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불을 먹는자(2)
* * *
무지는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맨몸으로 범의 아가리에서 탭탠스를 출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감당할 수 없는 용기를 부린 데에는 가볍지 않은 대가가 따른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아침부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애가 있으니 주의해라?"
어느 면전에서 혓바닥을 놀린 건지 알고나 있는 걸까.
아마도 모를 것이다. 알고 있음에도 이러는 거면 심상치 않은 자살지망자일 터이니.
"왜, 사탕이라도 챙겨주게요? 농담치곤 재미없는데."
마녀의 단검을 꼬나쥐고 마을 주민들을 노려보자,
며칠은 씻지 않은 것처럼 꾀죄죄한 북부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다.
"저게 소문의 고…."
비교적 왜소한 중년의 사내가 부르르 떨며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 밤 내게 의해 소중한 것을 잃은 가엾은 청년에 대한 소식을 접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이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쨌든 다짜고짜 칼을 빼든 탓에 이목이 내게 쏠렸다.
덕분에 분화하기 직전인 용의 분노는 들키지 않은 듯 했다.
"……."
면사를 뒤집어 쓰고 있는 레베카.
그녀의 붉은 입술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으나,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요즘 들어서 타는 쓰레기가 많이 보이는구나.
고블린에 이어서 찾아온 불나방 시즌 2.
대충 송장 치우게 생겼다는 의미다.
그나마 화장할 필요는 없어서 편하려나….
허나, 막상 꿈에서 나올까 두려운 참사가 벌어질까 두려웠던 나는,
"…어, 에?"
"진정해요. 이러다가 손톱 자국 나요."
레베카의 꽉 다문 주먹을 억지로 펴서 깍지를 끼웠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하고 떨었지만, 나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 눈나, 가끔씩 데이지보다 못 미더워.'
사고를 친 전적이 은근히 많은 데다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라도 잡아둬야 안심이 된다.
그리고, 확실한 증거를 얻기 전까지는 전면적인 충돌은 피하고 싶었다.
아직 이들이 마족의 끄나풀이라고 밝혀진 것이 아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시골 주민들이 서로를 싸고 돌며 외부인에게 텃세 부리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레베카가 나섰다가 마족이 달아나거나 숨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흡혈귀 보르네오를 들은 바, 이 마을에 잠식한 마족은 자신의 영역이 침범 당해도 나서지 않을 정도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보였으니 신중해야 했다.
"그, 그댜여. 지, 지금 이럴 때가, 나중에 얼마든지…."
"씁, 제가 그건 알아서 할게요. 지금은 얌전하게 있어요"
고로 천년 맘의 투정은 묵살했다.
무려 나보다 천 살 연살이지만, 이럴 때는 말 안 듣는 애 취급해도 마땅하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만큼, 나는 레베카에게 자제심을 기대하지 않는다.
'땀이 좀 많으시네.'
아무튼 결과적으로, 나는 여자와 손깍지를 한 채로 불한당의 무리 앞에 서 있는 셈이었다.
뭔가 우스운 꼴인 듯 싶지만…
뭐, 새빨간 레베카는 몰라도 나는 한 점 부끄럼 없이 당당하다. 오히려 좋아.
"…형씨에겐 우리 경고가 우습게 보이나 보군."
그런 나를 보며, 브루노 스피드왜건이 어째서인지 울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저씨, 아직 독신이라고 했던가?
실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나는 왠지 승리한 기분으로 씨익하고 웃어줬다.
"한스인지 뭔지는 당사자끼리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보시죠."
눈앞에 있는 시골 촌놈들은 알까 모르겠다.
이 축객령이 본인들을 살리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유감스럽게도, 브루노는 그런 호의를 깨닫지 못한다.
"후회하지 말게. 이건 다 형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한스 놈의 패거리가 앙심을 품었어. 칼질 살벌한 형씨는 못 건드릴 지 몰라도… 그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얼마든지 손을 뻗칠 수 있지. 처신 잘하게. 형씨가 한스를 돌려주면 내가 그들을 설득하도록 하지."
…이 아저씨는 오래 살긴 글렀네.
나는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만악의 근원을 놀리는 브루노를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뿌드득.
문득, 괜히 손깍지를 꼈다고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도 꾹꾹이를 하는 줄 알았더니… 어째 손가락 뼈마디에서 들리면 안될 소리가 난다.
