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불을 먹는 자(1)
* * *
누군가가 어스름 속에 잠겨있다.
그 건장한 체구는 청년의 그것처럼 보였으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깊게 패인 주름이, 그가 적지 않은 나이라고 말해준다.
노년에 접어드는 자.
한 때 영원한 젊음을 꿈꾸며 황야를 떠돌던 청년이 남기고 간 재였다.
"……."
그는 여느 때처럼 떠오르는 여명을 바라본다.
잔인할 정도로 찬란하다. 혼탁해진 눈으로는 잠시도 담아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오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늙은 그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야속한 태양을 향한 말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굶주림을 호소하는 불길한 속삭임은,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에 자리잡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
그는 시커먼 구덩이를 외면하듯이 눈을 감았다.
아침은 완연하게 밝았다.
고로 고약한 박쥐는 제 동굴로 기어들어 갔을 것이다. 게으르고 불실한 사냥꾼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
아침 댓바람부터 집안이 떠들썩했다.
아니, 좋게 말해서 떠들썩하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정신없고 시끄러웠다.
"끼약! 피, 피터어… 터, 털뭉치가 나 깨물어써…!"
데이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삐약거렸다.
제 팔뚝을 소중하게 감싸쥔 모습이, 전쟁터에서 위생병을 찾는 패잔병처럼 다급해 보였다.
"뭐래. 그냥 살짝 맛만 본건데."
한편, 그런 데이지에게 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녀석은…
"그러게, 누가 잠자는 늑대의 수염을 건드리래?"
뒤끝작렬하는 바람꽃이었다.
정황상 댕댕이가 자신의 잠을 깨운 뎃쥐에게 복수한 듯 보였다.
"아무튼 전부 몬나니 땅콩이가 잘못한 거야. 글구, 난 맛 없는 거 안 물어."
"…나 맛 안 없어! 피터, 이거 봐아. 자국 났어, 힝…."
데이지는 억울한 표정으로 살이 오른 토실토실한 팔뚝을 선보였다.
…억울해 하는 포인트가 조금 이상하다만.
뭐, 어쨌든 꼬꼬마의 하얀 팔뚝에는, 정말로 조그마한 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
오, 치열이 상당히 가지런하다.
범인은 평소 치아 관리에 충실한 모양이었다. 여러 의미로 칭찬이 마렵다.
'침만 발라도 나을 거 같은데.'
그래도 다행히 물린 자국은 옅었다.
비록 앙심을 품었어도, 사람 좋은 댕댕이가 손속을 봐준 것이리라.
나는 거창하게 약 바를 것도 없이 대충 토닥거리는 시늉을 했다.
"호~ 해줄까? 그럼 아픈 거 사라질 거야."
"응."
유난스럽긴 해도 까다롭지 않은 우리 꼬꼬마는 야매의 처방에도 만족했다.
"흥, 땅콩이 맨날 족제비한테 엄살 부려. 너 진짜 애기야."
바람꽃은 여전히 심술이 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이대로 얻어 맞고만 있을 데이지가 아니었다.
"…엄살 아니야. 털뭉치, 너가 진짜 물었자나…!"
우리 꼬꼬마는 겉보기엔 순해 보이지만,
여차하면 드래곤에게 펀치를 날릴 정도로 깡다구가 있었다.
"나도 깨물 줄 알아."
"어이… 땅콩. 그 이상 다가오면, 그 땐 전쟁이야…!"
두 꼬마는 흉폭한 레서팬더마냥 서로를 향해 솜방망이를 내미는 위협자세를 취했다.
'…싸움 수준 실화냐.'
진짜 세계관 최강들의 싸움이다.
내가 알던 그 찐 꼬맹이들이 맞나? 응, 맞다. 얘네들 진또배기 쪼꼬맹이다.
검은머리 꼬꼬마가 팔로 풍차돌리기를 시전하는 장면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큭…!"
부정맥이신가?
나는 갑자기 심장을 움켜쥐고 휘청거리는 레베카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니, 위험했단다. 하마터면 드래곤 하트가 깨질 뻔했구나."
뭐라는 거지.
이 눈나가밤을 샜더니 머리가 아픈 모양이다.가끔 수상할 정도로 애들을 좋아하는 용가리이니 이해했다.
'슬슬 말려야겠네.'
가급적이면 애들 싸움에 끼는 것은 삼가고 싶지만.
아침부터 할 일도 있고, 상태가 영 거시기한 용마망을 위해서라도 교통 정리를 해야할 것 같았다.
"싸움, 멈춰! 애들아, 그만해. 이러다가 다치겠다."
역사에도 기록될 일기토를 중재하자,
아직 피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린 짐승들이 눈을 치켜떴다.
"족제비, 쟤 버릇 없어! 키도 쪼그만한 게. 누가 위에 있는지 알려줄거야!"
