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불을 먹는자(3)
* * *
얇게 썬 감자를 기름에 튀겨 그 위에 설탕과 소금을 친다.
무척 단순한 조리법이지만, 연료나 열량이 풍족하지 않은 북부 지역에선 보기 드문 방식이다.
"기름이라 사치스럽구먼. 오랜만에 호강했다네."
그 때문인지 촌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에 묻은 기름까지 핥아먹었다.
"흠흠, 조금만 더 내올 수 있겠나?"
뉘집 영감님인지 몰라도 건장한 체구만큼이나 먹성이 좋다.
나는 애들이 먹을 몫을 따로 빼두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호강은 댁의 아드님에게 받으세요."
"허허, 젊은 사람이 영 야박하구먼. 노인네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그리고… 난 독신이라네."
…이 마을 남자들은 죄다 솔로인가?
어떻게 된 게 대답하는 사람마다 왜 이렇게 짠한 지.
"감자 좀 더 드릴까요?"
"사양하지 않겠네."
역시나 넉살이 좋은 노인이었다.
촌장은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꾸역꾸역 감자를 집어삼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의연한 모습조차 슬프게만 보이니 신기할 따름이다.
'돌봐줄 자식이 없으니 사람이 염치가 없어진 게 아닐까?'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 여기있다.
내가 안쓰러운 생물체를 보듯이 지긋이 쳐다보자,
"…입맛이 확 떨어지는 눈빛이구려. 쓸데없는 동정은 오히려 실례라네."
촌장은 얹힐 것 같은 표정으로 흡입을 멈췄다.
노인네의 먹방을 지켜보는 취미가 없는 나로선 잘된 일이다.
그대여, 이쪽은 끝났단다.
이제 시간 끌기는 충분한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꽁꽁 숨기는 노인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영감님은 동정을 받아도 싼 사람인데요?"
"…젊은 친구가 성질을 돋우는 재주가 있구먼. 들어보게, 내가 이 나이까지 독신으로 산 이유는…."
고루한 노인의 옛날 이야기는 사양하고 싶다.
"그딴 건 관심 없고. 그 나이 먹고 수하들 뒷바라지나 하러 온 영감님 입장부터 들어봅시다."
"수하는 무슨. 젊은 놈이 사고치면 어른이 나서는 게 당연한 일이라네."
"그런 것치고도 꽤나 싸고 도네요. 혹시 한스라는 친구가 영감님이 숨겨둔 애인이라도 됩니까?"
"……."
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주 험악한 인상이었다.
눈 앞의 노인은 소싯적에 주먹깨나 쓰던 양반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짧은 침묵 끝에,
"…자네의 취향은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가 좋다네. 뭐, 다 늙어서 만나줄 사람은 없겠지만."
촌장이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노회한 만큼이나 쉽사리 당황하지 않고 금세 표정을 유지한다.
나는 호방하게 웃는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직도 그의 속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부르르.
타인의 살의를 감지하는 아티팩트.
마녀의 원한이 서린 단검이 제멋대로 요동치며 경고를 보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하고 있으나, 한가락하는 살벌한 노인네인 것 같다.
**
'으으….'
어둠에 가라앉아 있던 남자의 사고가 돌연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연금술사, 이 자를 깨워라. 수단 방법은 고려하지 않아도 좋다.
반쯤 정신을 차린 남자는 무언가 공허함을 느꼈다.
그러나, 독한 술에 몸을 담근 것처럼 몽롱한 감각에 취한 터라 그 감상은 금세 잊혀진다.
저 …님, 이 분은 이래봬도 중상을 입은 환자입니다만.
문득,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환자? 여긴 진료소인가?'
마을에서 유일한 치료사인 약쟁이의 목소리는 아니다.
허나, 그는 왠지 그렇다고 생각했다. 담담하면서 평이한 목소리가 지적으로 느껴져서 였다.
인간은 알이 없는 정도로 죽지 않는다. …사내로선 모를 일이지만.
머리털 나고 들어본 여자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였다.
다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나쁜 여자로군.'
그래도 목소리 하나는 끝내주는 년이니, 혹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지?'
마을 최고를 자부하는 하반신에서 감각이 없었다.
무언가 불길했으나… 아마도 지독한 숙취 때문이리라. 술을 많이 마시면 서지 않을 때가 가끔 있으니.
크흠. 여하튼, 그이가 깨워서 알아보라고 했느니라. 그새 정이라도 붙인게냐?
그런 건 아닙니다. 귀찮았으니 제겐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바로 깨우겠습니다.
치료사라는 놈이 여자의 닦달에 못 이겨 환자를 건드리다니.
'쯧쯧, 누군지 몰라도 불쌍하군.'