'음, 그냥 다 때려치울까.'
사실 한스를 반납하든, 이들을 응징하든.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리 나쁘진 않다. 정체 모를 마족에게 엮이는 것보다는 제 갈 길 떠나는 게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허나, 이대로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인신공양.'
내가 원작에서 보지 못한 시나리오.
그런 의미에서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닐 것으로 추정하지만… 앞으로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도 그럴게ㅡ
'마족을 토벌해야할 제국이 정신 없을테니.'
한창 북부를 탄압해야 할 황제는 자국의 귀족과 주변국에게 물어뜯기고 있고,
명실상부한 제국의 계승자인 황태자는 도리어 입지가 흔들렸으며,
유폐되어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 황녀는 여신의 대리자를 자청해 황실의 치부를 폭로하고 실종된 상태다.
하물며, 해츨링을 비롯해 제국이 야심차게 준비한 비밀병기마저 증발했다.
이 상황에 제아무리 제국이라고 한들 변두리인 북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은 많지 않으리라.
따지고 보면 전부 자업자득이긴 한데….
어쨌든 내 개입으로 인해 원작의 전개가 심하게 비틀려 버렸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지.'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헌데, 벌써부터 마족들이 암약하고 있으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꼴랑 어린애 하나 구했을 뿐인데, 혼돈으로 나아가는 전개에 쓴웃음만 나왔다.
물론, 후회하거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나 따위가 뭐라고.'
주제 파악은 하고 있다.
나는 그저 운 좋은 일반인에 불과하다. 할 수 있는 일에 뚜렷한 한계가 있음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처음부터 모르고 지나쳤으면 모를까.
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마주하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은 일종의 방만처럼 느껴졌다.
무지는 죄가 아니다.
허나, 그를 깨닫고도 외면하는 것은 죄악이다.
'나로 인해 달라진 이야기.'
적어도 이 일의 내막은 알아야한다는 강박이 든다.
호기심이나 위기심에 의해 발로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 정도는 알아야 한다.
흙탕물이 범람하기 전에, 방둑을 쌓아올릴 시기를 재야 했으므로.
나는 악수 대신에 중지를 내밀며 정중히 말했다.
"오냐, 신경 써줘서 고맙다. 이제 할 말 끝났으면 꺼져. 우리 애들 밥 먹을 시간이거든."
"이 새끼가, 어르신이 좋게좋게 말하면…"
인상을 오만상 구기는 어깨 형님들은 딱히 무섭지 않다.
독한 마음을 먹으면 형님이 아니라 누님으로 바꿔줄 수 있으니.
[끼리릭, 끼릭. 주인님… 그거 하자. 다, 자르자.]
큰 힘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나는 기이한 울림을 보내는 저주받은 단검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이 마을의 성별 대비는, 내 손에 달려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질 때ㅡ
"그만하지. 이러다가 다 죽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나와 마을 주민 사이를 갈랐다.
지금까지 한 발자국 떨어져 관망하던 건장한 체격의 노인은 이어 말한다.
"이보게 외지인."
주름진 눈을 슬며시 뜨이며.
북방에서 보기 드문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흐리멍텅하여 속내를 읽기 힘들었다.
나는 약간 그리운 기분과 동시에 옅은 거부감을 느끼며 대꾸한다.
"뭡니까 촌장."
"한스는 보내주게."
이 동네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한다.
설마 노인이라고 공격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건가? 그건 오산인데.
"대신, 내가 남도록 하지. 식사 한 끼 대접해주게나."
**
"아침부터 굶고 나오니 시장했다네. 그래서 아침 메뉴는 무엇인고?"
"아침?"
노망난 영감님의 헛소리에, 귀가 쫑긋 솟아난 댕댕이가 보였다.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없어요. 저희 아침 먹었어요."
"엑."
콩고물을 기대하고 기웃거리던 바람꽃은 크게 실망했다.
나참, 제 얼굴만한 사과를 세 개나 먹어놓고.
아무래도 한창 배고플 나이인 그녀는 과일만으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감자라도 쪄드릴까요?"
"푹 삶아주게. 요즘 이가 좋지 않아서."
"난 구운 감자가 좋아."