…너도 버릇 없어, 임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너무나도 당당하게 반말을 찍찍하는 댕댕이의 기세에 눌려버렸다.
"……나 안 져."
한편, 말발이 달리는 데이지는 묵묵히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댕댕이의 트래쉬 토크에 넘어가지 않고, 행동으로 결과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결연해 보였다. 뭐, 이게 열살배기가 가질만한 태도인가 싶다만.
'고래… 아니 새우 싸움이군.'
제 1차 새우 전투가 발발하기 전에 말려야겠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서, 두 꼬마의 머리통에 각각 손바닥을 올렸다.
"너네들."
""응?""
대답은 사이좋게 하네.
나는 피식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랑 제미니랑 같은 밥 먹고 싶어?"
참고로 후치와 제미니는 마구간에 있는 친구다.
주식은 건초 위주로, 가끔씩 당근이나 과일을 급여한다.
"에."
"그…."
달걀을 말하는 걸까.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꼬마들에게 침묵한 채로 웃기만 했다.
"……."
난 조금도 화나지 않았다.
그냥 밤을 샜더니 지쳐서 그러는 거야.
"…힝."
내가 아무말 하지 않았음에도.
데이지와 바람꽃은 눈치를 보며 알아서 무릎을 꿇더니 양손을 높이 들었다.
**
모종의 이유로 오늘 아침은 간단하게 과일로 떼웠다.
여담으로,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본 데이지와 바람꽃의 얼굴이 잠깐 환했다가 금방 시무룩해지는 게 웃겻다.
토끼 모양의 사과가 귀엽고 신기하지만.
진짜로 말이랑 같은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서 우울해 하는 눈치였다.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허나, 시무룩한 얼굴이 재밌어서 내버려두었다.
게다가 애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그 때였다.
바람꽃과 데이지가 갑자기 가위바위보를 했다.
"으아, 어떡해…."
"어떡하긴. 졌으니까 빨리 말해."
열심히 속닥거리는데 다 들렸다.
아무튼 데이지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더니 넌지시 내게 물었다.
"저기, 피터어. 오늘은 고기가 없나봐…?"
아, 고작 이거 물어보려고….
쭈글쭈글하고 불쌍한 꼬마의 모습은 내게 있지도 않는 모성애를 자극한다.
허나,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침에 먹는 과일이 그렇게 좋대. 많이 있으니까 실컷 먹어도 돼. 저녁은… 알지?"
데이지는 작게 '히익'하면서 떨더니, 체념한 얼굴로 아삭아삭 사과를 맛있게 베어먹었다.
바람꽃 또한 친구를 따라서 꾸역꾸역 사과를 삼켰다.
이로써 두 꼬마는 불행을 함께할 친구가 옆에 있다는 행운을 누릴 것이다.
그래, 많이 먹어둬라.
저녁은 지푸라기란다.
"하아아."
레베카는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꾸 히죽히죽 웃었다.
뭔가 남사스러운 표정이어서,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
아무것도 모르는 레일라만이 그저 행복한 얼굴로 토끼를 씹어먹었다. 하양이가 제일 장하다.
**
흔히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한다.
허나, 재수가 없게도 그들은 하필 식사 중에 찾아왔다.
거! 총각 있소? 잠깐만 여 나와보쇼!
밤 손님이 갔으니, 이제 아침 손님 차례였다.
아침이 밝자마자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했으니 놀랄 것은 아니었다.
비록 초대하지도 않았고, 차린 것도 없지만… 그래도 점유자로서 마중이라도 나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나는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며.
나를 물끄러미 보는 말썽쟁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보냈다.
"얌전히 있으면 점심은 함박 스테…."
"콜, 콜!"
약삭빠른 바람꽃은 냉큼 받아들였다.
조금은 팅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도 마음이 더 급했나보다.
털뭉치, 굉장해!
흥, 이정도야.
??
뎃쥐와 댕댕이가 열정적인 하이파이브를 나누자, 아가용이 '이게 뭐지?' 하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춘이구만.
조금 부러워진다.
나는 그나마 나와 연령대가 맞는 사람에게 대사를 쳤다.
"준비됐어요, 레?"
"응? 뭐… 그렇단다."
쯧, 레베카는 재미없다.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지긋해서 그런가, 의외로 놀 줄 모른다니까. 완전 틀딱…….
"……."
"끄아악."
다짜고짜 아이언 클로를 당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복합적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인간은... 날 수 있다.
**
다 무너진 현관 앞에 마을 사람 다섯명이 모여있었다.
성별은 남성, 나이대는 골고루 였다.
이십대로 하나, 삼사십대가 셋, 한 사람은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들 중에서 두 사람은 내가 아는 얼굴이다.
그들은 딱히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그다지 호의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만나기 전에 한스부터 털어봐야 했는데.'
