
"피곤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란다. 그리고, 내가 곁에 있을테니 안심하렴."
하긴, 드래곤 눈나가 있으니,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레베카의 믿음직한 대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해요."
"그래. 나만 믿으렴.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란다."
…요즘 날이 추워서 그런가?
뭔가 조금 으슬으슬한 기분이 든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이불을 꼭 싸매고 자야겠다.
금방 애들을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꼬꼬마 녀석도 착하게 자고 있어야 할텐데.
"아, 그러고보니…."
"네?"
레베카가 문고리를 쥐며, 뭔가 깨달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들이 넷이나 모여있으면… 이 방의 구조와 면적을 고려해봤을 때, 빈 공간이 매우 협소할 것으로 예상되는구나."
…오늘의 날씨 정보인가?
갑자기 기상캐스터 뺨치는 딕션과 어휘를 구사하는 바람에 벙져 버렸다.
장황한 대사는 제쳐두고 요점은 알겠다.
레베카의 말미따나 이 방은 사람을 여섯이나 수용할만큼 넓지 않다.
부대낀다면 어떻게든 누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자고 있는 꼬마들에게도, 내게도 불편하기만 한 일이었다.
"애들이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빈방으로 가야겠네요."
"그, 그치."
레베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애들을 좋아하는 그녀는 못내 아쉬운 듯 보였다.
끼릭.
혹여나 애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딱 1시간이라도 편히 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며.
그런데ㅡ
"야아아아! 땅콩!!"
열린 문 틈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는,
아기 천사들의 귀여운 코골이가 아니었다.
"너, 오늘 진짜 죽었어! 내가 쓸데없이 깨우지 말랬지!"
성난 아기 늑대의 빼애애액거리는 하울링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치만, 킁킁이가 자꾸 나 무시해…… 꺄!"
"뭐라는 거야! 도망가지마! 너 이리 안 와?!"
데이지가 삐약삐약 비명을 내지르고, 분노한 바람꽃이 그런 데이지를 쫓는다.
"제, 제 이름은 킁킁이가 아니라 테… 끄억!"
뛰어다니는 두 꼬마에게 지렁이마냥 짓밟히는 테오가 있었고.
히잉….
이러한 혼돈 속에서도, 평화를 소망하며 꿋꿋히 잠을 청하는 용자 레일라가 있었다.
…대환장의 파티가 따로 없다.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이게 무슨 난리야.
"허허."
나와 레베카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지옥도를 보며, 동시에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편하게 잠들기는 그른 모양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