의외로 낯짝 두꺼운 노인네는 둘째치고,
나는 야무지게 꼽사리를 끼는 댕댕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웬일로 혼자 온 그녀에게 물었다.
"람람아, 여기서 뭐해? 친구들은?"
"…몰라. 나 배고파."
평소에도 틱틱거리지만, 오늘따라 영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아침부터 혼냈다고 시위하는 건가?
그런 것치곤 좀 시무룩해 하는 것 같다.
"그래, 배고프면 먹어야지."
"뛰어난 사냥꾼인 늑대는 아침 일찍 일어나. 근데 땅콩이들은 게을러 빠졌어. 흥, 한심해."
바람꽃은 내가 내온 육포를 오물거리다가, 갑자기 투덜거리며 견과류를 흉보기 시작했다.
뭔가 의미 모를 비난이지만.
눈치 빠른 나는 대강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안 자고 버티던 꼬꼬마와 잠 많은 아가용이 사이 좋게 꿈나라로 떠난 게 아닐까?
'레베카가 왜 안 내려오나 했더니.'
팔불출 용마망은 코 자는 아이들을 구경하느라 정신 없는 모양이다. 덕분에 들끓던 레베카의 분노가 가라앉은 듯해서 다행이다만.
아무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나는,
친구가 없는 불쌍한 아기 늑대가 왠지 우습고도 기꺼워 졌다.
놀러갈 데가 없어서 온 곳이 여기란 말이니까.
야생 동물이 마음을 연 느낌이라 나쁘지 않다.
기껏 의지하러 온 댕댕이를 쫓아내는 건 사람의 도의가 아니므로, 일단 레베카가 올 때까지 데리고 있기로 했다.
"아이고, 람람이 그랬어요? 알았어, 알았어. 얼마든지 먹어."
"머, 머리 만지지마. 족제비, 밥이나 내놔!"
**
끄아악!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좀 놀렸더니,
먹을 거 다 얻어먹은 바람꽃이 내 손을 깨물고 달아났다.
'댕댕이의 탈을 뒤집어쓴 떼걸룩….'
오늘따라 수(手)난이 많은 기분.
나는 튀긴 감자를 하나 집어먹으며 쓰라린 아픔을 감내했다.
"털난 아이와 사이가 좋구만."
"하, 이게요?"
이 영감님은 눈이 어두우신가.
내 손바닥에 난 무시무시한 이빨 자국이 안 보이나 보다.
어찌나 야무지게 물었는지, 피는 나지 않지만 작고 가지런한 치열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 댕댕이는 치아관리도 성실히 해온 모양이다.
"물론. 그들은 웬만해선 인간을 물지 않거든."
"잘만 물던데."
"아니, 물렸으면 뜯겨나가는 게 보통이지."
영감님이 쓸데없이 살벌하네.
그 조그만한 애를 보고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게 깨문 게 아니면 뭔데? 애교라도 되냐?'
신기한 생물처럼 들여다보는 촌장이 신경에 거슬렸다.
허나, 일단 노인인데다가 스스로 인질이 된 괴짜이므로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됐고. 잡혀와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젊은 친구가 성질이 급하구먼. 난 이제 막 식사를 시작했다네. 한스, 그 친구도 아직 자네 손아귀에 있고. 사람이 먼저 성의를 보였으면, 오는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나저나, 고작 하루만에 집안 꼬라지가… 에잉, 쯧쯧."
밥 얻어먹으러 온 노인네가 한다는 소리가.
노인네는 필요 없다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이랍시고 뻔뻔하게 홀로 들어온 촌장을 보며, 나는 그의 자신감이 어디서 발로되는 건지 궁금해졌다.
노인답지 않은 건장한 체구일까.
그도 아니면 세월이 쌓아올린 알량한 지혜? 시골 마을을 대표하는 지위?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명망과 신임? 그도 아니면….
뭐, 어차피 잘된 일이지.
나는 알아서 드래곤의 레어로 기어 들어온 촌장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한스 다음으로 이 노인을 찾아갈 생각이었니까.
"커다란 박쥐가 들어와 버려서요. 영감님 말대로 집에만 있을 걸 그랬어요."
툴툴거리는 척했다.
흠, 촌장은 귀 먹은 노인네처럼 눈을 감고서 감자 튀김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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