동정심 때문에 심문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그 불의의 사고만 아니었어도 아무렇게나 다뤘을텐데….
'나도 남자니까 어쩔 수 없지.'
일단 후회를 접어두고, 우선 그나마 낯익은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브루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반갑… 음, 자네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면사로 얼굴 가린 레베카를 흘겨봤다.
탭을 그렇게 쳐도 안 봐주더니… 기어코 얼굴에 자국이 생긴 모양이다.
"별일 아닙니다."
"허허,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네."
누가 참견쟁이 아니랄까봐 이 아저씨가 잔말이 많다.
컨디션 난조로 기분이 썩 좋지 않는 나는 재차 본론을 요구했다.
"그래서 용건은 뭡니까? 아침 댓바람부터."
"야, 이봐, 너. 뒤질래? 브루노 씨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목청이 커다랗고 껄렁한 말투가 난입한다.
이 마을 사람들 중에서 유일한 이십대로 보이는 거구의 청년이었다.
그의 특이사항으로.
어느 누구와 달리, 테스토스테론이 과다분비하는 모양인지… 눈부신 스킨헤드였다.
'겨울철에 대머리라니 시릴 것 같네.'
체온 유지를 위해서 골무라도 쓸 것이지….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추위에 빨갛게 익은 대머리를 훤히 노출하고 있었다. 혹시 고통을 즐기는 변태인가?
내가 의아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자,
내 시선 처리를 쫓던 스킨 헤드 녀석이 갑자기 울그락불그락하며 발작했다.
"지금, 어딜 쳐보는거냐…! 이 비겁한 새끼가!!"
완전 비무장은 아니었나.
이름 모를 대머리는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이 놈 왤케 공격적이야?'
그러고보니, 남성 호르몬은 공격성을 증가시킨다던가.
이 대머리는 호르몬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노예일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내가 도움을 줘야겠다.
까짓꺼 남성호르몬의 분비를 줄여주면 되지 않는가?
한스에게 친구가 생기기 직전ㅡ
"데론!!"
설산이 무너질 듯한 외마디의 고함이 그를 막아섰다.
데론이라 불린 대머리 청년은 얼어붙은 것처럼 눈을 끔뻑이며 말한다.
"그치만, 브루노 씨… 이 새끼가."
"그 도끼 내려놔. 네 손가락을 싹다 잘라 버리기 전에."
브루노의 살벌한 말에, 데론이 새파란 얼굴로 도끼를 내려놨다.
이윽고, 두명의 이름 모를 중년이 나서서 데론을 때려눕혔다.
"이 등신아! 멋대로 나서고 지랄이야!"
"감히, 어른들이 하는 일에!"
"컥, 끅, 크!"
한동안 피륙을 두드리는 소리와 고통을 감내하는 신음이 이 자리에 머물렀다.
나와 레베카는 영문도 모른 채,
잔혹한 린치의 현장을 찌푸린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ㅡ
"허허, 미안하게 됐다. 혈기왕성한 친구라서 어디로 튈지 몰랐네. 흠씬 패놨으니 부디 용서하게."
데론이 침묵하자,
브루노가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말했다.
손도끼로 머리가 갈라질 뻔했음에도, 성큼 나서서 잘잘못을 따질 수 없었다. 나는 시체마냥 널브리진 자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가혹하지 못했으니까.
"일단은 뭐…. 근데,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저 정도면 침 바르면 낫는 수준이니 걱정하지말게. 자업자득이니."
"맞습니다. 다 이 놈 잘못이죠."
"마을에서도 못된 장난으로 유명한 놈들입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중년 남자들이 서로 입을 맞춘 것처럼 떠든다. 점점 그들의 분위기에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아까부터 뒷짐을 지고 있던 노인, 아캄의 촌장이 내게 말했다.
"그 쪽 젊은 녀석들은 언제나 말썽을 부리곤 한다네. 그런 의미에서 총각에겐 미안하게 됐구려. 우리 마을에서 영 좋지 않은 경험을 겪었다고 들었으니. 내가 대표로서 사죄를 하겠네."
질 나쁜의 장난으로 넘기려는 건가.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며 표정을 관리했다.
"저 덩치 큰 친구는… 그 자네가 데리고 간 한스의 패거리라네. 그래서 두목을 잡아간 자네를 벼르고 있었던 거고."
역시 브루노 스피드왜건은 혀가 길다.
그리고, 그저 사람 좋은 참견쟁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입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역시 이유 없는 호의는 드물다는 건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서 빨리 이 촌극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서요."
"아까처럼 우리 방식대로 큰 벌을 줄테니, 한스를 돌려주는 게 어떤가?"
"자네가 꽤나 칼을 좀 쓰는 것 같다만… 아무래도딸아이가 있으니 주의해야지?"
딸이 있다라….
어째서인지 질 나쁜 협박처럼 들리는 문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