남자의 생각은 거기까지 였다.
겨드랑이의 끔찍한 고통과 함께 눈꺼풀이 번쩍 뜨였으니까.
"끄으응…."'
정신을 차린 한스는 무기력한 신음을 흘리며 눈알을 굴렸다.
그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깨셨습니까?"
미모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끈한 얼굴의 사내였다.
너무 메마른 볼과 눈그늘이 자욱한 점이 그나마 흠이라고 되나… 이 또한 퇴폐적인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가 저도 모르게 침을 흘릴 정도였다.
'…잠깐, 매력?'
북부의 대장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다.
매력이란, 엉덩이가 풍만한 데릭의 와이프에게나 어울린다. 감히 이딴 기생오라비에게 쓰일 수 없는 단어란 말이다.
그런데…
두근.
어째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인지….
한스는 스스로의 감정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여기가… 어디오…? 나는 대체…."
"아, 일어나는 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지혈제를 썼지만, 피를 많이 흘려서 큰일날 뻔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라서 듣기 좋다.
한스는 그 목소리를 잠깐 음미하려다가, 뒤늦게 치료사의 말을 깨닫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섬뜩함을 느낀 그는 힘 없는 목소리로 의문을 표한다.
"내 몸이, 아래쪽에… 감각이 전혀 없소… 어떻게…."
"칼날이 영 좋지 않은 곳을 지나쳤습니다."
잘 생긴 치료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여상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뉘집 똥개가 담벼락에 오줌이라도 눈 것 마냥.
"…그게 무슨 소리요?"
"안정을 위해서 듣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굳이 알고 싶다면 알려드리지요. 당신께선 음경과 음낭을 상실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스는 그런 전문 용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상실'이라는 뉘앙스에 담겨 있는 불길함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한스는 독이 든 잔이 뭔지 알고 마시는 기분으로 되물었다.
"이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간단히 말하자면, 생식기관과 이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성관계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뭔가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천사처럼 찬란한 외모를 지닌 남자가 지옥에서 나올법한 끔찍한 말을 지껄였다.
"이, 이보시오! 이보시오오!! 치, 치료사 양반…? 장난이 너무…."
"당신은 성불구자입니다."
확인사살.
이런 건 정신 나간 개소리에 불과하다!
고 말하고 싶지만…
치료사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한스는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었다.
크고 든든한 존재감은 온데간데 없다.
그 대신 사무치는 공허함만 남아 절규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고자라고…? 이게 무슨…! 아으으으…."
"안정을 취하시죠. 흥분해서 출혈이 터지면 제가 귀찮아집니다."
"시발, 그게 말이라고…!"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너무나 야속했다.
**
"크으으, 돌려줘… 내 좆 고쳐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처럼.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서럽게 우는 건장한 청년을 보며.
"…제법 팔팔해 보이는구나."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난 레베카가 입술을 달싹였다.
본래 마족의 하수인이라 추정된 인간을 관찰하려고 했으나, 이 상황에선 무의미해 보였다.
"천성적으로 건강한 개체인 듯 합니다. 당장 죽을 걱정은 덜었습니다만, 조만간 국부의 상처가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시어도어는 남 일이라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레베카는 그런 시어도어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봤다.
성정체성을 잃은 남자의 멘탈을 산산조각 낸 것은 이 자였다. 덕분에 이 사단이 났다.
'뭐,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악신에게 몸과 영혼을 바친 신도들은 진저리 나는 독종이다.
빈껍데기만 남았기에, 고작 신체가 훼손된 정도로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한스는 아직 말로 회유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굳이 피를 보지 않는 편이 편하다.
레베카는 옆에서 멀뚱히 서있는 시어도어에게 대뜸 명령했다.
"네가 울렸지 않느냐? 어떻게든 달래거라. 이대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누군가를 달래본 일이 전무합니다. 제가 아는 방법이라곤 진정제 아니면 안락사 뿐이지요. 부디 위대한 분께서 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정중한 것인지, 장난치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레베카는 잠깐 고민하다가,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조언을 내렸다.
"이 자의 상실감이 예상보다 무거운 듯하니, …'그거'라도 붙여준다는 식으로 협조를 구해 보거라."
"으흠, '그거'라니요? 대체 '그거'가 무엇입니까?"
"……."
"아, 스스로 깨우쳤습니다."
본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눈치챈 시어도어는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한 분의 조언을 따라, 저 자에게 성기를 부착 시켜준다는 식으로 설득하겠나이다."
"한 적 없다. 입 닥치거라."
…뻔뻔하고도 괴상한 인간이다.
그이가 왜 그토록 이 연금술사를 질색하는 지 알 것 같았다.
* * *